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판을 짓다
"네 개인 재산 중에 쓸모없는 게 좀 있더라고."
네비치는 미리 분류한 문서를 뮬리치 앞으로 밀었다. 많은 쓸모없는 물건 중에서 창고에 가득 쌓인 가죽이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재산 치환 해줄게. 처분 어려운 물건을 가문 재산으로 돌리고 가문의 금화나 가치가 높은 그림 따위를 네 앞으로 돌리겠어."
영지민은 물론 영지에 거주하는 자유민도 세금을 바친다. 세금 중 꽤 큰 비중으로 가죽이 들어온다.
뮬리치는 약 18년 전에 영주가 되었다. 뮬리치의 아버지는 교단과 비나크 공작의 압박을 못 이기고 자결했다. 다른 계승권자를 모두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아무 증거도 없었다. 교단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진실의 심판'을 제안했고 전대 자작은 자결로 모든 걸 묻어버렸다.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던 뮬리치는 나날이 번성하는 바하를 견제하려고 가죽을 창고에 쌓아뒀다. 심지어 바하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가죽을 사들이기까지 했다.
주요 수출품을 장악하여 바하를 말려 죽이면 베르크가 다시 교역 중심지가 될 거로 알았다. 강이 둘 만나는 곳에 자리 잡은 바하를 이길 방법이 아예 없다는 걸 깨달은 건 몇 년이나 지난 후였다.
정신을 차려 가죽을 팔려고 했을 땐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엔 바하가 도리어 상인들이 베르크 영지와 거래하는 걸 방해했다.
그 외에도 처분이 어려운 물건이 꽤 되었다. 어떻게든 본전은 뽑으려고 지금까지 안고 있었는데, 네비치가 처리해준다고 제안했다.
"바칸을 독립시킬 때 영지 재산을 1/7 줘야 하잖아. 그때 쓸모없는 것들을 줘버려. 독립 관련한 문서 작업은 내가 하거든. 재산 분할이 불공평하다는 항의는 소용없을 거야."
'눈엣가시 같은 네이치를 계속 곁에 둬야 한다니. 큰마음 먹고 네이치를 독립시키려 했는데. 바칸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판을 짠 것인가? 그렇다면 오히려 순순히 당해주는 게 낫다. 척을 지기엔 너무 두려운 놈이다.'
"고민할 시간이 더 필요한가? 12월이 오기 전에 독립과 영지민 이동을 끝내야 할 텐데 말이야. 백작 되기 싫으면."
네비치는 뮬리치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기 싫었다. 성직자가 되어 몇 년 안에 문서를 관리하는 요직에 앉은 것만으로도 네비치의 능력을 충분히 알 수 있지만, 그런 네비치를 영주성에서 쫓아내고 계승권까지 포기하게 한 뮬리치도 만만치 않은 자다.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이미 바칸이 마을 영주가 되었다. 그걸 다시 네이치로 바꾸려면 시간이 걸릴 테고. 재산 분할에 관한 문서 작성도 느리게 진행될 거니 12월에 비나크 교구로 올라가는 문서에 네 영지민 숫자는 반드시 1만을 넘겠지. 약 한 달 더 뒤에 영주성에서 백작으로 승작한 축하 파티도 열어야 할 거고."
뮬리치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안정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방금 협상한 내용대로 일을 진행하도록. 네가 약속 하나라도 어기면 내년 봄에 네이치는 몬스터 토벌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원정을 할 거야."
"분부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네이치는 당분간 미천한 제가 데리고 있을 테니 굳이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문서방을 나선 뮬리치는 기도실로 향했다.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는 보나비치가 보였다. 제국 귀족인 보나비치는 부르크 신을 믿는다. 지금 저기에서 게르크에게 기도를 올리는 게 아니라 부르크에게 올리는 것이 틀림없다.
보나비치가 올리는 건 간헐 자유 기도였다. 기도문을 읊지 않고 그저 마음을 하나로 모아 모든 걸 잊은 상태로 들어간다. 그 상태에서 빠져나오면 일정 기간 휴식을 취하고 다시 기도한다.
"보나비치, 영주성으로 돌아간다."
보나비치가 기도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키자 뮬리치는 영주성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보나비치는 말없이 뮬리치의 뒤를 따랐다.
"패검해라."
