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준비
마르카다와 블라우크는 물론 브릭섬에서도 올리비아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크고 단단한 전함은 물론 풍족한 먹을 것과 여타 교역품으로 이미 아틀란티스의 우수함은 증명되었다.
무력을 따지자면, 브릭섬에서 바칸이 맨손으로 거대한 곰과 사자를 죽이는 걸 본 사람이 수백 명 되었고 마르카다에선 바르바리얀 부족이 아틀란티스에 소속한 걸 알고 있다.
블라우크는 해군 제독 드레이크의 이름 하나로 제압할 수 있다.
이러한 실질적인 힘 위에 제국이라는 명분까지 덧칠되었다. 아틀란티스가 왕국으로 승격했고 왕비가 제국 황녀라는 말에 블라우크와 마르카다의 사람들은 흥분을 금치 못했고 브릭섬의 영주들도 자신들의 지배 지위가 탄탄해질 것에 크게 기뻐했다.
바칸은 마르카다와 블라우크에 각각 2천톤급 배 3척씩 하사했고 무기와 갑옷 등도 넉넉히 챙겨줬다.
두 달의 여행을 끝내고 아틀란티스로 돌아온 바칸은 내정을 올리비아와 투치 그리고 갭릴에게 맡기고 전쟁 준비에만 몰두했다.
"전투 식량 개발은 어떻게 됐지?"
"다 끝났다. 흔들 바퀴를 단 수레 개발도 끝나서 전투 식량 휴대 문제도 해결되었다."
흔들 바퀴는 울퉁불퉁한 길도 잘 다닐 수 있게 고안한 아틀란티스의 발명품이다. 드워프가 아닌 인간이 설계했다.
흔들 수레도 바퀴와 축만 드워프가 맡았고 남은 부분은 전부 아틀란티스의 목수들이 제작했다.
"수리 문제도 해결된 거지?"
일반 수레보단 낫다고 하지만, 그래도 고장은 피할 수 없다. 바칸은 부품을 규격화하고 수리 매뉴얼을 만드는 것으로 굳이 목수가 아니어도 수리할 수 있게 만들라고 주문했다.
"축이 고장 나면 전문가가 필요하다. 균형을 맞추는 일은 감각과 경험이 중요하니까. 축 외의 고장은 부품을 갈아치우면 된다."
"소형 수송선의 제작은?"
"병사 30명 태울 수 있는 배를 백 척 만들었다. 말을 태울 배는 아직이다."
"말 태우는 배는 포기한다. 병사 태우는 배를 백 척 더 제작해라."
"도로 상황은?"
"비나크와 겔트 지역의 모든 마을을 길로 연결했다. 일부 산에 국왕이 말한 대로 구멍을 뚫어서 마을 사이 거리가 크게 단축되었다."
"마을마다 마차 두 대와 말 두 필을 임대하는 건도 마무리되었지?"
"겔트는 이미 끝났다. 비나크는 마을마다 마차를 두는 것보다 큰 상단 몇 개를 운영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판단이다. 베르크와 바하 외에 대형 마을 하나 건설하고 세 마을이 축이 되어 남은 마을의 재화를 모으는 게 나을 것 같다."
인구도 많고 곡식 생산량이 높아 운송할 물건도 많은 겔트와 달리 비나크는 백 명 정도 사는 작은 마을이 꽤 있고 딱히 수레로 운송해야 할 물건도 많지 않다.
"게르메르는?"
"항구 하나 지었고 동서와 남북을 관통하는 길을 닦는 중이다."
비나크는 가죽, 보나르는 목축업, 헤크는 식량, 겔트도 식량. 네 지역은 확실한 색이 있지만, 게르메르와 미아르는 애매하다. 그나마 미아르는 바하에서 출발한 강줄기와 비나크를 지나는 강줄기가 향했지만, 게르메르는 그런 것도 없다.
그러나 이후 전쟁의 전초 기지가 되어줘야 할 곳이어서 동서와 남북을 관통하는 주간도로를 건설하기로 했다.
"미그릭 백작."
"네, 국왕 전하."
"겔트 지역을 맡기려 한다. 잘 해낼 수 있지?"
제국에서 온 관리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미그릭이 바칸과 먼 친척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베르크를 네비치에게 맡기고 비나크를 뮬리치에게 맡긴 데 이어 겔트를 미그릭에게 맡긴 거로 바칸이 혈족을 중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생겼다.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이 뭡니까?"
"식량 관리 그리고 미아르와 게르메르 지원."
"차질없이 해내겠습니다."
