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눈물
갭릴은 영주를 따라 영지를 떠났다. 배가 가는 내내 자이르는 허풍쟁이 선장과 죽이 맞아 붙어 다녔다. 싫어서 피해 다니는 가드와 갭릴과 달리 자이르는 선장의 허풍을 재밌게 들어줬다.
"갭릴. 여기가 바하야. 비나크 지역의 교통 요충지."
영주가 상냥한 말투로 갭릴에게 바하를 설명했다. 강 둘이 만나는 곳이어서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고, 가진 물건을 조금이라도 비싸게 팔고 싶은 사람은 바하로 올 수밖에 없다는 말도 해줬다.
"몇 년 안에 우리 영지가 바하를 대체할 거야. 여긴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 되겠지."
영주는 상인 몇을 불러서 율족 상단의 행적을 묻고 바로 바하를 떠났다.
율족 상단을 찾아낸 건 아틀란티스를 떠나고 여드레 뒤였다. 비나크 남쪽에 있는 보나르 지역의 한 마을 시장에서 율족 상단을 발견했다.
"보나르 지역은 제국 혈통의 세 귀족이 통치한다."
영주가 보나르 지역을 갭릴에게 설명했다.
비나크 지역은 베르크 영지를 제외하면 강성한 귀족 영주가 없다. 가장 늦게 겔트 왕국이 점령한 영토이며 영주 대부분이 평민이다.
비나크보다 백 년 정도 일찍 겔트 왕국의 땅이 된 보나르 지역엔 제국 혈통을 이어가는 강한 귀족 영주가 세 명이나 있다. 서 겔트와 지속하여 마찰을 빚고 전쟁도 몇 번 벌인 적 있다.
"비나크라면 베르크 영주를 왕으로 하고 독립할 수도 있는데 보나르는 왕이 되고 싶은 사람이 셋이어서 문제다."
겔트 왕국의 귀족 혈통은 9번까지 제국 혈통이다. 10번부터는 전부 겔트 원주민 귀족이다.
바칸은 7번 혈통이고 보나르의 세 귀족은 각각 3, 4, 6번 혈통이다. 1번과 2번은 겔트 왕국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왕실 혈통이었고 지금은 사라졌다. 5, 8, 9번은 힘을 잃고 몰락했다.
3번 혈통은 자신이 왕이 될 차례라고 명분을 내세웠고 4번과 6번은 무시했다. 왕실과 서 겔트 귀족을 상대할 때는 한마음이지만, 왕은 서로 되고 싶어 했다.
"명분이 없는 힘은 쉽게 무너지고 힘이 없는 명분은 초라하다. 둘을 겸비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가르침을 내린 영주는 시장의 작은 꼬마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갭릴도 짧은 다리를 빠르게 놀려 영주 뒤를 바싹 따랐다.
"오랜만이야."
코밑에 솜털이 나기 시작한 율족 꼬마가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웃었다.
"반갑다. 가고 싶었는데 어른들이 못 가게 했다. 구슬 사러 온 거지?"
3실버로 팔던 구슬을 1골드씩이나 받은 덕분에 누나 셋 모두 시집 보냈다. 가문에서 지위도 부쩍 상승했다. 다다음 대감 자리를 노려도 될 정도다.
그 모든 걸 이루게 해준 바칸을 뜻밖으로 보게 되자 꼬마는 소리 지르며 춤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 그간 모아둔 거 있으면 다 보여줘."
꼬마가 고개를 돌려 뭐라고 고함 질렀다. 조금 지나서 세 명의 청년이 나무 상자를 하나씩 안고 낑낑거리며 다가왔다.
커다란 나무 상자 세 개에 구슬이 가득했다.
바칸은 무려 23개나 되는 구슬을 골랐다. 정령석은 12개였고 남은 11개는 색감과 순도가 비슷하여 장신구로 만들면 괜찮을 것 같았다. 미클한테 주면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이다.
"내 영지로 오면 2골드."
바칸은 금화 23개를 건넸다. 세 청년이 금화를 받아 일일이 깨물며 진위를 확인했다. 금화를 씹는 청년들 얼굴이 환한 웃음으로 가득 찼다.
"명년에는 꼭 간다. 어른들 설득하겠다."
거래를 마친 바칸은 톰슨에게 기름 주머니를 꺼내라고 했다. 율족 선원들이 투석기에 뿌리려던 기름이었다.
"이거 뭔지 알아?"
"변절자들의 주머니. 어디서 났지?"
아이가 주머니의 문양을 보더니 화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하는 모습을 보니 뭔가 사정이 있는 듯했다.
"변절자?"
