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대체품
비나크 지역을 깨끗이 청소한 존은 바르바리얀 부족과 함께 보나르 영지로 갔다. 파비앙이 이들 접대를 책임졌다.
아틀란티스 공국에서 식비라고 백 골드나 보내줄 땐 영문을 몰랐는데, 이들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추가로 청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미터짜리가 남들 키 클 때 뭐 했냐고 타박받는 무리에 왜소한 인영이 하나 섞였다. 바로 투치의 제자이자 아틀란티스 왕궁 집사인 갭릴이었다.
"난 여기서 아틀란티스 공국의 대표이며 바칸 공왕의 대리인이다. 세 자작은 내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갭릴의 싸늘한 말투에 세 자작은 비협조적이던 태도를 거뒀다.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일부러 자극했는데 상대는 흔들리지 않았다.
어리다고 얕보다간 오히려 자신들이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서로 눈치를 주고받으며 태세를 바꿨다.
"우리도 게르크 교단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러나 종교가 없으면 영지민들이 불안해한다."
게르크까지 완전히 몰아내면 보나르가 헤크 지역과 통합해봤자 겔트를 차지한 아틀란티스엔 어림도 없다.
아틀란티스가 이렇게 빠르게 그리고 적은 희생으로 겔트를 차지할 줄 몰랐던 세 여우는 당황하여 게르크 교단을 완전히 몰아내는 걸 반대했다.
"게르크 교단이 집행관을 보내 공왕을 암살하려 했다. 진실의 심판을 받자는 요청에 게르크 교단은 대응하지 않았다. 아틀란티스 공국은 게르크 교단을 돕고 섬기는 모든 국가와 전쟁할 것이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협박은 기막히게 하네.'
보나르와 헤크는 함께 독립하여 공국이 되기로 합의했다. 공왕은 다미앙에게 주고 보나르의 세 귀족은 헤크 지역에서 영지 하나씩 받는 대신 후작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여기에 게르크 교단까지 힘을 합치면 아틀란티스와 협상할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틀란티스는 게르크 교단을 깨끗이 없애려고 했다.
만약 파비앙 등이 기를 쓰고 게르크를 옹호하면 함께 쓸어버리겠다는 협박을 성인도 안 된 갭릴이 파비앙의 영지인 베르히에서 했다.
아무리 존과 바르바리얀 전사들이 있다고 해도 웬만한 담력으론 뱉기 힘든 말이다.
"게르크를 대신한다고 하긴 뭐하지만, 이게 도움 좀 될 거다."
갭릴이 내놓은 건 가죽으로 감싼 둥그런 공이었다.
"오크 오줌보에 슬라임을 넣은 후 기워 맸다. 겉에 연한 가죽 두 벌과 질긴 가죽 한 벌을 껍질처럼 씌운 것으로 공왕이 직접 축구공이라고 이름 지었다."
갭릴은 의자에서 일어선 다음 공을 뻥 찼다. 공이 시원하게 날아가 벽에 부딪히더니 갈 때와 비슷한 속도로 갭릴에게 돌아왔다. 탄성이 생각 밖으로 훌륭했다.
"이건 축구 경기 규칙이다. 5인 축구랑 7인 축구 그리고 11인 축구가 있다. 축구장 크기와 규칙 등도 상세히 적었다."
"이건 주사기다. 만약 공이 쪼그라들면 썩은 고기를 갈아서 물과 7:3 비율로 섞은 다음, 이 구멍으로 넣어주면 된다. 그러면 공이 다시 통통하게 변할 것이다."
"이게 종교를 대신한다고?"
"이미 아틀란티스에선 대부분이 여기에 빠졌다. 지금 크기와 성질이 다른 공을 계속 개발하고 손으로 하는 공놀이도 연구 중이다. 직접 하는 것도 재밌는데 구경하는 재미 역시 대단하다. 축구가 생긴 후부터 아이나 어른이나 기도 올리는 시간이 1/10 이하로 줄었다."
한참 규칙을 살피던 마르티노가 감탄했다.
"이건 마치 싸움 같구나. 인원 배치와 전략 및 전술이 중요하겠다. 경기 시간을 제한하여 짧은 기간에 상대를 빨리 파악하도록 훈련하는 효과도 있고."
"이게 말처럼 재밌다면 훈련하기 싫어하는 병사들에게 던져주면 알아서 뛰어다니겠군."
"경기 승패를 두고 내기를 벌여도 된다. 이긴 놈한테서 세금을 받으면 누구도 불만이 없겠지."
