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
"수화불용."
자룡은 헬파이어에 태워지는 얼음 골렘을 보며 의미 모를 말을 뱉었다. 오직 바칸만이 물과 불은 섞이지 못한다는 뜻임을 알았다.
헬파이어는 얼음을 녹이지 않고 태웠다. 키가 8미터나 되는 육중한 몸으로 엄청난 위압감을 주던 골렘이 점점 작고 보잘것없이 변했다.
"가디언도 별거 아니었네."
존의 말에 바칸이 고개를 저었다.
"냉기를 흡수해 회복하는 골렘이야. 강철과 비슷한 강도의 얼음으로 핵을 꼭꼭 감싸고 있어서 헬파이어 아니면 반 시간은 싸워야 했을 거야."
헬파이어는 단순히 골렘을 태우기만 한 게 아니라 주변의 냉기를 쫓아냈다. 회복 능력을 잃은 골렘은 속수무책으로 태워져 끝끝내 핵까지 재가 되었다.
두 번째로 만난 가디언은 금속 골렘이었다. 얼음 골렘보다 마법 저항이 수백 배 강하다. 오히려 물리력에 약했다. 공격받은 부위가 부서지면서 충격을 내부로 전달하지 않는 얼음 골렘과 달리 금속 골렘은 충격이 안으로 잘 전해지는 바람에 둔기 공격에 약했다.
"코어 퀘이크."
주먹 크기의 금속구 세 개가 골렘 몸에 달라붙었다. 골렘의 손발이 닿지 않는 곳에 들러붙은 금속구들은 격렬하게 진동했다.
세 개의 진동이 한 점에서 합쳐졌다. 마법사는 정밀한 제어로 공진하는 점을 금속 골렘의 핵과 일치시켰다.
핵에 진동이 전해지자 금속 골렘은 머리를 땅에 받는가 하면 물에 빠진 사람처럼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3분 정도 광대 노릇을 하던 골렘이 끝내 무너졌다. 세월의 풍화를 이기지 못해 부서진 바위처럼 바닥에 쓰러져서 작은 덩어리로 흩어졌다.
세 번째로 만난 가디언은 다리가 네 개에 팔이 여섯인 이상한 생물이었다. 가끔 발이 꼬이고 팔끼리 서로 방해하는 걸 보면 태생적으로 다리와 팔이 많이 달린 것 같진 않았다.
"키메라다. 비슷하거나 상반된 생물을 조합하여 진화를 이뤄내는 방식이지."
키메라를 상대한 건 세인트 나이트를 불렀던 하얀 로브를 입은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주머니에서 푸른 씨앗 하나 꺼내서 키메라에게 던졌다.
씨앗은 키메라 몸에 맞아 바닥에 떨어졌다. 땅과 접촉한 씨앗은 빠르게 발아하며 뿌리를 내렸다.
10초도 안 되어 씨앗이 꽃을 피웠다. 꽃에서 옅은 푸른 기운이 사방으로 퍼졌다. 키메라는 푸른 기운이 몸에 닿자 고통스럽게 바닥에 엎어졌다.
엎드린 채 꿈틀거리는 키메라의 등에 끔찍한 자국이 여럿 있었다. 무딘 칼로 잘라낸 것처럼 절단면이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조화롭지 못한 것은 조화로 다스리면 된다. 마법은 실로 대단한 학문이구나."
자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바칸 역시 생명의 기운을 얻은 키메라가 오히려 약해지는 걸 보며 깨닫는 바가 있었다.
제어할 수 없는 힘은 독이나 마찬가지다. 옮기지 못할 황금으로 된 산보다 한 조각 금이 더 귀중하다.
키메라의 몸 곳곳이 터졌다. 억지로 맞춘 균형이 넘치는 생명의 기운을 만나면서 깨져버렸다.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오. 저 꽃으로 며칠 묶어둘 수 있으니 이만 갑시다."
생명의 기운은 살아있는 자를 유혹한다. 바칸이나 자룡은 그나마 괜찮지만, 정신 수양이 부족하다는 말로도 모자란 셋은 발을 옮길 수 없었다.
결국, 바칸과 자룡이 셋을 억지로 끌었다. 다행히 완전히 정신을 빼앗긴 건 아니어서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갔다.
"마지막 가디언은 자룡께 부탁합니다."
백발이 성성한 마법사가 자룡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고개를 끄덕인 자룡은 허리띠를 풀어 손에 잡았다. 흐물흐물하던 허리띠가 3미터 길이의 은색 창으로 변했다.
"가디언이 고작 넷이라고?"
바칸은 마지막이란 말에 질문했다.
"그럴 수도 있지 않겠소?"
"첫 번째 드래곤은 몰라도 두 번째 드래곤은 수백 마리 가디언을 거느렸다고 들었다."
