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블린 마을
"대장, 여기 안전한 거 맞아?"
미클이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계속 살폈다. 가끔 모닥불에서 나는 탁탁 소리에도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겁이라는 게 뭔지 모를 정도로 멍청한 존이나 급격히 흉포해진 톰슨은 태연한 기색으로 드러누워 배가 꺼지기를 기다렸다.
"내가 말하는 거 잘 기억해."
존과 톰슨이 몸을 일으켰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바칸이 한 말을 기억해둬야 한다. 안 그러면 매우 화낼지도 모른다.
"여긴 모래땅이고 축축해. 발자국이 잘 남는다고. 풀 뜯는 짐승은 흔적이 안 남는 바위나 조약돌이 많은 곳으로 움직여. 이건 약한 존재의 본능 같은 거야. 그래서 위험한 맹수나 몬스터 역시 이곳을 안 찾아. 먹을 게 없거든. 게다가 우린 불도 피웠잖아. 불을 좋아하는 맹수나 몬스터는 없어."
긴장이 천천히 풀렸다. 전혀 감도 못 잡은 둘과 달리 미클은 바칸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똥 누는 곳에 파리 많은 거랑 같은 얘기야. 좀 더 대단한 것 같지만.'
시간이 흘러 배가 꺼졌다. 바칸이 사냥한 짐승은 덩치가 조금 컸다. 숲에선 하루만 지나도 고기가 쉽게 상하기에 남은 고기를 억지로 입에 쑤셔 넣었다.
"전리품 분배한다."
바칸의 말에 셋은 낮에 얻은 전리품을 한곳에 모았다. 피가 잔뜩 묻은 옷과 갑옷 그리고 무기가 전부였다. 돈을 관리하는 자가 따로 있는지 셋 몸에서 돈 한 푼도 나오지 않았다.
가죽 갑옷의 피는 미클이 젖은 모래로 대충 닦았지만, 옷은 빨래할 겨를이 없어 여전히 시뻘겠다.
바칸은 철퇴 두 개를 번갈아 들면서 무게를 가늠했다.
"이건 존이 가져."
좀 더 무거운 철퇴는 존에게 줬다. 힘만 따지면 바칸도 존에게 안 된다. 북쪽 바다에 떠다니는 얼음섬에 거주한다는 거인족의 후손이어야 존과 힘을 겨룰 수 있을 듯하다.
"너무 좋아. 대장, 고마워."
늘 나무 몽둥이가 가볍다고 불평하던 존이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좋아했다.
"이건 톰슨이 써."
톰슨은 힘이 바칸과 비슷했다. 겁이 많아서 싸우는 일은 없지만, 짐은 늘 가장 많이 들었다.
"대장, 고마워."
톰슨은 존처럼 철퇴를 휘두르진 않았다. 마치 소중한 물건 만지듯 손으로 철퇴를 부드럽게 쓸기만 했다.
"철퇴 쓰는 법은 내일부터 조금씩 가르쳐 줄게."
"대장, 나는?"
존이 입을 삐죽 내밀고 불평했다.
"존, 넌 힘이 세서 더 무겁고 긴 무기를 다뤄야 해. 괜히 철퇴 쓰는 법을 배웠다간 좋은 무기 쓰는 법을 못 배울지도 몰라."
존은 자신이 멍청하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철퇴 쓰는 법을 배우면 다른 무기를 배울 때 헤맬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바칸의 말에 수긍하는 게 습관이 되다시피 하여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불만을 거뒀다.
"미클, 이 검은 네 거야."
지휘관이 허리에 찬 검은 손잡이가 길고 날이 짧다. 금속이 귀하여 날이 긴 검은 제국 군대나 사용할 수 있다. 손잡이는 60센티 정도 되는데 날은 겨우 40센티가 넘는 검이었다.
"주의할 점이 있어. 상대와 무기 부딪히지 마. 자루가 나무여서 쉽게 부서지고 날이 얇아서 휘거나 깨질 가능성이 커. 잘 만든 무기니까 단단한 것과 부딪히는 것만 조심하면 오래 쓸 거야."
"대장, 검은 대장이 갖는 게 좋지 않아?"
"난 이거면 돼."
바칸은 도적 두목이 썼던 투구를 자기 앞으로 끌어갔다. 안면 개방형 투구는 미클 덕분에 핏자국이 조금만 남았다. 전체적으로 가죽이지만, 관자놀이와 뒤통수 쪽은 금속 조각을 붙여 방어력을 강화했다.
"고마워, 대장. 잘 쓸게."
