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버리 합류
"오는 거 같아."
톰슨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슬라임은 귀가 없어 소리 못 들어. 크게 얘기해도 돼."
바칸의 말에 톰슨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근래에 자신감이 많이 생기긴 했지만, 조심스러운 건 천성인지 잘 고쳐지지 않았다.
'조심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
예전이라면 조심이 아니라 겁 많은 거라고 자신을 비하했겠지만, 흉포해지고 능력도 생긴 뒤로는 사고방식 자체가 바뀌었다.
아직도 존보다 자신감이 부족하고 미클에 비하면 능동성이 부족하지만, 뭔가 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던 예전과는 딴사람이나 다름없다.
"근데 고기 소모가 너무 심해."
슬라임을 유혹하는 미끼는 썩은 고기다. 당연히 썩은 고기를 파는 미친놈이 없기에 싱싱한 고기를 가져다가 썩혀야 한다. 고기 한 근 썩히면 썩은 고기 반 근 정도 나온다.
톰슨은 고기 사는 데 들어가는 돈이 너무 아까웠다. 그 고기가 배로 들어가 살을 찌워준다면야 아까울 게 전혀 없겠지만, 슬라임을 유인하는 미끼로 버려지는 건 가슴 아팠다.
게다가 고기를 썩히는 동안은 꽤 심심했다. 비록 체력이 출중하긴 하지만, 철퇴를 들고 하는 수련은 기껏해야 하루에 2시간이었다. 그 이상은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입맛이 까다로워서 내장은 안 먹어."
내장은 가격도 싸고 빨리 썩는다. 그런데 슬라임은 입이 나름 고급이어서 썩은 내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소 오줌보처럼 생긴 반투명한 뭉치가 꾸물거리며 바칸과 톰슨이 설치한 함정으로 향했다. 지금은 저리 느리게 움직이지만, 위험을 감지하면 순식간에 늪지로 파고들어 사라질 것이다.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한 바칸과 톰슨은 인내를 갖추고 꾸준히 기다렸다. 슬라임이 썩은 고기에 다 접근하고 나서야 바칸이 출발했다.
"제길, 늦었다."
바칸은 뾰족하게 깎은 나무를 물렁물렁한 땅에 일정 간격으로 박아 슬라임이 도주하지 못하게 막았다.
발자국이 손가락 하나 깊이로 남는 물렁물렁한 땅이긴 하지만, 슬라임이 파고들어 도망치기엔 좀 딱딱한 편이었다.
퇴로가 막힌 슬라임은 어느 방향으로 도망쳐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했다. 나무 꼬챙이를 박아서 만든 장애물을 위로 넘어서 도망치면 되지만, 슬라임은 귀만 없는 게 아니라 뇌도 없었다. 충분한 시간을 주면 자신을 가둔 나무 울타리를 넘어 도망치겠지만, 지금은 사방이 막힌 상황에 뭘 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오늘은 여기까지야?"
"응. 다른 고기는 아직 덜 썩었어."
고기는 쉽게 상한다. 그러나 슬라임의 구미를 동하게 할 정도로 썩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바칸도 고기를 빨리 썩게 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바칸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미끼로 쓴 썩은 고기를 슬라임이 삼킨 후였다. '드래곤 입에 들어간 고기나 슬라임 입에 들어간 고기나 매한가지'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다시피, 저걸 도로 꺼낼 방법은 없다.
바칸은 단단한 나무를 갈아서 만든 칼로 슬라임을 헤집었다. 썩은 고기는 이미 소화되어 사라졌고 바칸이 애타게 찾는 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썩은 고기 다 쓰면 돌아가자. 슬라임 핵이 생각보다 안 나와. 계획을 변경해야겠어. 이건 손이 많이 필요한 일이야."
바칸은 나무에 넣어놓은 고기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빨리 썩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
보름 가까이 고생한 바칸과 톰슨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떠버리 맞아?"
바칸의 질문에 떠버리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불에 타서 그래. 말 자주 하면 볼이 아파."
얼굴뿐 아니라 어깨와 옆구리 그리고 다리 하나가 불에 타서 변형했다. 목소리도 변하고 얼굴도 화상으로 일그러졌고 체형도 달라졌다. 넷의 이름을 모두 아는 걸 보면 떠버리가 맞는데, 그 상황에서 살아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손 잘리고 기절했어. 너무 뜨거워 정신 차려보니 사방이 불이야. 나쁜 놈들이 흩어져서 겁쟁이 톰슨을 찾더라고. 난 조금씩 기어서 우물에 뛰어 들어갔어. 처음엔 시원해서 좋았는데 조금 지나니 오히려 우물이 불보다 더 뜨거웠어. 우물 안에서 밤이 될 때까지 있다가 기어 나와서 여기까지 왔어."