보나비치는 수하에게 검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뮬리치의 의도가 궁금하긴 했지만, 제국에서 교육받은 보나비치는 상급자의 생각을 함부로 묻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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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앞을 지나던 집사는 안에서 들리는 기척에 발걸음을 멈췄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확신이 생기자 서재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교단에 간 영주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인이나 하녀가 감히 도둑질할 엄두는 내지 못할 테니 분명히 철딱서니 없는 아씨 중 하나가 이쁜 장신구가 없나 뒤지는 거로 생각했다.
뮬리치 어머니가 시집올 때 따라온 집사는 귀족 신분이다. 게다가 뮬리치 아버지가 영주 자리를 차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영주성에서 뮬리치를 제외하면 최고 권력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왔는가?"
집사는 당황하여 따지는 걸 잊었다. 서재 안에서 기척을 낸 사람은 바칸이었다.
"거기 앉도록. 궁금한 게 있어서 묻고 싶다."
집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칸의 말대로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이 초상화의 주인에 관해 아는 바를 자세히 말해보도록."
"내가 왜?"
집사는 왜 자신이 바칸 앞에서 기를 못 펴는지 고민했다.
"뭔 큰 비밀이 아니라면 말하는 게 좋다고 본다."
집사는 금세 깨달았다.
'자작과 말투가 똑같다.'
"뭐 하는 짓이야!"
바칸은 집사의 호통에 차분하게 대응했다.
"가문의 일곱 번째 계승자로서 명령한다. 여기 초상화에 있는 이 여인, 내 어머니에 관해서 아는 걸 다 말하도록."
바칸은 성직자가 준 문서를 집사에게 보여줬다. 바칸이 귀족이고 베르크 영지를 지배하는 가문의 계승권을 갖췄음을 증명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교단의 도장이 확실하게 찍혀있어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귀족의 신분이나 권한이 교단에서 오는 건 아니지만, 혼인 관계와 계승권을 비롯한 정보는 교단에서 관리한다.
귀족도 문맹률이 무척 높다. 읽는 건 대부분 하지만, 쓰는 건 어려워했다. 그런 이유로 예전부터 교단의 성직자가 귀족을 대신하여 문서를 작성하는 일이 잦았다. 지금은 아예 교단이 관리하는 거로 굳어졌다.
"발디 님은 대단한 기사였다."
성직자의 말대로 어머니는 뮬리치의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다. 전대 자작이 영주가 되는 데 큰 도움을 줬고 남매 사이는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전대 자작이 다른 계승권자들을 급하게 제거한 데는 바칸의 어머니 발디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도 있었다. 원래는 의심받지 않으려고 하나씩 천천히 처리했는데 갑자기 주요 조력자인 여동생이 감쪽같이 실종되자 다급해졌다.
계승권자 중 누군가가 수작 부린 거로 오해하여 의심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서둘러 처리했다.
"내 아버지에 관해서 아는 게 있는가?"
"모른다. 발디 님이 영지를 떠난 게 20년 전이다. 발디 님은 오빠의 지위가 확고해지면 계승권을 포기하고 제국 귀족한테 시집갈 예정이었다."
"8년 전에 마을에 늑대 인간이 침입했다. 마을 사람 절반이 죽었고 내 어머니도 그날 죽었다. 왜 어머니는 베르크 교구에 속한 마을에 살면서도 영주성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는가? 네 말처럼 전대 자작과 사이가 좋았다면 말이다."
"전대 자작은 다른 계승권자를 죽인 의혹을 받았는데 증거가 없었다. 교단에서 '진실의 심판'을 받을 걸 요구받은 후 자결했다. 발디 님도 그 사건과 무관하지 않으니 안 돌아온 게 아닐까 추측한다."
"내 아버지에 관해서 아는 사람이 혹시 없는가? 내 기억엔 어머니밖에 없다. 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궁금하다."
"발디 님을 아는 사람도 몇 없다. 귀족가 여인의 삶은 다들 그렇지.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면 영주성을 벗어날 수 없고, 시집가도 집을 벗어날 일이 얼마 없다. 영주성에서도 나랑 자작 제외하면 아는 사람이 없을 거다. 네이치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라졌으니."
바칸은 아버지로 등록된 로즈앙의 정체에 태클을 걸 만한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큰 시름을 내려놓았다.
"네이치 대신 내가 독립해야 한다면 데려갈 가신은 누굴 고르는 게 좋을까?"
집사는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 따라갈 사람이 없을 거다. 가신이 거부하면 지명해도 소용없는 거 알지?"
"당신은?"
"난 뮬리치 어머니의 가신이다. 이 영지의 가신이 아니다."