"원래는 배 만드는 가문이다. 해적과 결탁해서 같은 율족의 배를 터는 나쁜 놈이다. 들켜서 섬에서 쫓겨났다."
장사 밑천 마련하려고 카르챠 영지에 배를 빌려줬는데 10척 제외하고 전부 빼앗겨서 영영 재기하기 힘들 것이다.
"날 공격하는 걸 혼내줬지. 놈들이 이걸 버리고 도망쳤어. 뭔지 알아?"
바칸은 기름의 출처가 절실했다. 그래서 정령석이 아닌 구슬까지 비싸게 1골드나 주고 샀다.
"태양의 눈물. 해적섬 북쪽에 나는 돌을 짜서 나온 돌기름이다."
"돌기름? 돌을 짜서 기름이 나온다고?"
바칸의 지식에는 전혀 없는 물건이었다.
"요만한 돌을 짜면 눈물이 이만큼 나온다. 돌 세 개면 온 겨울 춥지 않다."
아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주먹만큼 큰 돌을 짜면 기름이 욕조 하나 채울 만큼 나온다.
"혹시 가진 거 있어?"
"없다. 변절자 빼고 해적섬에 가는 율족 없다."
"고마워. 이건 선물이야. 영지에 찾아오면 이런 물건 많아."
바칸은 쥐가죽으로 만든 모자와 신발과 장갑 그리고 미클이 만든 목걸이 하나 건넸다. 잡질이 많이 섞인 하급 보석이어서 물방울이 맺히진 않았지만, 세공 솜씨만큼은 드워프로 오해할 정도로 정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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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족의 배를 뜯어서 좋은 재료를 많이 얻은 덕분에 예상보다 이른 3월 초에 천톤과 2천톤급의 배 건조가 끝났다.
5천톤급은 강철 대나무를 많이 사용할 예정이다. 강철 대나무를 목재로 다루는 건 나무 부족 드워프만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비나크의 대부분 영지가 몬스터 토벌과 4월에 파종할 종자 고르느라 바쁠 시기에, 아틀란티스 영지는 다른 일로 바쁘게 보냈다.
영지민들은 겨우내 모아둔 분뇨를 개간한 땅에 골고루 뿌렸다. 고작 3번 심었는데 카쿠가 땅의 기운을 거의 빨아먹었다.
사실 카쿠는 그렇게까지 탐욕스러운 열매가 아니다. 아니면 남대륙은 이미 카쿠 때문에 황폐한 땅이 돼야 했다.
황폐해진 이유는 남쪽 숲 땅이 한 종류의 나무만 자랄 정도로 특이한 토질인 탓이다. 여러 종류의 나무가 섞이고 과일나무도 종종 보이는 동쪽 숲과 달리 남쪽 숲은 잎이 침처럼 뾰족한 이름 모를 나무만 자랐다.
"노어, 남대륙에서 카쿠 많이 나는 곳에 함께 자라는 나무나 풀 같은 거 없어?"
허풍쟁이 선장이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있다. 크고 맛있는 카쿠를 찾으려면 먼저 콩 나무부터 찾으라고 했다."
콩 나무는 콩이 달리는 나무가 아니었다.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넝쿨에 콩이 달린다. 그 넝쿨이 콩 나무로 불리는 나무에만 살기에 이름이 콩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넝쿨에 달리는 콩은 너무 맛없어서 식용 가치가 전혀 없다고 한다.
"그럼 올해는 가서 콩 가져와. 나무도 작은놈들로 뽑아서 오고. 사람 50명 줄 테니 배에 꽉 채워서 와."
천톤급 배 한 척을 남대륙으로 보낼 작정이었다. 구름꽃 씨앗을 최대한 얻으려는 목적이었는데 2천톤급으로 보내는 거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러려면 4월 말까지 돌아와야 하는데."
허풍쟁이 선장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3일 뒤에 허풍쟁이 선장은 바칸과 함께 차가운 바다로 출항할 예정이다. 첫 목적지는 해적섬 북부다.
"당연히 돌아와야지. 5월부터 허리 펼 새 없이 바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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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톤급의 배에는 앞뒤로 소형 투석기 하나씩 달고 양쪽에는 쇠뇌 세 개씩 달았다. 투석기는 출렁이는 바다에서 명중률이 형편없을 게 뻔하기에 겁주는 용도만 기대했다.
상대 배를 명중하면 신의 보살핌 덕분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반면 쇠뇌는 실질적인 쓸모가 많다. 직선에 가까운 궤적을 그리기에 투석기보다 발사 타이밍 잡기 훨씬 쉽다. 갈고리 달린 화살로 큰 물고기 잡아도 되고 해적 만나면 불화살을 쏴서 접근하기도 전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
"해적섬이라고 해서 해적이 우글거릴 줄 알았는데."