떠버리가 중요한 물건을 숨기는 창고는 도적들에게 들키지 않았다. 떠버리가 잘 위장했다기보단 도적들이 마을 규모를 보고 기대치가 낮아져서 제대로 수색하지 않은 것이었다.
떠버리는 안에 있는 약으로 최대한 치료한 다음 음식과 재물을 들고 불탄 마을을 떠났다.
"교단에서 치료를 받아 이만큼 회복했어. 처음엔 말도 못 했거든. 치료로 돈 다 날리고 어쩔 수 없이 주검을 찾아다녔어. 재물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옷을 벗겨서 빨래하고 바느질한 다음 시장에 내다 팔았어."
몬스터나 맹수에게 죽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람에게 죽는다. 재물 따위가 나올 여지는 거의 없다는 뜻이다. 살인한 자가 버리고 갈 정도로 엉망인 옷을 어떻게든 빨고 기워서 팔았다는 말에 바칸마저 탄복했다.
"살려줘. 먹여주기만 하면 일 열심히 할게. 미클, 내가 널 아들처럼 돌봤잖아. 불쌍한 날 버리지 마."
진짜로 미클을 아들처럼 돌본 건 아니지만, 일을 시키고 정당한 대가를 지급한 건 사실이었다.
떠버리는 남에게 공짜로 뭘 준 적은 없지만,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넷을 싫어하거나 멀리하지 않았다. 바깥사람들과 자주 접촉하는 사람이어서 생각이 좀 트인 편이었다.
"미클, 가서 버드나무 가지 잘라와. 굵기는 요 정도고 양은 두 줌. 톰슨은 붉은 껍질 나무의 뿌리를 한 줌 캐와. 길이는 두 뼘 정도고 굵기는 엄지손가락 정도, 싱싱한 거로."
"난?"
"넌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야."
존은 바칸을 열심히 돕기로 마음먹었다.
"고마워. 내가 할 일을 알려줘."
떠버리는 바칸에게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따가 미클하고 함께 통발 걷으러 가. 통발 안에 있는 물고기랑 새우를 꺼낸 다음 채소밭에서 잡은 벌레를 넣고 통발을 다시 물에 담그면 돼. 구체적인 방법은 미클이 알려줄 거야."
"아침에 일어나면 풀 뽑고 채소에 생긴 벌레를 잡아. 벌레는 통발 미끼로 쓸 거니까 함부로 죽이거나 버리지 말고. 벌레 가둬두는 곳은 미클이 알려줄 거야. 그리고 저기 토끼 키우는 거 있는데 아무 풀이나 잘 먹으니까 대충 주변에서 풀 뽑아 먹이면 돼."
미클과 톰슨은 거의 동시에 돌아왔다. 바칸은 버드나무 가지와 붉은 껍질 나무의 뿌리를 깨끗하게 씻은 다음 물에 넣어 끓였다. 충분히 우린 다음 가지와 뿌리를 꺼내고 약초 몇 개를 추가해서 한참 끓였다.
"하루에 한 번 끓여서 마셔. 장작은 충분하니까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문제없을 거야. 뿌리나 가지는 싱싱한 걸 우려내야 하니까 먹을 양만큼만 채집해. 마른 걸 쓰면 약효가 거의 없으니까 미리 잘라두지 말고. 그리고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몸이 상하니까 꼭 하루에 한 번만 먹어야 해."
떠버리는 뜨거운 약초 우린 물을 후후 불어가며 빠르게 마셨다.
"이미 다친 걸 낫게 할 순 없어. 그러나 지금보다 나빠지진 않을 거야. 건더기는 다리에 고름 나오는 곳에 붙여."
떠버리는 뿌리와 줄기 그리고 말린 약초 찌꺼기를 다리에 붙이고 다시 천으로 싸맸다.
"미클. 쌀과 밀가루 있는 곳 알려주고 통발 거두는 거 가르쳐. 우린 내일 떠난다."
떠버리는 알아야 할 것들을 모두 확인한 다음 나무 아래서 잠들었다. 고블린 마을마다 키우는 이름 모를 나무는 염증 치료에 좋기에 바칸의 당부대로 일하는 시간 제외하면 계속 나무에 붙어있을 생각이었다.
"잘됐어. 여길 비워두는 게 조금 걱정이었는데 말이야."
