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섬
해적 수천 명이 득실대는 섬에서 바칸의 처지는 나쁘지 않았다. 벨크가 음식과 물을 챙겨줘서 사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벨크는 바칸을 무리에 넣고 싶어 했지만, 대부분 부하가 반대했다. 능력이 출중한 바칸이 무리에 들어오면 큰 몫을 가져갈 게 뻔하다. 그러면 남은 해적들 몫이 줄어든다. 벨크는 부하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바칸을 영입하진 않았다.
그래서 바칸은 손님 신분으로 벨크 영역에 가까운 작은 동굴에서 혼자 지내야 했다.
"까막눈. 앉아서도 자?"
바칸은 수련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물기운만 센 곳이어서 가뜩이나 수련 효과가 별론데 벨크가 툭하면 찾아와 귀찮게 굴었다.
"까막눈은 글 모르는 사람 부르는 말이야. 난 까만 눈이지 까막눈이 아니야."
"다들 널 까막눈이라고 불러. 곧 까막눈이 네 이름 될 거야."
바칸은 벨크의 멍든 얼굴을 보고 이유를 짐작했다. 다른 사람한테는 함부로 해적왕 욕을 못 하겠으니 바칸을 찾아온 거였다.
"또 맞았어?"
"제길. 푸른 상어 지느러미를 바치라고 해서 한마디 했더니 사람을 이 지경으로 패더라고."
"푸른 상어 지느러미는 독이 있는데?"
"그래? 그런데 왜 자꾸 바치라는 거야? 먹을 것도 아니면서."
바칸은 벨크와 함께 약 반 시간 동안 해적왕을 욕했다.
음식이야 바칸 힘으로도 구할 수 있지만, 물은 해적왕이 꽉 잡고 있다. 가뭄 때문에 샘물이 줄어들어서 물 통제가 예전보다 훨씬 심해졌다.
벨크는 해적왕에게 상납금을 꼬박꼬박 바치는 대가로 매일 물 두 통씩 안정적으로 얻어냈다. 가뭄으로 비도 내리지 않기에 마실 물 넉넉히 얻으려면 벨크 비위를 맞춰야 한다.
"까막눈. 방법이 없을까? 푸른 상어 지느러미 얻어오면 물 다섯 통 준다고 했거든."
벨크가 바칸에게 물줄이라면 바칸은 벨크에게 바다의 요정이었다. 붉은 앵무고기를 잡아서 해적왕의 분노를 가라앉힌 후부터 벨크는 풀리지 않는 일이 생길 때마다 바칸을 찾았다.
"푸른 상어는 낚시로밖에 못 잡아. 깊이 60미터 되는 곳에 살아서 그물질로는 어려워."
"낚싯줄 60미터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상어 힘도 못 버틸 거고."
"독 쓰면 돼."
바칸은 물고기 대가리 안에 복어를 숨겨 미끼로 쓸 것을 제안했다.
상어는 머리가 총명해 물고기 머리만 있으면 신중하게 냄새를 맡아 먹어도 되는지 판단한다. 그러나 푸른 상어는 다른 사촌들보다 물고기 대가리에 대한 집착이 심하여 고민 없이 통째로 삼켜버릴 것이다.
"물고기 통째로 달면 다른 상어들이 먹어 치우니까 대가리만 달라는 말이지?"
벨크는 바칸이 한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복어 독에 마비되면 버둥질도 못 할 테니 낚싯줄이 든든하지 않아도 되고."
"좋았어. 네 안전은 내가 보장할 테니 다른 무리하고는 말도 섞지 마. 알았지?"
벨크는 바칸에게 신신당부하고 떠났다. 바칸 덕분에 하는 일마다 술술 풀려서 목표에 빠르게 가까워졌다. 해적왕은 개인 무력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기에 벨크는 이인자 자리가 목표였고 바칸 덕분에 차근차근 이뤄가고 있었다.
그런 바칸을 다른 해적 무리가 영입할까 봐 걱정이었다.
바칸은 흥분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떠나는 벨크 뒷모습을 보니 헛웃음만 나왔다.
'똑똑한 놈이 멍청한 척 연기하느라 고생이 많다.'
바칸은 하루도 쉬지 않고 정보를 수집했다. 해적왕에 관해선 다들 입에 올리기 주저하지만, 벨크를 비롯한 네임드 해적들 정보는 꽤 알아냈다.
벨크는 해적들 사이에서 멍청이로 알려졌다.