"존. 바르바리얀 부족의 갑옷과 무기 모두 완성되었지?"
"금속 갑옷 한 벌에 가죽 갑옷 두 벌씩 나눠 받았다. 무기는 여유분 30자루 있다."
"드레이크. 해적섬의 타격대는?"
"타격대의 가족은 아틀란티스에서 살게 해준다는 말에 지원자가 넘친다. 엄정한 기준으로 2천 명 정도 선출했다."
북부 해적은 어려서부터 몬스터 및 사람과 싸우면서 자란다. 약한 놈은 성인인 열넷이 되기 전에 죽어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바칸이 타격대에 대한 요구가 꽤 높기에 6천 명이 넘은 지원자 중 2/3 탈락했다.
"본드. 기병대는?"
"브릭섬 출신 기병 2백 명에 마르카다에서 온 기병 1천6백 명이다. 돌격으로 상대 진영을 깨는 건 브릭섬 출신이 잘하지만, 오래 싸우는 건 마르카다 출신들이 훨씬 낫다. 브릭섬 기병은 반 시간 싸우면 지친다."
"말이 문제겠지?"
"그렇다. 여기 말은 너무 다루기 어렵다. 말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쉽게 지친다."
"필드. 보병은 상황이 어때?"
"전투 노예를 꾸준히 사들였고 어린 용병 중에서도 괜찮은 자들을 뽑았다. 마나를 익힌 자들이 대장직을 맡았다. 문제라면 지휘관이 부족하다."
"제국군인 출신과 겔트 왕국 하급 지휘관들을 설득하는 중이다. 간단히 교육하면 실전에 투입할 수 있으니 지휘관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전투는 9월 초에 시작한다."
"너무 급박한 거 아닌가?"
"12월까지 플란코와 지르를 해결하고 카르챠 왕국과 국경선을 댄다. 그리고 1월부터 부르크 제국과 싸운다."
바칸의 발표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카르챠 뒤엔 고딕 황제가 있다. 부르크까지 상대하기엔 우리 힘이 부족하다."
"부르크 신을 악마로 규정한다. 그러면 부르크는 바다로 빙 둘러오거나 고딕 황제의 땅으로 오는 두 가지 길밖에 없다. 바다는 해군이 막아내면 되고 고딕 황제 땅으로 오는 건 지르에서 막아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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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 되었다. 아틀란티스 영지민들은 여전히 카쿠를 수확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너희는 약탈자가 아니다."
바칸은 출정을 앞둔 해적섬 출신들을 모아놓고 연설했다. 심장을 비롯한 중요 부위에 금속을 덧댄 갑옷을 입었고 휜 칼 외에도 각자 입맛에 맞게 무기 하나씩 더 챙겼다.
대부분은 단궁으로 불리는 짧은 활을 선택했고 일부는 메이스 혹은 도끼와 같은 타격 무기를 골랐다.
"자랑스러운 아틀란티스 왕국의 정규군이다. 이에 긍지를 갖고 허튼짓을 벌이지 않기 바란다. 플란코 왕실은 이미 아틀란티스 왕국에 투항했다. 너희가 할 일은 왕의 결정에 불복하는 지방 영주를 처단하는 것이다. 이들 역시 아틀란티스 왕국의 일원이 될 사람들이니 최대한 영주만 처단하는 효율적인 전투를 보여주기 바란다."
"합!"
어려서부터 전투로 단련된 전사들은 배우지 않고도 전투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 전투 목적에 충실하고 지휘관의 지시에 잘 따르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걸 깨달은 해적섬 출신들은 짧은 기간에 훌륭한 병사가 되었다.
"약탈은 영주성에 한정한다. 영지민이나 교단을 약탈하는 자는 군법에 따라 엄격히 처리할 것이고 가족은 아틀란티스 왕국에서 추방될 것이다."
어려운 환경일수록 가족애가 남다르다. 바칸의 엄포에 대부분이 해적섬 출신인 타격대 전사들이 정신을 바짝 차렸다.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플란코 지역의 모든 영지에 아틀란티스의 깃발을 꽂는다. 이상."
"합!"
2천3백 명 정도 되는 타격대가 배로 출발했다. 저들은 플란코의 수도에 상륙한 다음 몇 갈래로 나뉘어 아틀란티스와의 통합을 반대하는 영지들을 타격할 것이다.
이번 전투의 책임자는 드레이크로 했다. 해적들이 드레이크 말에 고분고분 잘 따르는 것도 있고, 그간 전술 공부를 열심히 하여 지휘할 능력도 넉넉하다.
