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와 거래
대부분 마을은 이름이 없다. 대단한 영주가 있거나 대단한 일이 벌어진 마을만 겨우 이름을 얻는다. 마을 구분은 특징을 딴 수식어로 한다.
바칸 일행이 살던 마을은 '떠버리 잡화점 주인이 있는 작은 마을'로 불렸다.
"여기가 바하?"
그런 의미에서 바칸과 존이 찾은 바하 마을은 평범하지 않았다. 겔트 왕국 동부에서 가장 큰 시장이 열리고 영지민보다 자유민이 더 많은 마을로 유명했다.
커다란 강 두 개가 근처에서 합류하기에 바다로 오는 상인이 있을 정도였다.
마침 해적들도 쉬는 계절이어서 바하에는 사람이 북적였다. 해적들도 물고기 잘 잡히는 여름이면 노략질보단 안전한 그물질을 좋아한다.
"길드장한테 안내해."
바칸이 던진 동전에 얼굴을 맞은 부랑자가 발끈하며 일어섰다. 그러나 존의 커다란 덩치에 주눅이 들어 화를 내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어?"
부랑자로 위장했던 길드원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며 바칸에게 질문했다.
"손톱 좀 길러. 뭔 부랑자가 손톱을 다듬어? 얼굴과 손발에 흙 좀 묻히면 부랑자로 보일 것 같았어?"
"아니, 그거 말고. 나도 내 변장이 허술한 건 알아. 길드원인 걸 어떻게 알았냐고."
상인 조합, 용병 조합, 선원 조합이 함께 만든 길드가 있다. 바하에서 이 세 무리의 이익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끈끈하게 연결되었다. 다른 직종들도 어설프게 따라 하고 있지만, 바하에서 길드라고 하면 세 조합이 연합하여 만든 '바하 길드'를 지칭하는 말이다.
"보통 부랑자는 무리를 지어. 너처럼 혼자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부랑자는 있을 수 없거든. 그럴 힘이 있다면 뭘 해도 부랑자보단 나을 거야."
"그러니까 부랑자들이랑 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말이지?"
"그럼 다른 부랑자들이 네 눈치 볼 거 아냐. 같은 편으로 여겨 의지하면서 눈치 보는 거랑 두려워서 눈치 보는 건 느낌이 달라."
"길드는 처음이지?"
"그래."
바하는 영지민 2천 명에 자유민 3천 명에다가 노예는 1만 이상 사는 큰 마을이다. 그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정도로 큰 농지를 품었기에 면적이 정말 넓었다.
주변에 산 말고 넓은 평야가 있었다면 마을이 아닌 큰 도시가 되었을 좋은 위치다.
바칸과 존은 길드원을 따라 농지를 가로질렀다. 바칸은 농지 구성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하는 교역 마을이어서인지 돈이 되는 비싼 곡물만 심었다. 한 가지 곡물을 계속 심으면 몇 년 안 되어 땅 기운이 쇠한다. 적당히 휴경도 하고 같은 땅에 여러 곡물을 번갈아 심어야 기운이 오래 간다.
'비료는 운반하는 데 돈이 너무 들어. 좋은 선택이 아니야.'
바하는 식량이 많이 나는 마을이다. 덕분에 많은 자유민이 모일 수 있었다. 그런데 점점 돈에 홀려 밀이나 동대륙 쌀 대신 비싼 작물을 심었다.
'지금이야 식량을 계속 사들여 공급에 문제없지만, 흉년 한 번만 들면 바하는 반드시 망한다.'
농업이 위축하면 상업도 위축하기에 바하를 찾는 사람이 줄어든다. 쌀과 밀을 팔러 오는 상선도 끊긴다. 그렇게 되면 먹을 게 부족하여 마을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 교단이 영주에게 화형이나 교수형을 내려 영지민의 분노를 잠재워야 할지도 모른다.
'바하 영주는 욕심 많고 주제 모르는 놈.'
바칸은 바하 영주에 대한 평가를 머리에 새겼다.
"길드장 만나러 온 자들이야. 판매와 구매를 원한다고 해."
부랑자로 위장한 길드원은 길드 건물의 보초에게 둘을 인계하고 떠났다. 보초의 감시를 받으며 기다리던 바칸과 존은 잠시 후 건물로 안내받았다.
"집사라고 부르면 된다. 살 물건은 뭐고 팔 물건은 뭐야?"
"네가 감당할 사이즈 아니야. 골드 단위로 흥정할 일이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고 길드장 불러."
