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잡으러
대륙 전역에 아틀란티스와 고딕 그리고 펠릭 세 제국의 연합 성명이 발표되었다. 반년 동안 모든 전쟁 및 분쟁을 멈춘다는 말에 사람들이 환호했다.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합니다."
"내 걱정은 마시고 몸 잘 추스르시오. 황후는 홑몸도 아니지 않소."
"꼭 돌아와서 아이 이름을 지어줘야 합니다."
톰슨 역시 한쪽에서 엘리사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두 살 된 톰슨 아들은 사람이 모인 게 기쁜지 깔깔 즐겁게 웃어댔다. 아이 곁에는 덩치가 말보다 큰 푸른 늑대가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로브로 푸른 날개를 감춘 미클은 이미 마차에 올랐다. 존 역시 세 부인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마차에 올랐다.
"동대륙 훔 제국에서 온 자룡이오."
얼굴형이 각지고 특히 턱선이 굵어 무척 강인하게 보였다. 뒤에는 시종으로 보이는 자 넷이 3미터 정도 되는 굵은 창을 들고 있었다.
"아틀란티스 제국의 바칸이오. 만나서 반갑소."
마법사의 마차에는 6명이 탈 수 있었다. 바칸 일행 넷과 자룡 그리고 마법사 한 명이 함께 탔다.
"황제의 몸에서 칠상권의 기운이 느껴지오."
과묵한 인상으로 보였는데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자룡이 가장 먼저 입을 뗐다.
"혹시 자룡 노사는 이 무공에 아는 바가 있으시오?"
"수백 년 전에 사라진 무공이오. 완성도는 조금 부족한 면이 있지만, 살상만 놓고 보면 최강이라고 할 수 있소. 동대륙에서 아무리 찾아도 없었는데 서대륙으로 흘러들었던 모양이오."
"가르침을 바랍니다."
"칠상의 상은 다치게 한다는 뜻이 아니오. 방해한다는 뜻이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일곱 기운은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규정하오. 그걸 벗어나게 하는 게 칠상권이지. 그러나 방금 말했듯이 인간을 존재케 하는 일곱 기운을 건드리는 것이기에 지극히 위험한 무공이오. 천 명이 익혀서 열 명 정도 살아나고 그중에서 수련에 성공하는 자는 한둘이오."
자룡은 칠상권에 관해 자신이 아는 것을 자세히 얘기했다.
"그러니까 동대륙에서 이 일곱 기운을 음양오행이라고 부른다는 말입니까?"
"그렇소. 세상의 모든 기운은 이 일곱 기운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기오. 실상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음양오행으로 해석할 수 없는 기운은 발견되지 않았소."
바칸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이해가 어렵거나 아예 무슨 말인지 모를 구결들이 조금씩 풀려났다. 그리고 잘못 이해한 부분도 천천히 수정되었다.
'나노 항체가 아니었으면 백번도 더 죽었겠다.'
인간의 본질과 관련한 일곱 기운을 다루는 무공이다. 구결을 정확히 이해하고 기운을 다룸에 있어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 한다.
바칸처럼 어설프게 이해하고도 익혀낼 무공이 아니었다.
'음양과 오행을 균형 있게 키운 다음 서로 싸우게 하고, 그 과정을 통해 더 높은 단계로 가는 무공이라. 굉장히 위험한 건데 내가 겁도 없이 저들에게 가르쳤구나.'
톰슨 등이 세븐 브레이크에 입문하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어설픈 바칸의 가르침대로 익혀냈다면 지금쯤 셋 다 썩어서 뼈만 남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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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만 더 시간이 있다면 나랑 비슷한 경지가 될 텐데. 참으로 안타깝소."
바칸은 나노 항체를 믿고 과감히 시도했고 세 번이나 되는 성장을 이뤄냈다. 빠른 성장은 오히려 독이 된다며 자룡이 말렸기에 네 번째 시도는 일 년 뒤로 미뤘다.
"귀한 가르침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딱 하나. 겸손만 잊지 않으면 될 것이오."
일행을 태운 배는 해적섬을 지나 더 북쪽으로 향했다. 근 한 달을 항해하고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화산섬이었다. 주변 모두 얼음과 눈으로 덮였는데 유일하게 검은 땅거죽이 드러나 눈에 확 들어왔다.
"저 화산 안에 드래곤이 있소."
"가는 길이 순탄치 않을 것 같군."
바칸 일행 넷에 자룡 그리고 여덟 명의 마법사가 배에서 내렸다.
"가는 길은 우리가 맡겠습니다. 다섯 분은 드래곤을 만날 때까지 힘을 아끼십시오."