'공왕 말대로 머리가 돌아가는 자들이다. 남겨두면 후환이 될 거 같은데. 공왕은 왜 이런 자들을 품으려 하는 거지?'
세 자작을 설득한 갭릴은 존 일행에게 제단을 부숴도 된다고 전했다. 게르크 대주교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른 전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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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끄. 소식 들었는가?"
페코 공국의 공왕 헤치꼬의 얼굴은 꽤 어두웠다.
"아틀란티스와 게르크의 전쟁 말인가?"
"그렇다. 게르크가 아틀란티스 공왕을 암살하려 했다고 한다. 아틀란티스가 진실의 심판을 제안했고."
둘은 가까운 이웃이자 무역 관계에 있기에 어린 시절부터 자주 보며 꽤 친분이 깊었다. 겔트 왕국이 망하자마자 바로 페코 공국에 편입한 것도, 군사력이 강한 모로끄를 공왕이 의심 없이 받아준 것도 서로를 믿기 때문이다.
"뭘 걱정하는 거지?"
"두 가지. 게르크가 날 죽이고 페코를 게르크 신성 공국으로 이름 바꾸는 거. 아틀란티스가 게르크 교단 징벌을 주장하며 우릴 공격하는 거."
모로끄는 한참 고민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외통수구나. 황태자가 여기까지 신경 써줄 여유는 없을 텐데."
모로끄와 페코는 카르챠를 통해 황태자에게 뇌물을 보냈다. 페코 공국과 모로끄의 게르 영지가 결합한 걸 공식적으로 인정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게르크와 힘을 합치면 아틀란티스가 명분을 얻게 되고 게르크를 몰아내자니 우리 힘이 게르크 교단보다 약하고."
게르크 교단이 아니어도 아틀란티스는 페코 공국을 공격할 수 있다. 그러나 점령은 어렵다. 플란코나 지르나 겔트 왕국은 먼저 국가를 설립하고 왕실이 제국에 허락받은 경우다.
이들과 달리 페코는 아틀란티스처럼 제국에서 공국으로 독립시켜주고 공왕을 직접 임명했다.
나라를 세우고 제국에 인정받은 것과 제국이 직접 나라 세우는 데 관여한 작은 차이지만, 이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지르가 플란코 왕국의 땅을 점령해도 제국은 관심 두지 않는다. 그러나 페코를 점령하면 제국의 위신에 금이 간다고 여겨 군대를 파견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틀란티스 공왕을 게르크 교단이 암살하려 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틀란티스 공왕은 게르크를 핑계로 페코 왕국을 점령할 수 있다. 게르크 교단을 비호한 페코 공국도 죄인이 되는 셈이다.
제국이 지금처럼 여력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가장 강성한 시기라고 해도 이 일엔 끼어들지 못한다.
"기쁨이 넘쳐야 할 시기에 두 분은 왜 한숨이 깊은가?"
공왕은 신혼으로 얼굴에 빛이 나는 왕세자를 보며 찌푸린 이마를 억지로 폈다.
"아틀란티스와 게르크의 싸움 때문에 걱정하고 있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다."
왕세자의 말에 공왕과 모로끄 후작은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틀란티스랑 대화하면 된다. 그쪽 요구가 뭔지 알아보고 게르크와 아틀란티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간단한 일 아닌가?"
공왕과 후작은 겨우 편 이마를 다시 찌푸렸다.
"겔트 왕국을 침략한 적이다. 손잡을 상대가 아니다."
후작의 말에 공왕도 보탰다.
"야심이 큰 자다. 우리랑 비슷한 크기의 공국인데 벌써 비나크와 겔트를 차지했다. 당장은 몰라도 겔트와 비나크를 안정시킨 후엔 우릴 노릴 것이다."
"두 가지 대책이 있다. 우선 아틀란티스랑 대화하여 합의점을 찾는다. 그리고 부르크가 군대를 파견해 겔트 왕실을 다시 세울 때까지 버틴다. 우리 자금력이라면 겔트 왕실도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공왕과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지르랑 플란코와 힘을 합쳐 카르챠를 몰아내는 것이다. 우린 완전히 아틀란티스 편이 된다. 공국을 보존하면 좋고, 아니어도 영지로나마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다."
"지르랑 플란코와 함께 카르챠를 몰아낸다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지르와 플란코가 사이 나쁘기 때문이다. 둘이 직접 무역하지 않으니 우리가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하며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만약 카르챠가 겔트를 차지하고 지르가 플란코를 먹으면 우리 공국은 일 년도 안 가서 망한다."