실제로 집사의 가족들은 이곳에 있지 않았다.
그때 딸랑 소리가 영주성 전체에 울려 퍼졌다. 영주성의 주인인 뮬리치가 돌아왔다는 신호였다.
"옮긴 물건은 원래 자리로 돌려라. 자작은 물건 위치가 잘못되는 걸 싫어한다."
당부를 마친 집사는 자작을 맞이하러 나갔다. 바칸은 어머니의 초상화를 찾느라 뒤진 곳들을 원래대로 복구했다.
"바칸."
채 정리를 마치지 못했는데 뮬리치가 서재로 들어왔다. 숨이 가쁜 걸 보니 달음박질로 온 것 같았다. 곁에는 제국검을 허리에 찬 보나비치가 있었다.
"똑똑한 놈이라고 여겼는데 실망했다."
"네 실망이 클수록 내가 잘했다는 뜻이겠지. 칭찬으로 듣겠다."
"네 계획을 말해보도록."
가까스로 화를 가라앉힌 뮬리치는 바칸에게 의도를 물었다.
"내 어머니 초상화. 그리고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던 저 목걸이. 남은 건 네 뜻에 따르겠다. 원한다면 해가 바뀐 다음 3백 골드에 마을을 네게 넘기겠다."
바칸의 제안이 뜻밖이었는지 뮬리치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니까 계승권도 포기하고 마을도 포기하고 귀족 신분만 가지겠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 집사한테 얘기 들어보니까 내 어머니와 전대 자작 사이가 무척 돈독했다고 하던데. 후대에서 굳이 얼굴 붉힐 필요가 있을까? 네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서 영주 되는 것보단 넓은 세상을 돌며 견문을 넓히는 게 훨씬 좋을 거 같아."
"너 영주 되고 싶은 거 아니었는가?"
"바하 영주가 날 죽이려고 해서 일부러 여기로 온 거야. 베르크 교구에 마을 설립을 신청해서 바하 영주를 방해하려고. 바하 영주는 힘이 있고 베르크 교구는 거리가 가까워 명분이 있다. 마을을 인질로 잡고 바하 영주와 협상해서 목숨 건지려 했다."
급조한 핑계치고는 꽤 합리적이었다.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꼬였을까?'
뮬리치는 바칸을 진심으로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장애가 한둘이 아니다.
귀족이고 계승권까지 있는 바칸을 죽이는 건 너무 부담이다. 자칫 모든 걸 잃을 수 있다는 걱정에 하찮은 네이치도 지금까지 손 못 쓰고 살려뒀다. 영리하기 그지없는 바칸은 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바칸이 작정하고 도망치면 보나비치도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마나를 수련한 기사지만, 바칸이 목장에서 꽤 긴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면 앞질러서 매복하는 게 어려웠을 것이다.
"존은 어디 있는가?"
보나비치에게 상처를 입힐 정도로 강한 무력을 소유한 존도 있다. 보나비치가 바칸의 무력도 대단하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보나비치에게 잡혀 온 바칸은 뮬리치에게 과소평가 받았다.
대신, 확실하게 실력을 보여준 존에 대한 공포는 꽤 컸다.
"내 다른 수하들이 걱정할까 봐 소식 전하러 갔다. 괜히 또 멋모르고 여길 쳐들어오면 안 되니까."
바칸은 존을 고블린 산으로 보냈다. 뮬리치가 갑자기 멍청해져서 바칸을 죽이려 할 가능성을 최소로 낮추려는 노력이었다.
"이만 나가보도록."
바칸은 어머니 초상화를 들고 서재에서 나갔다. 뮬리치는 집사를 불러 발디에 관한 이야기와 바칸과 나눈 대화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판 뒤집을 수 있을까.'
- 작가의말
저는 초반에 설정을 풀고 판을 벌여놓은 다음 후반에 가면 묘사를 간략하게 하는 버릇이 있더군요. 설정 다 펼쳤으니 이 정도는 말 안 해도 알겠지, 인물 심리를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것보다 읽는 사람이 직접 유추하게 돌려서 표현하자, 뭐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게 별로 안 좋은 버릇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비축분을 계속 수정하고 있습니다. 묘사를 간략하게 하거나 진행이 과하게 빠른 부분을 조절하거든요. 그래서 연참이 어렵습니다. 연참하다가는 부족한 비축분이 그대로 나갈 거 같아서요.열심히 쓰고 고치고 해서 최대한 빨리 연참할 날이 오기를 저도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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