설계도대로 정확히 만든 배는 해류와 바람을 타고 빠르게 움직였다. 순풍이 아닐 때는 돛을 내리고 해류가 맞지 않을 때는 노를 저었다.
덕분에 열흘 만에 해적섬에 도착했다. 그리고 열흘 동안 해적과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해적들이 몬스터와 싸우는 시기야. 농사지을 땅이 적어서 봄에 숫자 안 줄여놓으면 두고두고 고생이거든. 먹을 게 넉넉하면 저들도 해적질을 안 했을 거야. 목숨 걸고 싸우는 일이 쉬운 게 아니잖아."
먹을 게 부족한 해적섬에선 봄과 가을마다 싸움을 벌여서 입을 줄였다. 그게 적이든 아군이든.
"그리고 8월까지는 물고기를 잡아. 고기가 잘 잡힐 뿐 아니라 대부분 곡식은 8월 이후에 수확하니까. 가을에 몬스터와 한바탕 싸운 다음 배를 타고 식량 약탈하러 가지."
바칸이 자신이 아는 해적에 관한 지식을 설명했다.
"약탈하러 떠나는 해적은 사실 가장 강한 전사들이 아니야. 이들은 약탈에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그만이야. 약탈하러 떠난 사이 섬의 식량을 축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이미 목적을 달성한 셈이거든."
"그럼 왜 살기 좋은 곳으로 이주하지 않지?"
톰슨은 어려운 방식으로 사는 해적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비나크 사람은 살기 좋다고 소문 난 제국으로 가지 않을까?"
바칸의 반문에 톰슨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마 살 만하니까 그런 거야. 아예 못 살 정도가 되면 익숙한 환경을 버리고 살길을 도모하겠지. 우리가 보기엔 저들이 어렵게 사는 것 같지만, 정작엔 저들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아. 겔트든 제국이든."
배는 해적섬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북쪽으로 갔다. 마침 해류를 타서 존과 병사들도 푹 쉴 수 있었다. 가끔 해류가 갈라질 때만 노를 저어 경로를 수정하면 되었다.
북으로 갈수록 바다에 뜬 작은 얼음덩이들이 보였다. 해적섬도 점점 흰색이 많아졌다. 숲을 이룬 나무도 점점 굵어지고 높아졌다. 강철 대나무도 여기에 끼면 꼬마 취급을 받는다.
"얼음섬이다. 거인족의 후손이 사는 얼음섬."
허풍쟁이 선장이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얼음섬을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 평평하게 깎으면 작은 마을 하나 만들어도 될 정도 크기였다.
"헛소리 말고 배 경로나 틀어. 얼음섬에 부딪혀서 침몰하고 싶어?"
그제야 정신 차린 선장이 키를 잡고 방향을 틀었다. 바람도 잔잔해서 해류를 벗어난 배는 제자리에 멈췄다.
"얼음섬이 지나가면 다시 해류를 탄다. 그런데 어떻게 얼음섬이 남쪽에서 올라왔지?"
"순환 해류다. 보통 남북 방향의 긴 타원으로 형성된다. 북쪽에 있던 얼음섬이 해류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다시 방향을 바꿔 돌아가는 것이다."
허풍쟁이 선장이 지식을 뽐냈다.
"작은 배 내려. 얼음 좀 깎아오자."
술을 넉넉하게 실어 마실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음식 만들거나 씻을 물은 부족했다. 출항하고 비 한 번 온 적이 없어서 전혀 보충하지 못했다.
작은 보트를 내린 후 존과 바칸이 선원 둘과 함께 탔다. 선원들이 조심스럽게 배를 얼음섬에 댄 다음 바칸과 존이 얼음을 부쉈다.
갖고 간 통 세 개에 얼음을 가득 채운 다음에도 계속 부쉈다. 얼음이 가벼운 편이기에 보트의 남은 공간에 더 실어도 된다.
"호룰루, 호룰루야."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얼음섬 꼭대기에서 갑자기 외침이 들려왔다.
"너 뭐야? 거인족 후손이야?"
존이 상체만 드러낸 갈색 머리를 향해 외쳤다.
"호룰루, 호룰루야. 바르카사 호룰루야."
갈색 머리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할 말로 외쳤다.
"기다려. 내가 확인해 볼게."
바칸은 비수 두 개를 꺼내 얼음에 박으며 갈색 머리가 있는 곳으로 기어갔다.
- 작가의말
풍성하고 즐거운 한가위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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