"가디언이라고 영생을 누리는 건 아니오. 그때부터 천 년도 더 지났는데 가디언 대부분이 죽었을 수도 있지."
바칸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은색 창을 든 자룡이 3미터 키를 한 데몬과 대치하고 있었다.
데몬은 화산이 폭발할 때 마그마가 생명을 얻으면 탄생하는 괴물이다. 대부분은 사고방식이 단순하여 오래 살지 못한다. 그러나 지능을 얻은 데몬은 자신에게 적합한 환경을 찾아 불의 기운을 흡수하며 생명을 길게 유지한다.
"몸에 균형이 잡혔잖아. 저런 데몬은 최소 천 년은 살았어. 어린 데몬은 팔다리 길이도 제각각이고 몸도 마구 뒤틀려 있거든."
"그런데 저 둘은 안 싸우고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어설픈 공격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서로 아니까. 딱 한 번 싸워서 결판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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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까?"
바칸은 검은 피를 울컥 토하는 자룡을 부축했다. 오는 내내 자룡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으며 부친 혹은 스승에 준하는 감정이 생겼다.
"괜찮소. 그저 짐이 된 것 같아 미안할 뿐이오."
자룡의 창은 단번에 데몬을 죽음으로 몰았다. 그리고 데몬이 오랜 세월 몸에 응축한 기운이 통제를 잃고 폭주했다.
자룡은 일행 앞을 막아서서 모든 공격을 혼자 막아냈다. 데몬은 마법 공격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데몬의 기운 역시 마법사들은 막을 방법조차 없다.
"난 여기 남겠소."
어느 정도 수습한 자룡이 마법사들에게 말했다. 마법사들은 고개를 숙여 자룡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후 커다란 동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난 걱정 안 해도 되니까 그대들도 어서 떠나시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꼭 드래곤을 죽여 세상을 지켜내야 하오."
자룡은 쉽게 발걸음을 못 떼는 바칸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
"우리도 가자."
평정을 찾은 바칸은 일행을 이끌고 동굴로 향했다.
"대장. 왜 치유가 안 먹힐까?"
"법칙을 초월한 분이야. 덕분에 다른 사람이면 백번도 죽었을 공격을 버텨냈지만, 마찬가지로 세상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효과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정말 미세하여 티도 안 날 정도야."
반란죄로 황실에 처단당한 제국 역사상 유일한 4단계 기사도 자룡에 비하면 세 살배기나 다름없다.
바칸 일행은 발걸음을 재촉해 앞선 마법사들을 따라잡았다.
"드래곤을 어떻게 상대할지 알려줄 때가 되지 않았나?"
바칸의 질문에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플리모프 스크롤이오."
바칸도 처음 들어보는 물건이었다.
"이걸 펼치면 드래곤이 뭔가로 변하오. 뭐로 변할지는 우리도 아는 바가 없소. 30분 동안 드래곤이 다른 형태가 된 사이 죽여야 하오."
"고작 이거야? 실패했을 때 대안은?"
"수백 번 시뮬레이션 마법으로 확인했소. 뭐로 변하든 대안을 준비했으니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소."
"만약 실패하면?"
"거기까지 준비하기엔 시간을 비롯해 모든 게 부족했소."
바칸은 숨을 크게 내 쉬었다.
"마법사는 매우 이성적인 존재라고 들었는데."
"미지를 상대할 땐 누구라도 추측을 섞어 도박하기 마련이오."
"도박이라니. 마법사와 가장 안 어울리는 말 아닌가?"
"고대 제국의 자료가 대부분 유실된 바람에 우리도 이게 최선이오."
잠깐 침묵이 흐르며 터벅터벅 걷는 소리만 동굴에 울렸다.
"예전엔 드래곤을 어떻게 해치웠지?"
"고대 제국은 매우 강했소. 두 번째 드래곤이 하늘섬을 바다로 떨어뜨리는 바람에 제국이 무너지지만 않았어도 세 번째 드래곤은 이미 죽었을 거요."
"그런 드래곤을 고작 우리가 해치울 수 있을까?"
"우리 말에 순순히 따른 건 당신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오? 머리가 복잡하면 실수할 가능성이 크니 우리 계획에 고분고분 따르시오. 당신 말대로 매우 이성적인 존재들이 오랜 세월 연구한 결과요."
겉에서 볼 땐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는데 동굴은 무척이나 깊었다. 늘 침착한 바칸이 조바심을 일으킬 정도였다.
"뭔가 이상한데?"
"마법 미궁이오. 계속 파훼하고 있으니 마음을 다스리시오."
체감상 반나절이 흐른 후에야 걸음을 멈췄다.
"마법 미궁을 해체했소. 미궁 효과가 사라질 때까지 쉬겠소."
