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원한
2천톤급 2척과 천톤급 1척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다가 북상 해류를 탔다. 해류를 따라 며칠 가다 보니 얼음섬에 찰싹 달라붙은 보트 한 척이 눈에 띄었다.
"바르카사, 위 오르혼, 위 오르혼."
오르혼이 보트에 있는 바르카사를 향해 소리 질렀다. 바르카사는 오르혼과 바칸의 모습을 확인하고 손을 크게 흔들었다.
2천톤급 두 대는 깊은 바다에 세워두고 바칸은 천톤급 배를 몰아 해변으로 향했다. 밧줄을 던지니 먼저 해변에 오른 바르카사가 받아서 커다란 바위에 동여맸다.
"바르카사, 이젠 나보다 더 크구나."
안 본 지 반년도 안 되었는데 바르카사는 바칸의 키를 추월했다. 그러나 포동포동한 얼굴엔 여전히 귀여움이 남아있었다.
선원과 병사들이 배에 실은 물건을 내렸다. 바르킹이나 마르카와 같은 어른들도 쓸 수 있는 모자와 장갑 그리고 신발이 있었고 술이 있었다.
존도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고 무거운 양날 도끼 5개 있었다. 드워프가 만든 거여서 균형도 잘 잡히고 든든하기도 했다.
뾰족한 뿔이 달려 공격으로도 쓸 수 있는 커다란 금속 방패도 2개 가져왔다. 카쿠와 쥐고기도 물론 가득했다.
그리고 얼음을 담을 커다란 나무통도 배에 수십 개 놨다.
바르카사와 함께 얼음을 까던 아이가 어느새 달려가 어른을 불러왔다. 배의 짐을 거의 내려놓을 즈음 어른들이 나타났다.
"바르킹, 마르카, 고우하사."
"고우하사, 바칸."
바칸은 다른 덩치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부족 전체를 통틀어 이름이 있는 사람은 오르혼까지 넷뿐이다. 오르혼은 마르카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아이를 부르는 호칭이다.
그래서 다른 덩치들에겐 그저 고우하사만 반복했다.
"바르킹, 선물이다. 그리고 너희한테 주는 배다."
덩치들이 털모자와 장갑을 쓰고 기뻐했다. 바칸은 이들에게 신발 신는 법을 가르쳐줬다. 아무리 힘써도 안 들어가던 발이 가죽끈을 풀자마자 쏙 들어가는 걸 보고 덩치들이 탄성을 거듭 질렀다.
바칸은 일곱 호위와 갭릴까지 데리고 함께 갔다. 혹시나 축제를 열면 겉 고기를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존이 없으니 양으로 대처하기로 했다.
"바칸, 선물이다."
가는 길에 몇 달 동안 바르 부족이 벤 나무들이 누워있었다. 바칸은 자신이 바르 부족을 오판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천 그루가 넘은 나무들이 땅에 곱게 누워서 바칸이 데려가기만 기다렸다. 바칸이 준 수많은 선물에 감사한 마음을 품은 바르 부족은 전력을 다해 나무를 쓰러뜨렸다.
'이걸 어떻게 다 가져가지?'
주는 선물은 반드시 받아야 한다. 해적섬 북부의 전통이고 풍습이다.
"왜 사람이 이렇게 많아?"
다시 찾은 바르 부족의 동굴은 그새 더 넓어졌다. 그리고 사람이 원래 3배 정도는 되었다. 태양의 눈물을 갖고 바후 부족을 찾아가 아이를 만들어온다고 했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많은 건 이해되었다.
그런데 존만큼 큰 덩치도 수십 명 늘었다. 바칸이 넉넉하다고 가져온 모자 등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부족 두 개 합쳤다. 바칸 선물 덕분이다."
이들은 얼음섬과 카쿠 그리고 태양의 눈물로 부족 2개나 흡수했다. 이들은 장래를 위해 쌓아놓고 산다는 법이 없었다. 모든 게 넉넉해지자 어려운 부족을 흡수해 덩치를 불렸다.
'무작정 돕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구나. 무기나 옷만 지원하고 음식은 자제해야겠다.'
연료가 필요할 때 이들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는데 이들의 무절제한 생활 방식 때문에 돕는 일도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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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칸은 배에 커다란 가죽을 잔뜩 싣고 광석으로 의심되는 돌멩이 몇 종류 실었다. 그리고 배 뒤에는 밧줄로 70미터 길이의 나무 몇 그루 매달았다.
힘겹게 노를 저어 동쪽으로 가다가 해류를 타고나서야 한 숨 돌렸다.
해류가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 때 노를 열심히 저어 다른 해류를 탔다. 영지 근처까지 해류로 편하게 간 다음 힘껏 노를 저어 항구에 들어갔다.
"영주, 우리 배가 압류당했다."
"압류?"
"그렇다. 바하에서 세금을 이유로 우리 배를 항구에 쇠사슬로 묶어놨다."
바칸은 짐을 부리는 인부들의 모습을 한참 쳐다보다가 질문했다.
"바하 영주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가?"
"요새 북쪽 바다의 상인들이 바하보단 우리 쪽으로 더 많이 온다. 우리 배가 영지까지 공짜로 데려다줘서 소규모 상단도 바하에서 우리 배를 타고 이쪽으로 온다. 내 생각엔 내년이면 바하 교역량의 8할을 우리가 빼앗아 올 것 같다."