바칸 생각에 벨크는 굉장히 똑똑한 놈이었다. 일부러 죽지 않을 정도로 개겨서 해적왕한테 얻어맞는 것으로 다른 해적 두목의 경계심을 낮췄다. 연기를 어찌나 실감 나게 잘했는지 야금야금 세력을 넓혀 이인자 자리에 가까워졌는데도 여전히 느슨한 견제를 받았다.
'푸른 상어 지느러미에 독이 있다는 걸 알려줬으니 해적왕을 해치울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겠구나.'
해적왕을 보면 미친개가 떠오른다. 가끔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때리고 죽인다. 섬 여기저기 쏘다니기도 좋아해서 언제 물릴지 모른다.
그런 미친개가 보나비치보다 강하다. 마나만 있으면 바칸도 해볼 만하지만, 새로 쌓은 마나는 너무 적고 오우거와 싸우다가 굳은 마나는 그대로였다.
바칸의 목표는 10월까지 조용히 있다가 약탈 나가는 해적선에 타고 마르카다 혹은 블라우크로 가는 것이다. 이 목표에 가장 큰 변수는 쏘다니기 좋아하는 미친개였다.
야심꾼 벨크가 미친개를 매달아주면 참 고마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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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신발 내놔."
사람들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때는 오후 1시부터 3시 사이로 해적왕이 낮잠 자는 시간이다.
해적섬에서도 반기지 않는 흉악한 놈들만 모인 곳이지만, 해적왕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바칸 역시 이 시간대에 돌아다니며 입 싼 해적들에게 10월에 어디로 약탈하러 갈지 탐문했다. 표면적으론 벨크의 지시로 다른 해적 무리의 동태를 살피는 것이지만, 실상은 어느 해적선을 타야 하는지 알아보는 작업이었다.
"나한테 한 말이야?"
바칸은 하체보다 상체가 거대한 해적에게 담담한 말투로 대꾸했다. 바칸의 가죽 신발은 허름한 옷에 비해 확실히 튀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별문제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상대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결투다."
여기엔 시비를 가려줄 영주도 없고 교단도 없다. 분쟁을 해결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은 결투다.
물론, 섬 주인을 자처하는 해적왕이 가끔 나서서 분쟁에 개입하기도 하는데 그건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크게 키우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신발 하나에 목숨 걸겠다고?"
바칸은 자신이 잘못 판단했나 싶었다.
결투를 먼저 제안한 쪽은 지면 죽는다. 결투 상대가 자비를 베풀어도 다른 해적이 살려두지 않는다. 무분별하게 결투하는 걸 막으려고 해적왕이 세운 법이다.
다른 목적이 있다면 바칸에게 결투를 신청할 리 없다.
"비실비실하게 생긴 놈이 큰소리는."
바칸에게 시비를 건 해적은 품에서 물고기 뼈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주변에 있던 해적들이 알아서 일정 거리로 물러나 싸울 자리를 만들어줬다.
"무기 가지러 갈 시간 주겠다."
결투 상대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필요 없다."
바칸은 복잡하던 머리를 비웠다. 지금 중요한 건 상대를 죽여 결투에서 이기는 것이다.
시비를 건 해적은 휜 칼을 왼손에 들었고 오른손은 주먹을 쥐었다. 상체만 발달한 걸 보면 배에서 노 젓는 놈이다. 상대적으로 부실한 하체를 잘 공략하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투는 심판도 없고 시작을 불러주는 사람도 없다. 규칙도 없고 시간제한도 없다. 시비를 건 해적이 오른 주먹을 휘두르면서 멋없이 시작됐다.
바칸은 해적이 주먹을 휘두르자마자 오른쪽으로 피했다. 바칸이 있던 자리에 석회 가루가 확 퍼졌다.
해적은 싸움 경험이 풍부한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왼손을 휘둘렀다. 오른손잡이인지 휘두르는 속도나 정확도 모두 부족했다.
바칸은 해적의 왼손 공격을 주저앉는 방식으로 피했다. 헛방을 친 해적은 급히 왼손의 칼을 오른손으로 넘겼다. 칼 넘기느라고 목·가슴·명치를 비롯해 때릴 곳이 여럿 노출되었지만, 바칸은 참았다. 맨손으로 상대를 쉽게 죽이면 해적왕은 물론 네임드 해적들의 주의를 끈다. 조용히 있다가 아틀란티스로 돌아가려면 실력을 숨겨야 한다.
해적은 오른팔을 뒤로 한껏 제쳤다. 주저앉은 바칸이 일어나는 타이밍을 노려 목을 베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칸의 움직임은 해적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오른팔이 미처 휘둘러지기 전에 바칸은 해적 허리를 잡고 강한 힘으로 밀었다.