가장 먼저 만난 건 고블린이었다. 가죽 갑옷에 가죽 투구를 쓰고 나무 방패까지 한 고블린이었다. 대륙의 고블린과 달리 손이 인간과 무척 닮았다.
그리고 독침 대신 슬링으로 돌팔매질을 했다. 정예병처럼 줄을 나란히 서서 구령에 맞춰 돌을 던지는 모습은 바칸의 상식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파이어 웜."
유일하게 수염을 기르지 않은 중년 마법사가 나섰다. 주문도 없이 시동어만으로 꽤 어려운 마법을 간단히 펼쳤다.
길이 3미터에 지름은 40세티 정도 되는 불 지렁이 세 마리가 소환되었다. 세 지렁이는 고블린 무리로 파고들어 열기로 이들을 태웠다.
그 뒤로도 고블린 군대를 몇 번 만났다. 작은 무리는 수십 마리이고 큰 무리는 3백 마리 정도 되었다. 이들은 초면인데도 철천지원수라도 본 듯이 악을 쓰며 덤볐다.
"아이스 스네이크."
수염을 짧게 다듬은 늙은 마법사가 길이 1미터 정도 되는 얼음뱀을 가득 소환했다. 얼음뱀은 고블린 사이로 들어가서 펑 소리를 내며 터졌다. 얼음뱀이 터지면서 생겨난 길이 2미터의 고드름들이 고블린의 몸통과 팔다리를 꿰어버렸다.
"아이언 울프."
주먹 세 개 크기의 늑대들이 고블린을 물고 늘어졌다. 덩치는 작은데 힘은 어마어마한지 고블린들은 살이 뜯기고 뼈가 부러졌다.
고블린 무리를 해치우며 가다 보니 오크를 만났다. 이들은 한술 더 떠서 금속 갑옷에 금속 투구로 무장했다. 방패와 무기 역시 금속으로 되었다.
"좀비 박스."
허공에 문 하나 생기더니 좀비를 토해냈다. 좀비들은 땅에 떨어지기 무섭게 으르렁대며 오크에게 덤볐다. 오크들이 힘을 합쳐 무기로 좀비를 해체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몇 조각으로 흩어진 좀비는 '죽지' 않고 계속 꿈틀거렸다.
"패키징."
마법사의 주문에 따라 흩어진 조각들이 모여서 좀비가 되었다. 제멋대로 조합된 바람에 짝다리가 된 좀비들은 몸을 심하게 비틀거리면서도 오크를 향해 열심히 덤볐다.
제대로 된 타격을 못 주고 조각났다가 재조합되는 좀비들을 보면서 존이 조바심을 낼 때, 좀비의 독이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중독된 오크들이 얼굴이 퍼렇게 질리면서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쓰러진 오크의 몸이 빠르게 부패하면서 검푸른 연기를 뿜어냈다. 연기를 흡입한 오크도 연신 쓰러지더니 결국 규모 수백이 되는 오크 무리가 전멸했다.
"대장, 저것도 언데드야?"
"응. 다른 점이라면 마법사는 언데드를 '제작'해. 약물과 주문을 결합하여 가죽 장인이 물건 만드는 것처럼."
"마법사는 정말 대단하구나."
바칸 역시 마법사의 대단함을 실감했다. 그러나 일행과 달리 바칸은 위력보다 효율에 감탄했다.
좀비를 제작하는 데 사용한 시간과 비용은 바칸도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어차피 사라진 좀비는 없으니 좀비를 제작한 수고는 무시해도 될 것 같았다.
좀비 박스라는 마법을 펼치는 데 소모한 마나는 극소량이다. 마법사는 바칸이 브레이크 하트 한 번 펼치는 데 들어가는 마나로 오크 무리를 전멸시켰다.
시간 역시 바칸이 직접 싸우는 것과 비슷하게 들었다. 그러나 오크 규모가 열 배 된다면 바칸의 전투 시간은 열 배가 될 것이지만, 마법사의 전투 시간은 두 배도 안 될 것이다.
"이들은 드래곤을 지키는 가디언인가?"
"가디언의 먹이라는 표현이 적합하오. 진짜는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소."
오크는 고블린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고 밝은 귀와 예민한 코로 일행이 있는 곳을 찾아냈다. 결국, 좀비는 패키징 마법으로 재조합되지 않을 정도로 망가졌다.
"세인트 나이트."
하얀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소환 마법을 펼쳤다. 키는 1미터 정도 되지만, 2미터 이상의 크고 긴 무기를 든 하얀 전사들이 소환되었다.