"우리 여섯 모두 떠나야 해?"
바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락과 링이 성인 되려면 슬라임 핵을 먹어야 해. 더 좋은 게 있긴 하지만, 너무 비싼 물건이고 쉽게 구하지도 못해. 대안은 슬라임뿐이야. 슬라임 잡으려면 썩은 고기가 있어야 하는데, 썩은 고기 한 덩이로 유인해 잡을 수 있는 슬라임은 하나야. 그러니까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는 거지."
떠버리가 없었다면 두 드워프를 남겨두거나 미클을 남겨뒀을 것이다. 바칸은 공교롭게 모습을 드러낸 떠버리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화살 하나로 새 두 마리 잡는다는 말이 있잖아. 우린 먼저 오크 부족이 있는 곳으로 가서 오크부터 사냥할 거야. 오크 가죽도 얻고, 그 기간에 오크 고기를 썩히는 거지. 그다음 늪지로 가서 슬라임 사냥을 한다. 핵을 얻으면 링이 먼저 먹는다. 링이 락보다 음식이 훨씬 필요한 상황이니까. 락도 괜찮지?"
"그럼. 모든 드워프는 형제다. 부족이 달라도 말이지."
오크 사냥을 하고 돌아올 때 얻은 검과 철퇴를 드워프에게 줬다. 드워프의 무기 휘두르는 솜씨가 어떤지 모르지만, 무장한 사람이 다섯이나 되는 무리라면 웬만해서 덮칠 궁리를 못 할 것이다.
"이거 갓난쟁이가 만든 건가?"
철퇴를 휘두르던 락이 툴툴거렸다.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감각으로 무기에 있는 결함을 십수 개나 순식간에 찾아냈다.
비록 현재 성인은 아니지만, 허접한 무기를 써야 한다는 게 드워프로서 너무 수치스러웠다.
"무기 만들 줄도 모르면서."
미클의 타박에 락이 어깨를 으쓱했다.
"좋은 무기 만드는 방법을 모른다 뿐이야. 방법 알려주면 나도 만들 수 있어."
"좋은 무기 못 만들면, 안 좋은 무기는 만들 줄 아는 거네?"
락의 말에 미클이 살짝 비아냥댔다.
"드워프 기준으로 평작은 만들 수 있어. 그것도 인간은 좋다고 난리지만. 네가 찬 그 검 수준은 눈 하나 감고 만들 수 있지."
그때 바칸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미클. 드워프에게 수준 이하의 물건을 주문하는 건 큰 실례야. 우린 동료니까 서로 존중해야겠지?"
"뭐야? 인간, 나한테 허접한 무기 만들라고?"
락이 버럭 화냈다.
"락. 너도 언젠간 우리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할 수 있어. 모르고 실수하는 부분은 서로 이해해 주는 걸 원칙으로 하자고. 동의하지?"
"락. 바칸 말을 들어. 그리고 너도 저들 이름을 불러. 종족 명칭으로 부르는 건 실례야. 드워프끼리는 서로 드워프라고 부르진 않잖아."
링의 말에 락이 미클에게 사과했다.
"미클, 미안하다. 네가 물건 자주 만드는 거 보고 조금 심술이 났던 거야."
"아니야. 나도 몰라서 그런 거지만, 네 자존심 건드린 거 진심으로 사과할게."
락은 자신이 꾹 누른 창작 욕구를 자꾸 건드리는 미클이 미웠고, 미클 역시 은근히 잘난체하는 락이 거슬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몇 없는 역할 중 하나인 물품 제작을 드워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클 역시 알게 모르게 적대심이 생겼었다.
그러나 드워프가 수준 이하 물건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그러고 나니 자신이 두 드워프를 조금 퉁명스럽게 대한 게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다.
'바칸. 대단해.'
톰슨은 간단한 말로 둘 사이를 가깝게 만든 바칸에게 진심으로 탄복했다.
'나처럼 능력 얻은 것도 아닌데. 둘이 서로 싫어하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그걸 해결할 가장 적합한 말을 했어.'
떠버리를 받아들인 일도 마찬가지였다.
'떠버리는 그저 살고 싶어 하는 마음뿐이야. 우리한테 해될 게 없지.'
바칸은 결정 내리기 전에 톰슨에게 잠깐 눈길을 줬고, 톰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칸은 톰슨한테 무슨 능력을 얻었냐고 질문한 적이 없었다.
바칸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 작가의말
모든 드워프는 형제다.
자매는 없습니다. 로맨스는 확실하게 차단하면서 가겠습니다.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