공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르와 플란코 사이가 계속 나빠야 페코가 존재할 수 있다.
"아틀란티스가 겔트 자리를 대신하고 지르와 플란코가 그대로라면 우리 공국엔 딱히 달리진 게 없다."
"일이 그렇게 생각대로 풀릴까?"
"하나 확실한 건, 게르크와 함께 죽을 순 없다는 것이다. 게르크가 패배하면 헤크 지역을 떠나 우리 공국으로 올 것이다. 겔트도 어쩌지 못한 게르크 교단이 페코로 온다면 어떻게 될까? 아틀란티스나 게르크 중 누가 이기든 우리 공국은 사라질 것이다."
모로끄 후작이 결단을 내렸다.
"내가 겔트로 가서 아틀란티스와 담판 짓겠다. 포로로 잡힌 왕실 사람 몸값 협상을 핑계로 하면 게르크도 딱히 트집 걸지 못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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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 정말 우릴 안 도울 겁니까?"
"가을 추수가 끝난 후라면 협약대로 도왔다. 지금 원래 협상했던 내용을 어긴 건 게르크 교단임을 잊지 말아라."
제국 출신 귀족, 황실이 직접 명예 후작 작위를 줬고 부르크 신도다. 게르크 교단은 다미앙과 협력하여 부르크를 끌어들였다. 겔트와 미아르와 게르메르의 교단을 전부 양도하며 헤크 지역에 게르크 신성 공국의 설립을 인정받았다.
공왕은 부르크 신도인 다미앙이 하기로 했다. 힘을 길러 미아르와 보나르까지 점령하고 황실이나 부르크 중 누군가가 새로운 제국을 이루기만 기다리면 된다.
부르크가 이기면 대주교가 신성 공왕이 될 것이고, 황실이 이기면 다미앙을 전면에 내세운 후 지배 종교로 남으면 된다.
그런데 아틀란티스는 정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수를 꺼내 들었다. 게르크가 공왕을 암살하려 했다고 발표하는 것까진 예상했으나, 감히 신의 제단을 부술 거라곤 상상한 적도 없었다.
"우리가 이기고 돌아오면 협상 내용을 조금 바꿔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지. 행운을 빈다."
대주교는 수십 명 집행관과 수백 명 신성 전사와 함께 다미앙 영지를 떠났다. 그 뒤엔 게르크가 양성한 병사 2천 명과 자발적으로 따라나선 영주들이 가득했다.
합치면 5천 명은 되는 군대였다.
"거룩한 신의 위엄을 멸시하고 교단 건물을 파괴하고 신의 제단을 부순 아틀란티스의 만행을 성토한다. 거기에 손을 거든 보나르의 세 영주와 비나크의 영주들도 신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보나르와 가까운 곳에 도착한 후 대주교는 연설로 사기를 고취했다.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배덕자들을 응징한다. 신이 저들에게 내린 영지와 모든 영광을 빼앗아 신의 진실한 종들에게 나눠준다. 보나르와 비나크에서 악마의 구름을 걷어내고 신이 다시 비출 수 있게 한다."
멀리 있는 자들에겐 대주교의 말이 들리지 않지만, 분위기에 감염되어 미친듯이 게르크를 외쳤다.
대주교의 연설에 감동한 자들이 멀찌감치 보이는 영지로 돌진했다. 교구도 없는 작은 마을이어서 아틀란티스와 손잡았다고 보기엔 무리지만, 일단 병사들에게 피 맛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 제물로 삼았다.
"대주교. 준비가 미흡하다."
"어제 부르크에서 소식이 왔다. 곧 아틀란티스에 도착할 예정이니 행동하라고. 우리가 실패해도 그쪽이 성공하면 아틀란티스는 곧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비나크와 바하까지 점령하기로 한 건가?"
"베르크의 영주에 성직자였던 네비치가 임명되었다. 바하를 점령한 다음 네비치를 설득하고 비나크 마을까지 점령하면 겔트와 아틀란티스의 연결이 끊어진다."
"부르크가 보나르와 비나크를 우리한테 허락했는가?"
집행관 우두머리의 질문에 대주교는 고개를 저었다.
"보나르까지 허락했다. 바하는 부르크가 갖기로 했다."
- 작가의말
서대륙에 언젠간 바칸컵 축구 경기가 열리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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