주술사의 예언
바람과 물결을 타고 마르카다에 도착했을 때는 9월 초였다.
멀리 배의 커다란 실루엣이 보이자마자 부두에서 난리가 났다. 약간 투박한 종소리가 도시 곳곳에서 사람을 불러냈다. 2천톤급의 배는 입항이 어려워 조금 먼 바다에 정박했고 천톤급 배 세 척이 항구로 들어갔다.
"귀한 물건을 팔려는 사람은 이쪽으로 온다. 양이 많은 사람은 저쪽으로 간다. 둘 다 아닌 사람은 기다려라."
바칸이 나서서 정리했다. 귀한 물건의 구매는 다미앙이 맡았고 양이 많은 물건은 다른 상인이 맡았다.
"상아. 금이 가지 않았으나 노란색. 카쿠 다섯 포대 준다."
아껴 먹으면 세 식구가 석 달은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상아를 들고 온 자는 기쁜 얼굴로 수레에 카쿠를 싣고 떠났다.
그 외에도 늑대나 여우나 표범 가죽을 들고 온 사람이 많았다. 처리가 깔끔하여 최소 상급은 되는 가죽이었다.
"바칸, 민물진주 나도 처음 보는데."
다미앙의 부름에 바칸은 달려가 민물진주를 살폈다. 씨알도 굵고 색감이 일정했다. 모양새가 동그랗지 않고 제각각인데 잘 조합하면 특이한 작품이 나올 것 같았다.
"큰 건 50개에 한 포대, 작은 건 200개에 한 포대."
다른 쪽에선 부족 단위로 온 자들이 가죽 수십 또는 수백 장씩 꺼내놨다. 상인들이 가죽을 일일이 감정하여 가격을 매겼다. 가격에 따라 카쿠를 적당해 내놨다.
"장갑, 장갑 없어?"
"10월에 또 온다. 그때 장갑 가져온다."
장갑이 없다는 말에 거래를 포기하고 돌아가는 사람도 일부 있었다.
밤이 어두워지고 거래는 잠시 중단되었다. 도시 사람들은 돌아갔고 바칸은 초대를 받아 혼자 집정관 저택으로 갔다.
"여긴 마르카다의 주술사다."
"나는 아틀란티스의 영주 바칸이다."
만찬은 음식 종류가 풍성하지 않아도 맛이 다 괜찮았다. 바칸은 배 두 척을 마르카다에 임대하려는 계획을 말했고 집정관은 아주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령이 싸운다!"
바칸과 집정관이 임대 금액에 관해 흥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술사가 음식을 튕기며 소리 질렀다.
"정령이 싸운다."
주술사는 급히 씹던 음식을 뱉어버리고 동북쪽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엎드린 주술사의 목덜미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불의 정령이 쫓겨났다."
한참 엎드려있던 주술사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마르카다는 괜찮겠지?"
"여긴 괜찮다."
"내 영지는 어떤가?"
불의 정령이 쫓기면 두 가지 자연재해가 생겨난다. 하나는 폭염이 이어지는 것이고 하나는 비가 안 오고 물이 마르며 가뭄이 드는 것이다.
둘 중 하나만 올 수도 있고 둘 다 올 수도 있다.
"불의 정령은 붉은 강을 넘지 않는다."
폭염이든 가뭄이든 여파는 있어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는 뜻이다.
"얼마나 오래 갈까?"
"최소 2년."
"자작, 다음에 올 때 무기를 좀 가져다줬으면 한다. 상아와 털소 가죽을 준비하겠다."
"얼마나 필요하지?"
"3백 자루. 칼보다는 철퇴와 같은 타격 병기가 필요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천으로 된 옷보다 가죽으로 된 옷이 많다. 그래서 갑옷은 필요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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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가 2미터 넘고 실금 하나 없고 속껍질이 하얀색인 상아 5쌍과 천톤급 배 2척을 바꿨다.
처음엔 임대로 상의했는데 집정관이 마지막에 구매를 원했다. 주술사의 예언에 갑자기 생각을 바꿨다.
사흘 동안에 2천톤급 배 하나와 천톤급 배 2개를 비워버리고 블라우크로 향했다.
"바칸, 왜 영지 물건을 직접 판매하지 않고 굳이 상단을 통하려는 거지? 나야 좋지만, 이해되지 않아서 그래."
다미앙이 바칸에게 질문했다. 바칸은 드워프 장신구도 명목상으로나마 다미앙을 통해 팔았고 가죽 제품도 여러 상단을 통해 팔려고 한다. 직접 상단을 운영하여 거래하면 더 많은 이문을 남길 수 있는데 그러하지 않았다.