존과 톰슨은 모르지만, 미클은 자신 몫으로 온 검이 남은 물건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비싸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멍청한 존이나 겁쟁이 톰슨 그리고 맨날 마을 밖을 싸돌아다니는 바칸과 달리 미클은 영리함과 꼼꼼한 성격 덕분에 잡화점 떠버리를 도와 일을 많이 했다. 그래서 물건 보는 안목이 나쁘지 않았다.
"두목 갑옷은 톰슨이 가져. 존에겐 작고 미클에겐 커."
톰슨이 눈물을 뚝뚝 떨궜다. 비록 우두머리의 투구를 바칸이 가지고 검은 미클이 가져갔지만, 남은 건 모두 톰슨 몫이었다. 상대의 인생뿐 아니라 물품까지 빼앗았기에 톰슨은 아마 이른 시일 내에 엄청 흉포한 사내가 될 것이다. 겁쟁이라는 별명만 사라진다면 어떠한 수식어도 감수할 톰슨이었다.
"이건 미클이 입고, 이건 가죽 뜯어내."
남은 갑옷 상의 중 작은 건 미클에게 갔다. 존이 입기엔 작고 남은 사람이 입기엔 헐렁한 갑옷 상의는 해체될 운명에 처했다.
"도적들이 입던 옷은 가방으로 만들어. 안은 가죽을 대고 밖은 천으로 해서 튼튼하면서도 시선을 잘 안 끄는 가방 만들어. 몇 개 만들 수 있어?"
"큰 거 두 개에 작은 거 하나에서 세 개 만들 수 있어."
"작은 거 하나만 만들어. 대신 엄청 튼튼하게."
남은 건 비수 세 자루였다. 둘은 나무 손잡이고 하나는 손잡이까지 금속으로 된 귀한 비수였다.
"비수 세 개는 공용으로 하고 내가 보관한다. 비수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하고 가져다 써."
분배가 끝났다.
"대장, 투구 내가 깨끗이 닦아놓을게."
미클이 젖은 모래 한 움큼 들고 바칸의 투구 안을 열심히 닦았다. 톰슨도 젖은 모래로 갑옷에 묻은 피를 닦았다.
존은 바칸이 알려준 힘 키우는 방법으로 허리와 등 근육을 단련했다. 백 년 이상 자란 고목처럼 단단한 근육이 힘차게 꿈틀거렸다. 바칸은 존의 거대한 근육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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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몬스터야. 맹수완 다르다고."
톰슨의 겁이 빠르게 사라지면서 바칸을 말리는 역할은 자연스럽게 미클 몫이 되었다.
"잘 들어."
존과 톰슨도 귀를 세웠다.
"난 2년 전에 여길 발견했어. 그때 여기 사는 고블린은 19마리였지. 그리고 지금 23마리가 살지.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셋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바칸의 화난 눈을 확인하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 주변에 나는 음식으론 고블린 20마리 정도가 최선이라는 뜻이야. 고블린은 한꺼번에 새끼를 7마리에서 13마리까지 낳아. 그중에서 수컷과 건강하지 않은 암컷을 죽이면서 무리 숫자를 통제했어."
"그러니까 대장 말은 우리 넷이 살기에 먹을 게 충분하단 말이지?"
미클의 말에 바칸은 미소를 지었다. 쉬운 말도 못 알아듣는 셋과 마을 사람들 때문에 늘 화가 넘치는 바칸이었다. 그나마 최근 8년 동안 넷이 함께 살며 미클이 성장했기에 답답함이 조금이나마 가셨다.
"보통은 말이야. 몬스터는 전투로 숫자를 조절해. 무조건 많이 낳은 다음 먹이가 부족하다 싶으면 싸우는 거야. 그런데 여긴 새끼를 죽여서 숫자를 조절하거든. 그건 근처에 고블린을 위협할만한 몬스터나 맹수가 없다는 뜻이야. 싸울 상대가 없으니 숫자 조절을 직접 하는 거거든."
몬스터와 맹수의 다름이 여기에 있다. 맹수는 먹을 게 부족하더라도 새끼를 계속 보호한다. 정말 어렵다면 새끼를 쫓아내지 직접 죽이진 않는다.
"그리고 여기 고블린은 독침 안 써. 이 산에는 독사나 독을 품은 벌레가 없다는 뜻이야. 고블린이 몬스터로 분류된 건 순전히 독침 때문이거든. 발톱도 날카롭지 않고 이빨도 예리하지 않으며 힘도 약해. 독침 때문에 몬스터 소리 듣는 거야."
"여기 고블린은 마을에서 키우는 닭처럼 약하다는 뜻이구나. 그리고 독사가 없으니 자다가 물릴 위험도 없고."
닭은 좀 심했고 중강아지 정도의 위험이라고 보면 된다. 덩치도 작고 힘이 약한 데다가 무는 힘이 별로고 발톱도 짧고 뭉툭하다.