"검은 머리는 북부 야만인과 남부 해적 그리고 동대륙 후손뿐이지. 곱슬이 아닌 걸 봐선 남부 해적은 아니고, 덩치를 보면 북부 야만인도 아닌 것 같고. 그런데 눈동자가 까만 걸 보면 동대륙은 아닌 거 같아. 동대륙은 눈동자가 너처럼 까맣지 않거든."
"남부 해적이라고 전부 곱슬인 건 아니야. 곱슬이 하도 많아서 아닌 놈들이 일부러 파마하니까 다 곱슬로 보이는 거지. 북부 야만인도 다 덩치 큰 게 아니야. 덩치 작은놈들은 마을이나 지키니까 네가 못 본 거지. 동대륙 사람은 눈동자에 세 가지 색이 있어. 그 셋이 어울려서 까맣게 보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까만색은 아예 없어. 빨간 눈동자나 파란 눈동자처럼 출신과 무관한 거니까 이걸로 뭔가 추측하려고 애쓰지 마."
집사라고 자칭한 자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객청을 떠났다. 상대가 어려 보여서 지식을 뽐내 기선제압하려 했는데 외려 당했다. 계속 나대다간 상대 기세만 키우는 꼴이다. 기세를 탄 상대가 강하게 나오면 거래에 불리하게 작용할지도 모른다. 길드장 자리를 놓고 다투는 다른 집사들에게 빌미를 안 주려면 여기서 물러나야 한다.
잠깐 시간이 지나고 배가 불룩 튀어나온 남자가 객청에 나타났다. 바칸은 자리에서 일어나기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귀한 손님인 줄 모르고 실례했다. 그러나 거래 규모가 직접 나설 정도가 아니라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검은 노예 둘 구매. 일시금이니까 잘 생각하고 가격 불러. 마음에 안 들면 배 타고 공작 영지로 갈 거야."
길드장은 푸짐한 턱살을 부들부들 떨었다. 검은 노예 둘이면 최소 100골드 받을 수 있다. 보유한 검은 노예의 상태가 좋지 않아 끽해야 80골드 정도 받을 수 있지만, 그것만 해도 대단한 수익이다.
검은 노예를 사 여기까지 데려오는 데 쓴 골드는 고작 30이었으니까.
길드장이 놀란 건 큰 거래 때문이 아니라 길드가 검은 노예 둘 보유했다는 사실을 상대가 정확히 알고 찾아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게다가 배 타고 사흘 걸리는 거리에 있는 공작 영지에 검은 노예가 있다는 정보까지 알고 있었다.
"5골드 깎아줄게. 75골드에 가져가. 상태가 좀 별로거든."
"현금 얼마나 있지?"
바칸의 말에 길드장은 다시 긴장했다. 판매와 구매를 동시에 한다던 집사의 말이 생각났다. 팔려는 물건이 75골드 이상 가는 물건임이 분명하다.
검은 노예 둘보다 더 비싼 물건이라니. 길드장은 흥분으로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갔다. 그러나 티를 내지 않으려고 과일주를 담은 잔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요새는 나가기보단 물건 들어오는 시기야. 그래서 돈은 얼마 없어."
"누구나 흥미를 느낄만한 비싼 물건 없어? 가격이 얼마 정도 되는지도 알려주면 좋겠어."
'이번 거래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그러면 길드장 자리를 좀 더 지킬 수 있다.'
바칸이 구하려는 검은 노예는 비싸면서도 처치가 힘들었다. 그걸 사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게다가 검은 노예 둘보다 더 귀한 물건을 팔려고 한다.
이런 큰 거래를 성사하여 시간을 벌면 지금까지 떼먹은 흔적을 지울 수 있다.
"남대륙의 검은 진주 세 개."
"크기는?"
"직접 보는 게 좋겠다."
길드장은 육중한 몸을 움직여 직접 검은 진주 세 개를 가져왔다.
"별로네? 하나는 크고 둘은 작고. 작은 둘이 모양이라도 비슷했으면 좋았을 텐데. 따로 따로는 가격이 전혀 안 나가고 합쳐서 작품 만들어야 하는데 셋의 크기나 모양새가 조화롭지도 않아. 선심 써도 3골드 이상은 못 쳐주겠는데."
수작 부릴 만한 상대가 아님을 인지한 길드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어음도 돼?"
길드장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상대가 오해하고 거래를 취소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돼. 나 여기랑 가까운 곳에 사니까. 수수료는 그쪽 부담이겠지?"
"당연하지. 물건 보자."
어음은 교단에서 발행한다. 문제는 다른 교구에 가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음에 적힌 돈을 받으려면 발행 교구를 찾아야만 한다.