"코소 버뜨."
놀랍게도 이들은 입을 열어 기도문을 외웠다. 화산이 뿜은 검은 연기로 우중충한 하늘에서 빛줄기가 쏟아졌다. 1미터밖에 안 되던 몸이 3미터로 커졌다.
성스럽고 순결해 보이는 세인트 나이트들이 무기를 휘둘렀다. 오크들이 피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쓰러졌다. 세인트 나이트는 오크의 피를 흡수해 덩치를 키웠다.
"버뜨 마닝."
덩치를 키운 세인트 나이트가 주문과 함께 폭발했다. 폭발음도 없고 폭발에 따른 진동도 없었다. 그저 하얀 빛이 넓게 퍼지면서 오크들이 무더기로 쓰러질 뿐이었다.
쓰러진 오크들이 피를 온몸으로 뿜어냈고, 그 피를 흡수한 세이트 나이트들이 연이어 폭발했다. 쓰러지는 오크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않아 살육은 고요하게 진행되었다.
어느새 수백 마리 규모의 오크가 모조리 사라졌다. 마법사들은 차 한잔 마신 사람처럼 평온한 얼굴로 오크 사체를 밟으며 전진했다.
오크 다음으로 나타난 건 바칸도 모르는 몬스터였다. 몸통과 다리에 비교해 엄청 큰 머리를 갖춘 몬스터는 머리의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입과 백 개가 넘은 날카로운 이빨을 무기로 삼았다.
가끔 이빨을 화살처럼 쏘아내기도 했는데,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푸륵 하렉스."
고대 제국의 언어로 된 시동어와 함께 나무들이 나타났다. 수십 가닥의 뿌리가 발이 되어주고 수십 개 줄기가 손이 되어 몬스터를 공격했다.
뿌리로 얽매고 줄기로 감고 찔렀다. 몬스터들이 이빨로 줄기를 끊고 뿌리를 씹었지만, 나무들은 잘린 줄기와 뿌리를 금세 뽑아냈다.
"이런 놈들이 가디언의 먹이란 말이지?"
"흥분하지 마. 버서커 되면 드래곤이랑 싸울 때 넌 누워있어야 해."
바칸의 말에 존은 황급히 마나 호흡으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푸륵 자바레."
마법사의 주문에 나무들이 뿌리와 줄기를 서로 엮었다. 서로 연결된 나무들이 부르르 떨리더니 한꺼번에 쪼개졌다.
쪼개진 나무의 빈속에서 가시들이 날아가 몬스터 몸에 꽂혔다. 그저 꽂히고 끝나는 게 아니라 꿈틀대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혈관을 찾아낸 가시는 뾰족한 끝을 콱 박은 다음 몸집을 부풀렸다. 몸집을 부풀리며 비어버린 속을 통해 몬스터의 피가 밖으로 줄줄 새 나갔다.
"레드 앤트."
새끼손가락 끝마디 정도 크기의 붉은 개미들이 나타나서 가시관을 통해 몬스터 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불개미들이 살과 신경을 물어뜯자 몬스터들의 버둥질이 거세졌다.
"레드 붐."
붉은 개미들이 터지면서 질기게 숨을 이어가던 몬스터들이 축 늘어졌다.
"우리 혹시 구면인가?"
바칸은 좀비 박스와 레드 앤트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한테 질문했다. 이성은 분명히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알려오지만, 자꾸 머리를 간질이는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 불쾌했다.
"초면일 것이오. 난 30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았소."
마법사의 말은 진실로 들렸다. 톰슨처럼 마음을 읽진 못하지만, 마나 수련이 깊어지면서 상대의 말에 거짓이 섞였는지는 어렴풋이 느껴졌다.
'만난 적 있다. 저 마법사도 나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이럴 땐 톰슨이 생각을 읽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웠다. 톰슨은 존이나 미클의 마음은 잘 읽지만, 남은 사람 마음은 전혀 읽지 못했다. 바칸의 마음은 정령 갑옷의 방해로 바칸이 원할 때만 읽을 수 있었다.
'드래곤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종족의 부활을 사명으로 한 세 번째 드래곤을 죽이지 못하면 인간은 멸망한다.
'그때까지만 마법사들과 손잡는다.'
뭔가 꿍꿍이를 숨긴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떠한 단서도 없지만, 바칸은 자기 느낌을 믿기로 했다.
- 작가의말
역시 마법이 나오니까 전투 묘사가 쉽습니다. 주먹이나 무기 쓰는 건 제가 경험이 없지만, 마법엔 꽤 소질을 보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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