타격대가 출발한 후 지휘관들만 남았다. 바칸 역시 바로 움직여야 하기에 지휘관들에게 해야 할 일을 한 번 더 당부했다.
"기병대는 게르메르로 간다."
기병대는 태반이 롱가바르 부족이다. 아틀란티스 영지에 흰머리수리가 산다는 말에 자원한 자들이다. 이들은 충성심도 확실하고 지시에도 잘 따랐다.
"게르메르에서 한 달 정도 훈련한 다음 11월에 페코를 통해 지르 왕국으로 간다."
지르는 플란코와 반대 상황이다. 바칸은 왕실 대신 영주들을 설득했다. 페코 공국과 마찬가지로 가죽 재봉 기술을 전수하는 것을 미끼로 회유했다.
이후 아틀란티스 영지에선 고급품만 취급하고 교역을 목적으로 하는 양산품은 페코와 지르에 하청하기로 약조했다.
"투항을 받아내면 가장 좋고, 그게 아니면 철저히 죽여라."
"걱정하지 마."
본드가 가슴을 치며 장담했다. 드워프 갑옷에 드워프 무기에 이어 가륵말까지 한 필 얻은 본드는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도 한참 남았다.
"보병은 행군한다."
당장 싸워야 할 타격대와 기병대의 운송으로 배가 부족하다. 그래서 보병은 훈련 삼아 행군으로 가기로 했다.
"동쪽 숲을 뚫고 바하까지 가서 하루 쉰다. 다음 비나크까지 행군하고 하루 쉰다. 그다음엔 겔트까지 가서 주둔하고 훈련한다. 때가 되면 게르메르로 이동한다."
보병을 이끄는 건 명목상으론 존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지휘는 참모진이 하기로 했다. 제국 출신 지휘관 한 명에 겔트 왕국 출신 지휘관 세 명이 참모진을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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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칸은 흰머리수리 발에 매달려 이동했다. 덕분에 고작 이틀 만에 플란코 왕국의 어느 작은 영지에 도착했다.
"고신을 모시는 신실한 종입니다. 국왕께서 무슨 일이지요?"
게르크 교단의 제단을 전부 부순 일 때문에 바칸의 악명은 교단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눈동자까지 까만 사람은 서대륙뿐이 아니라 동대륙에도 드물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바칸의 정체를 유추했다.
소용돌이와 태풍의 신을 모시는 고신 교단의 대주교는 바칸의 방문이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플란코 왕실이 얼마 전에 아틀란티스 왕국에 귀속한다고 발표했기에 찡그린 얼굴을 보여줄 수도 없었다.
"긴말 않겠다. 아틀란티스 왕국에 제단을 세우고 포교해라."
바칸의 말에 대주교는 너무 놀라 딸꾹질을 연신 했다.
"공짜는 아니다. 고신 교단에 고대 제국의 선박 설계도가 있다고 들었다."
대주교는 내심 갈등했다. 고신 교단은 플란코 왕국에 몇 개만 있다. 이름만 대주교지 주교가 채 열 명도 안 된다.
그러나 거절하자니 교세를 크게 키울 이 기회를 헛되이 흘리는 것이 너무 아까웠다.
"굳이 고신 교단이 아니어도 괜찮다. 게르크의 빈자리를 채울 종교가 필요할 뿐이니까. 선박 설계도가 고신 교단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멸망한 고대 제국의 유산을 가장 많이 수습한 건 교단들이다. 부르크를 비롯해 많은 유산을 수습한 교단은 번성했다.
겨우 몇 개 교구만 있는 것으로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고신 교단은 해석조차 어려운 선박 설계도를 제외하면 내세울 게 전혀 없다.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보나르와 헤크 지역에도 교단을 설립하고 제단을 짓도록 말해둘 테니 열심히 포교해라."
바칸은 대주교한테서 선박 설계도를 받아낸 다음 흰머리수리를 타고 떠났다. 아직 다 자라진 않았지만, 공작새의 심장을 섭취해서 마나를 가득 품은 강부리는 힘이 웬만한 성체보다 훨씬 셌다.
바칸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대주교는 몸을 돌렸다. 지은 지 오십 년은 더 된 것 같은 나무 건물을 바라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제단이 적어 치료 효과가 부족한 탓에 못 구하고 죽어갔던 사람들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드디어 우리도 대형 교단이 된다. 더는 신성력이 부족해 사람을 못 구하는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겠구나.'
- 작가의말
바칸은 아틀란티스에서 깝죽대며 부르크를 원정 오게 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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