바칸이 미는 힘에 해적은 칼도 못 휘두르고 연신 뒷걸음질만 치다가 발이 꼬여서 뒤로 쿵 넘어졌다.
함께 넘어진 바칸은 바로 일어나며 휜 칼을 빼앗아 숨통을 벴다. 목이 베인 해적은 발버둥도 못 치고 즉사했다.
환호와 욕설이 터졌다. 구경꾼들은 시시하게 끝난 결투에 불만이 많았다. 바칸은 주변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결투 상대의 바지와 적삼을 벗겼다.
"감히 내 사람을 죽여?"
열이 넘은 해적이 바칸을 둘러쌌다. 바칸은 자신을 둘러싼 놈들을 알은체도 하지 않고 죽은 해적의 바지와 적삼으로 갈아입는 데 열중했다.
구경꾼들이 개인 결투에 끼어드는 해적들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나 팔 하나 남은 해적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불만 있는 놈은 나랑 결투하자. 그게 아니면 다 꺼져."
구경하던 자들이 구시렁거리며 물러났다. 바칸은 원래 입었던 바지를 찢어 허리를 동여맸다. 바지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적삼은 바칸에게 너무 컸다.
"네가 저 멍청이 발을 밟아 넘어뜨리는 걸 봤다. 돌멩이에 뒤통수 깨져서 죽었다."
"그랬어?"
바칸 역시 해적과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목을 베이고도 전혀 경련이 없었다. 이미 죽은 거지."
공식적으로 해적섬 이인자인 외팔이 훼이크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뭘 원하는데?"
"멍청이 애꾸를 설득해 줘. 힘을 합쳐 미친개 잡아야 해."
바칸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가까이에 사람이 없었고 훼이크의 수하들이 둘을 둘러싸서 시야까지 차단했다.
"직접 해. 나 벨크랑 그렇게 친하지 않아."
훼이크는 하나밖에 없는 팔로 머리를 긁적였다. 애꾸눈 벨크는 입 함부로 놀리는 멍청이다. 사흘이 멀다 하게 말실수로 해적왕에게 두둘겨 맞는 놈이다. 자신이나 부하가 직접 나섰다가 벨크가 말실수라도 하면 훼이크 무리는 죽은 목숨이다.
반란 획책이 탄로 나도 우길 수 있도록 반드시 제삼자를 통해야 한다.
"성공하면 황금 열 근 주겠다."
"황금 열 근? 네가?"
"이 섬엔 금광이 있다. 여기 음식이랑 옷이랑 다 황금으로 산 거지."
섬에는 해적이 수천 명 사는데도 먹거리가 풍족하고 옷이나 무기 역시 넉넉했다. 바칸은 이들이 약탈로 얻은 물건인 줄 알았는데, 금광에서 캔 금을 팔아 얻은 물건이었다.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미친개가 낮잠 잔다고 알려졌지? 사실 금광 순시하러 가는 거야."
해적왕은 금을 팔아 산 물건을 해적들에게 비싸게 팔아 재물을 모았고 샘은 제멋대로인 해적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왕이 되려는 건가?"
"그래. 금광이 마를 때까지 여기서 사람과 무기를 모은 다음 비크라로 돌아가 왕이 될 생각이야."
비크라는 제국이나 왕국이 해적섬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섬의 정식 명칭이다.
"벨크는 뭐로 설득하지?"
훼이크의 제안을 거절하는 건 의미 없다. 상대는 작정하고 판을 짰다. 거절하면 당장 바칸을 죽여 입막음할 가능성이 크다.
어차피 휘말린 김에 차라리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태를 이끌어야 한다.
"해적왕 자리를 준다고 해. 대신 금광 지분은 나랑 반반 나눠야 할 거야. 샘은 벨크가 통제하는 대신 나랑 내 부하들 물은 공짜여야 해."
바칸은 훼이크에게 벨크를 꼭 설득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바칸의 생각은 벨크를 어떻게 설득할지가 아니라 금광에 꽂혔다.
'금광이면 금속 기운이 강할 것이고 광석을 녹여서 금을 얻어내야 하니 불기운도 있을 거야. 여기보단 땅 기운도 강할 테니 나무 기운만 빼면 다 있는 셈이다.'
재수 없게 해적왕을 마주쳐도 살아남으려면 어서 마나를 모아야 한다.
- 작가의말
해적 이야기의 꽃은 보물 탐험과 선상 반란이죠. 그러나 너무 구태가 의연하다는 생각에 보물을 금광으로 바꾸고 배를 섬으로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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