"재물은 여러 손을 거치는 게 좋다. 그래야 위험 부담이 작아지고 실패 확률도 줄어들지. 난 안정적인 시스템을 원한다."
"시스템?"
"재료가 내 손에 들어와서 제품이 된 다음 팔려서 나가는 모든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가죽으로 예를 들면, 목장에서 쥐를 키워 도축해서 가죽을 벗겨내고, 그 가죽을 무두질해서 영주성에 가져오고, 그걸 가죽 재봉사들이 재단하고, 재단한 가죽으로 모자를 만들고, 그 모자를 상단이 사가고, 상단이 돈을 받아 모자를 파는 일련의 과정을 말하는 거지."
"쥐 키우는 건 세인에게 맡기고, 도축은 헤릭에게 맡기고, 무두질은 미클이 하고, 가죽 가공하고 모자 만드는 건 뮤릭이 하고, 그걸 바칸 네가 나한테 팔고, 난 그걸 가져다가 더 비싸게 팔아서 돈 벌고."
"그래. 이 모든 과정은 돈으로 가치를 매겨. 세인은 쥐고기와 가죽으로 돈 벌고, 헤인은 도축하는 노동으로 돈 벌고, 미클은 무두질에 필수인 약물을 팔아서 돈 벌고, 가죽 가공하고 모자 만드는 자들은 나한테 월급 받고, 난 거기에 든 돈 모두 계산해서 너한테 팔고, 넌 운송비나 일꾼 고용비 그리고 세금까지 고려해서 가격 매겨 다른 곳 시장에 가져다 팔고. 이 일련의 과정에서 영주에 대한 충성심이나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 같은 건 없어. 모든 게 돈이지. 돈으로 이어지고 돈으로 매겨지며 돈으로 끝난다."
"하는 일의 가치만큼 돈을 받는지는 모르지만, 네가 말한 이 시스템에선 일을 잘하고 많이 하면 더 벌겠구나."
"그래. 누구든 가치보다 큰 가격을 매기면 이 시스템은 정지하겠지. 그러면 시스템의 각 연결 고리가 모여서 협상하는 거야. 타협하지 않고 시스템에 해가 된다면 배제되고 대체되겠지. 그런 과정을 통해 시스템은 건강해지고 완전해지는 거야. 시간이 흘러 시스템의 연결 고리는 바뀌고 구조가 변할 수 있어도 시스템 자체는 영원하지."
"바칸, 넌 늘 내 상상을 뛰어넘어."
"별 거 아니야. 작은 걸 일일이 신경 쓰다 보면 기껏해야 대영주에 머물러. 건전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거야. 제국은 왕국보다 나은 시스템으로 왕국들을 그러안았잖아."
"네가 말한 시스템이란 것에 흥미가 생겼어. 좀 더 얘기해줄 수 없어?"
"이후 난 너한테서 운송비를 받을 거야. 내가 아니라 톰슨의 운송 조합이 하는 거지만. 운송 조합의 운송비가 불합리하다고 여기면 넌 배를 임대하거나 구매해서 직접 운송할 수도 있지. 그리고 시스템이 건전해지면 난 세금을 강화할 거야. 많이 버는 사람한테서 더 받고 적게 버는 사람은 덜 받고. 그 세금으로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을 할 거야. 그걸 통해 더 많은 세금을 걷고, 더 많은 세금으로 더 많은 일을 하고."
"네 시스템이 훌륭하다면 누구나 그 안에 속하고 싶겠구나."
"그래. 부르크 교단이 강한 무력을 갖추고도 제국 황실에 눌려있던 이유가 시스템이 완전하지 못해서 그래. 인간은 돈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신이 끼어들었지. 지금은 제국의 시스템이 세상의 흐름에 맞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 거고. 한때 훌륭했던 시스템이어서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이 변화를 거부해. 결국 침체하다가 전쟁이라는 더욱 격렬한 변화를 불러오는 거야."
"제국이나 왕국에서 네 시스템을 따라 하면 어떻게 되지?"
"그땐 무력으로 판가름 나겠지. 비슷한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두 무리는 합쳐질 수밖에 없어. 시스템은 규모가 클수록 안정적이거든. 그리고 각자 사정이 다르니 다른 곳의 시스템을 똑같이 베끼는 건 무리야. 제국이 정기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것도 그 이유야. 큰 땅과 수많은 사람에게 비슷한 시스템을 적용하니까 결국 반발이 생기는 거야."