해체되면서 법칙이 비틀릴 때가 오히려 가장 위험하다. 혹시라도 모를 위험을 대비하여 일행은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드래곤이 뭐로 변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대응해야 한다는 말이군. 아무리 그래도 모든 상황에 대비하는 건 말이 안 되겠지?"
"준비물이 많거나 위협이 되지 않는 몇 가지는 배제했소."
"마법 주머니가 부족한가?"
"드래곤 피어를 버텨낼 수준의 마법사가 우리밖에 없소. 그리고 마법사는 하나의 마법 주머니만 사용할 수 있고."
"그런데 이번 드래곤의 출현은 예정된 건가?"
"아니오. 첫 번째 드래곤과 두 번째 드래곤은 3천 년을 두고 출현했소. 세 번째 드래곤도 2천 년 뒤에나 등장할 예정이었소."
"뭔가 문제가 생긴 거군."
"부르크 교단이오. 그 멍청이들이 수십 년 전에 신의 속삭임에서 드래곤을 깨우는 주문을 찾아냈소."
수십 년 전 부르크 교단은 신의 속삭임에서 위대한 존재를 부르는 주문을 찾아냈다. 그들은 위대한 존재는 부르크가 틀림없다고 여겨 제단을 향해 주문을 외웠다.
"다른 교단이었다면 실패했겠지. 그러나 부르크 교단은 제단이 너무 많았소. 시간을 정해 모든 교구에서 기도문을 외우면서 봉인되어 있던 이 섬이 나타났소."
"마법사들은 그때부터 드래곤을 죽일 준비를 한 것인가?"
"그렇소. 전에는 그저 고대 제국의 지식을 수습하는 데 더 열중하고 개인 수련은 뒷전이었소. 드래곤의 부활이 앞당겨지는 바람에 부랴부랴 수련에 전념했지. 덕분에 가능성이라도 만들어낸 거요."
"그런데 탐구자들은 어쩌다 타락한 거지?"
"고대 제국은 땅에서 사는 자들과 하늘에 사는 자들로 나뉘었소. 하늘섬에 사는 자들은 최소 3단계 기사의 강함을 갖췄소. 이들의 보호로 인간은 몬스터도 자연재해도 두렵지 않았소. 그런데 드래곤이 하늘섬을 바다로 가라앉힌 후 몬스터의 위협을 더불어 배고픔과 추위에도 시달리게 되었소."
"의지할 데가 없어서 찾아내 없애야 할 신을 따르기 시작했다는 건가?"
"약 3백 년의 시간을 걸쳐 천천히 두 대륙 모두 신을 모시고 따라야 할 존재로 인식했소. 그리고 얼음섬에 사는 부족과 연락할 방법이 사라지면서 탐구자들은 제단을 건설만 하고 파괴하지 않았소. 그리고 신의 속삭임을 입맛에 맞게 수정해 퍼뜨리기 시작하면서 차츰 자신의 소임을 잊어갔소."
바칸은 차가운 표정으로 대화하는 마법사를 바라봤다.
"혹시, 마법사들도 자기 소임을 잊은 건 아니겠지?"
"마법사는 이성적인 존재요. 탐구자들처럼 연민이라는 감정에 틀린 결정을 내릴 가능성은 없소."
"이성이 지나치면 감성적인 것보다 더 두려운 법이지. 특히 정보가 적은 상황에선 말이야."
"열두 명이 드래곤을 상대해야 하오. 근거도 없이 트집을 걸어 불안을 조성하지 않았으면 하오."
대화를 듣기만 하던 나이가 가장 많은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나와 대화하는 마법사는 정해졌다. 다른 자들은 나랑 대화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내게 불리한 뭔가 있겠지.'
"그대는 고딕 황제한테 무슨 제안을 했는가?"
바칸의 질문에 나이 많은 마법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나랑 고딕 황제 사이의 일이오. 함부로 누설할 수 없소."
"이것만 대답해. 혹시 나 혹은 아틀란티스 제국에 불리한 제안을 했는가?"
"드래곤을 잡으면 대화한 내용을 모두 들려주지. 그러니 지금은 드래곤에게 집중하는 게 좋겠소."
- 작가의말
내일 완결입니다.
9월에 왼눈이 부어오르더니 종기가 터지며 고름이 나왔습니다. 지금은 오른눈이 부었는데 다행히 푹 쉬면서 조금씩 가라앉고 있네요.
이 글은 건강을 걱정해 하루에 한 편만 올리기로 했었는데, 결국엔 글을 쓰느라 피곤해서 건강이 나빠진 게 아니라는 것만 증명되었습니다.
이 글은 생각했던 것만큼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예전 글들도 아쉬움이 있지만, 제 능력이 부족한 게 컸습니다. 그러나 이번 글은 주인공 능력을 스토리에 안 맞게 설정하는 바람에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내일 마무리 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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