"여기를 점령한 다음 돈을 버는 거야. 약초 캐고 사냥해서 말이지. 돈을 벌어 식량 사고 사람을 모아. 사람이 어느 정도 모이면 위치 좋은 곳에 가서 마을 만드는 거야. 난 영주가 되고 미클은 잡화점을 차리고 톰슨과 존은 내 무사가 되는 거지."
"대장, 나도 영주 해 보고 싶은데."
존의 말에 미클과 톰슨이 킥킥거렸다. 영주가 되려면 글을 쓸 줄 몰라도 읽을 줄은 알아야 한다. 마을의 미사를 진행할 책임이 영주에게 있고 미사 진행할 때마다 영주가 직접 선언문을 읽어야 한다.
계절마다 교단에서 다른 선언문을 마을에 판매하기에 외우는 건 안 된다. 선언문을 잘못 읽어 신의 분노를 사면 마을에 역병이나 재해가 덮친다.
'마을이 도적의 습격으로 불태워진 게 미사를 안 해서 그래.'
미클은 마을이 오랜 기간 미사를 안 해서 참변을 당했다고 굳게 믿었다.
"마을이 커지면 다른 마을을 공격할 거야. 마을 여럿 점령하면 난 대영주가 되고 존 널 영주 시켜줄게."
"대장, 나도 영주 하고 싶어."
톰슨이 '용감'하게 말했다. 이는 일 년에 한 번이나 있을 법한 일이다. 뭘 하지 말자고 말리는 일은 가끔 있어도 뭘 하자고 톰슨이 먼저 말하는 건 드물었다.
"나중에 내가 왕이 되면 너희 다 대영주 시켜줄게."
바칸의 말에 존과 톰슨이 손을 맞잡고 즐겁게 웃었다. 미클 역시 겉으론 표현하지 않아도 속으로 무척 기뻤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허풍이나 농담으로 여겼겠지만, 바칸이 하면 느낌이 달랐다.
"대장, 그런데 대장은 이런 걸 어떻게 아는 거야?"
존의 질문에 바칸이 이마를 찌푸렸다.
"네가 힘세게 태어난 것처럼 나도 다 알고 태어난 게 아닐까?"
바칸도 가르친 사람도 없는데 자신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게 궁금했다.
"맞아. 신의 은총을 받은 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지혜를 갖췄대."
넷 중에 유일하게 신을 진심으로 믿는 미클이었다. 미사도 안 하는 마을이어서 대부분 신앙심이 형편없지만, 외부인과 가장 많이 접촉하는 잡화점 떠버리와 미클은 독실한 신자였다.
"그럼 바로 들어가서 다 죽이자."
존이 철퇴를 휘두르며 말했다. 톰슨도 바칸이 가르친 사용법을 되새기며 철퇴를 조금씩 휘둘러 몸을 풀었다. 미클은 검 대신 존이 늘 들고 다니던 나무 몽둥이를 잡았다. 덩치는 작아도 가죽이 질긴 고블린에겐 둔기가 적격이었다.
"고블린은 집요한 놈이어서 살아남으면 어떻게든 복수하러 올 거야. 고블린이 몰래 쏘는 독침에 죽고 싶은 사람은 없지?"
깔끔하게 죽이지 못하면 고블린이 독침 만들어서 복수하러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럼 어떻게 해?"
"오후 4시가 되면 고블린 수컷들이 사냥하러 출발할 거야. 보통은 새벽에 돌아오지. 우린 오후 5시에 습격한다. 주의할 점은 죽이지 말고 생포해야 해."
"생포? 그거 너무 어려운데?"
존의 말에 미클과 톰슨도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생포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기르는 닭 잡는 것도 못 하는 사람이 있는데 몬스터로 불리는 고블린을 생포하는 건 훨씬 두려웠다.
"여길 꾹 누르면 고블린이 힘 잃고 기절할 거야. 오래 눌러도 잘 죽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 철퇴나 몽둥이는 내려놓고 내가 주는 나무 꼬챙이나 잡아."
바칸은 끝을 무디게 깎은 꼬챙이를 셋에게 줬다. 작은 나무토막을 고블린이라고 가정하고 연습도 했다.
"고블린은 암컷이 없으면 무리를 못 이뤄. 수컷은 자신이 죽더라도 살아있는 암컷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아. 어느 게 암컷인지 알 방법이 없으니 모두 생포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넷은 나무껍질을 꼬아 밧줄 만들면서 고블린 수컷이 사냥 떠나기만 기다렸다.
- 작가의말
처음부터 큰물에서 놀 순 없죠. 일단 고블린 마을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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