"바칸, 넌 황제가 되려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기존 시스템이 붕괴하는 시기여서 기회긴 하지만, 왕좌는 걸어서 닿을 수 있어도 황제 자리는 하늘이 허락해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 최대한 되는 데까지 해보겠지만, 무리할 생각은 없어. 시스템이 부담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해볼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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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가 끝나고 몬스터와 싸우기 전이야. 교역하기 가장 좋은 시기라는 뜻이지."
다미앙은 바칸의 말을 받아 종이에 적었다.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부터 다미앙은 바칸의 말을 하나라도 귀담아들으려 애썼다.
블라우크 부두에는 수많은 해적이 몰려있었다. 바칸은 2천톤급 배 하나와 천톤급 배 하나를 부두에 댔다.
"식량, 무기, 외상약만 가지고 왔다. 장갑과 모자는 10월에 갖고 올 계획이다."
강철 대나무 방패와 질긴 넝쿨로 만든 갑옷을 가져왔다. 무기는 드워프 장신구 대금으로 받은 중고 무기들이었다. 영지 대장장이들이 적당히 손봤기에 중고여도 쓸 만했다.
"담력이 대단하군. 우리가 두렵지 않은가?"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집정관이 바칸에게 말했다.
'두려울 게 뭐 있어. 너흰 이미 바칸의 시스템 안으로 들어왔어.'
다미앙은 속으로 바칸 대신 대답했다.
"귀한 물건은 이쪽에서 따로 받는다."
"여기 교역은 내가 모두 맡아서 하기로 했다. 분배도 우리끼리 알아서 할 것이다."
불라우크는 마르다카보다 편했다. 집정관이 유능한 자들 몇 명 데리고 바칸과 가격을 흥정했다.
"메이스 50개에 카쿠 10포대 내려."
고래 가죽과 바다표범 가죽을 받고 무기와 음식을 내줬다. 배에서 내린 물건은 해적들이 몰려와서 바로바로 뒤로 옮겼다.
"크기는 좋은데 색감이 일정하지 않아. 혹시 사람 손이 닿은 진주인가?"
집정관이 모자를 벗고 머리를 박박 긁었다. 꽤 심한 대머리였다.
"어떻게 알았지?"
"진주 양식은 동대륙에서 이미 2백 년 전에 시작했지. 그런데 서대륙은 동대륙처럼 부가 넘치지 않아 품질 낮은 진주에 대한 수요가 적어. 그러니까 양식은 그만두고 천연 진주나 열심히 캐."
"이거 어떻게 좀 안 될까?"
바칸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갖고 온 물건은 다 처분할 생각이니까 일단 옆에 쌓아 둬."
첫 거래가 끝나자 집정관 주변에 있던 자들이 물러나고 새로운 자들로 교체되었다. 마을 혹은 세력별로 순서를 정해 거래하는 듯했다.
두 번째 거래 상대는 무조건 음식만 요구했다. 바칸은 물건을 받고 카쿠를 내줬다.
집정관과 바칸의 적절한 타협 덕분에 거래는 빠르게 진행됐다. 그러나 바칸이 예상보다 빨리 왔기에 해적들이 준비한 물건이 먼저 동났다.
"집정관, 숨긴 물건 좀 꺼내 봐. 남은 물건뿐 아니라 배 2척도 팔 생각이야."
"배를 판다고? 왜? 10월에 또 온다며?"
"저것보다 더 크고 빠른 배가 있어. 그리고 너희가 배로 사람과 물건 실어 오면 나도 좋잖아."
증기기관 덕분에 공간이 훨씬 커진 5천톤급은 천톤급 5척보다 2배 되는 물건을 실을 수 있다. 선원도 덜 필요하니 천톤급 다섯 척을 처분해도 아무 문제 없다.
게다가 현재 마르카다와 블라우크 합쳐도 5천톤급 하나에 실은 물건을 감당하기 힘들다. 다음번에 부피에 비교해 가치가 높은 가죽 장갑과 모자 그리고 무기도 포함할 생각이기에 오히려 물건이 남을까 봐 걱정이었다.
"잠시 기다려라."
집정관은 한참 지나서 잘 접은 깃발 하나 꺼내왔다.
"제국 마나 수련법이다. 여기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기사처럼 강해지진 않았다."
바칸은 깃발을 펼쳐 적힌 글자를 읽었다. 호흡 부분은 없고 마나와 육체를 결합하는 내용부터 있었다.
"거래 인정. 저 두 배는 너희 거다."
- 작가의말
시스템 등장하면 기본 선작 1만 찍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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