거래 끝내고 떠날 사람이라면 당연히 어음을 거절한다. 어음 되냐고 묻는 건 상대를 떠보는 수작으로 오해받기 쉽다.
바칸은 가방에서 오크 가죽을 꺼내 탁자에 곱게 펼쳤다. 가죽을 만지고 살피던 길드장의 눈이 점점 커졌다.
"문신이 15개?"
"17개야. 이거 제국에서나 소화할 물건이야. 잘 알지?"
바칸은 길드장이 놓친 문신 2개를 직접 짚어줬다.
"가죽 처리한 솜씨도 마스터 등급이군."
"비싼 곳에 맡겼지."
"이거 어음 하나론 힘들겠는데?"
어음의 최대 기한은 1년이다. 길드장의 말은 1년 안에 이 모든 대금을 갚기 힘들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자금력이 부족한 건 아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교역으로 덩치를 유지하는 길드로선 자금 흐름이 하루라도 끊어지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바칸이 언제 찾아올지 몰라 늘 현금 수백 골드씩 두는 것 역시 손해다.
"그래서 얼마 쳐줄 건데?"
"제대로 된 가격을 받으려면 제국까지 가야 해. 그 여로에 겪어야 할 수많은 고난과 장애를 생각건대, 난 4백 골드가 적당하다고 봐. 제국에 가져가면 8백에서 1천 정도 받을 수 있을 거야. 물론, 제대로 된 구매자를 찾는 수고도 있어야겠지."
"어떻게 지급할 건데?"
"보유 현금과 검은 노예로 백 골드 채워줄게. 남은 건 3년 동안 1백 골드씩 갚을게."
"이렇게 하자. 남은 3백 골드는 식량으로 갚아."
"올해 당장은 힘들어."
"제국 가서 가죽 처분하는 데 반년이면 되잖아. 돈 생기면 그걸로 쌀 준비해. 그때까진 기다려주지."
협상은 빠르게 끝났다. 길드장은 어음 떼러 교단으로 가고 처음에 둘을 상대했던 집사가 다시 들어왔다.
"네가 차기 길드장이겠군."
바칸의 말에 집사가 고개를 저었다.
"난 힘들 거야. 나보다 나은 후보가 여럿이니까."
"네가 될 거야. 왜냐면 넌 멍청하거든."
집사는 화난 얼굴로 바칸을 쏘아봤다. 존은 '자기 멍청한 줄 모르는 걸 보니 나보다 훨씬 멍청하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바칸이 존에게 입을 열지 말라고 당부했기에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방금 말이야. 내가 길드장 불러오라고 했을 때 안 부르고 네가 나랑 협상했으면 어땠을까?"
"내가 아무리 협상해도 무슨 소용이야. 길드장이 반대하면 거래 끝인데."
"길드장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거래를 성사시키면 되지. 그럼 네가 다른 후보들보다 주목받을 수 있잖아."
그제야 생각이 거기에 미쳤는지 집사는 접대 목적으로 들고 온 과일주를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길드장이 황급히 마차를 불러 교단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니 어음까지 동원할 정도 규모의 큰 거래가 틀림없었다.
"길드장이 자기 안전을 지키려면 말이야. 자리에서 물러나고도 힘을 갖춰야 해. 그러려면 당연히 다음 길드장이 적당히 멍청하길 바랄 거야. 그래야 자기 영향력이 느리게 사라질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넌 다음 길드장 자리에 아주 많이 가까워졌어."
집사는 자신의 멍청함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헷갈렸다.
"곧 귀한 물건 가지고 제국으로 가는 일이 있을 거야. 만약 길드장이 널 보낸다면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뜻이야. 그렇게 알고 있어."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지?"
"네가 길드장 되면 말이야. 내가 좋은 의뢰 많이 할 거야. 나도 너처럼 멍청한 놈이 길드장 하면 편하거든. 네가 길드장 오래오래 하게 도와줄게."
'원래는 똑똑했는데 대장이랑 대화하더니 멍청이 됐어.'
존은 점점 멍청해지는 집사 얼굴을 보며 자신이 멍청이가 된 건 바칸 탓이 분명하다고 결론 내렸다.
- 작가의말
세븐 브레이크의 여덟 번째 기술.
브레이크 멘탈.사용법 : 혀에 있는 24개 혈도에 내공을 보낸 다음 신나게 나불거리면 된다.초식 1 : 정곡 찌르기.초식 2 : 모함하기.초식 3 : 돌려 까기.절초 : 팩트로 때리기.작가의말에만 등장하는 초식. 본문과 헷갈리지 말기를 요망함.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