카쿠 때문에 영지 전체가 정신없는 사이에 비나크 지역에 아틀란티스의 소문이 퍼졌다. 바칸과 다미앙이 동쪽으로 떠난 후 상단이 대규모로 몰려왔다. 제국의 유능한 인재들은 영지에 필요한 가죽과 천과 식량을 비롯한 물품의 판매세를 면제하는 강수를 뒀다.
아틀란티스 영지에 품질이 좋고 가격이 싼 가죽 제품이 많다는 소문까지 퍼지며 소규모 상단들이 공짜 배를 타고 아틀란티스로 향했다.
"우린 바하에서 어떤 상행위도 없었던 거지?"
"상행위 여부는 상관이 없다. 압류당한 배는 영지 소유다. 영지는 상단의 상행위에 책임질 필요가 없다."
제국 출신의 유능한 관리는 다미앙의 상단을 영지 상단과 동일시하는 바칸을 일깨워줬다. 엄밀히 말하면 배는 영지 소유고 다미앙의 상단은 영지와 거래 관계의 상단일 뿐이다. 다미앙이 세금을 떼먹었다고 해도 바칸의 배를 압류할 어떠한 근거도 되지 못한다.
"그래.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면 멍청이지. 묵은 원한도 털어낼 때가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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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톤급 배 두 척이 바하의 부두로 향했다. 2백톤급이나 5백톤급은 드물지 않고 천톤급도 가끔 볼 수 있는 바하다. 그러나 2천톤급의 출현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먼저 부두에 정박한 배에서 금속 방패와 제국식 검을 든 병사들이 줄지어 내렸다. 가죽 갑옷에 투구까지 풀세트로 입은 정예로 보이는 병사였다.
배 구경하러 몰려들던 구경꾼들이 재빨리 도망쳤고 바하 마을은 종소리가 울리며 난리가 났다.
약 2백 명 정도 내렸을 때, 멀리서 구경하던 자들은 끝이려니 했다. 그런데 선창에서 금속 방패와 검을 든 병사들이 계속 나왔다.
5백 명 병사가 다 내리고 나서 배가 강으로 돌아갔다. 남은 배가 항구에 붙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금속 방패와 도끼를 든 병사들이 배에서 내렸다. 검을 든 자들과 마찬가지로 5백 명이었다.
금속 투구에 금속 갑옷 상·하의를 챙겨입고 신발마저 금속 군화로 신은 존이 낭아봉을 어깨에 메고 앞장섰다. 투구와 갑옷만 입은 바칸이 존 뒤를 따랐다.
천 명 병사들이 줄을 지어 둘의 뒤를 따랐다.
"멈춰라. 더 다가오면 공격하겠다."
"공격하면 반격하겠다."
존이 큰소리로 외쳤다. 목책 위에서 멈추라고 외치던 자는 말문이 막혔다.
"바하 영주가 본 영지의 배를 아무 이유도 없이 압류한 사실에 관해 항의하러 왔다. 그리고 배의 운항이 멈췄던 동안 본 영지가 받은 경제적 피해와 선원들의 피해도 보상받겠다. 어서 문을 열고 우리를 영주성으로 안내해라."
"영주한테 통보하겠다."
걸음 빠른 자가 영주성으로 상황을 보고하러 달려갔다.
"배가 든든해야 잘 싸울 수 있다. 제자리에서 취식!"
"제자리에서 취식!"
천 명의 병사가 바칸의 명령을 복창한 뒤 짐에서 음식을 꺼내 먹었다. 주먹밥 하나에 삶은 떡 하나 그리고 고기 네 덩이였다.
목책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자들이 침을 꼴깍 넘겼다.
잠시 후 바하 영주와 교단의 주교 그리고 성직자들이 마차를 타고 달려왔다. 바하 영주는 바칸 얼굴을 알아보고 이를 갈았다.
"선전포고도 없이 병사를 끌고 와서 뭐 하자는 짓이야!"
"그럼 지금 선전포고할까? 나 귀족인데."
바하 영주는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바칸 영주. 이런 식으로 나오면 교단의 저항을 받을 것입니다."
"교단도 내 저항을 받을 것이야. 이런 식으로 나오면 말이지."
"말씀이 과합니다. 조금 진정하시기 바랍니다."
"교단 법정을 열어 시비를 가릴까? 바하 영주, 영지 걸고 법정 한 번 열어볼까?"
바하 영주는 입을 꾹 다물고 눈알만 굴렸다. 베르크 자작이 유사시 돕겠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형세를 보면 뮬리치가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바칸 영주. 지금 사안은 교단 법정을 열 정도가 아닙니다."
"북부 해적을 사주하여 귀족이며 영주인 자를 죽이려 했고 그 마을을 빼앗아 무단으로 점유한 사실 정도면 교단 법정 열어도 되겠지? 너희가 열기 싫다면 비나크나 수도에 가서 열어도 되는데. 괜찮겠어? 모조리 화형대에 올라가고 싶어?"
바하 영주는 용케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바하 교구의 주교는 바칸과 바하 영주의 표정을 엇갈아 살피며 머리를 굴렸다. 힘도 명분도 상대에게 있어 도무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영주, 합의 보는 게 좋겠습니다."
주교의 귓속말에 바하 영주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원래 계획대로 마을 영주를 다미앙으로 하지 않고 자신으로 한 게 후회되었다. 마을 하나 더 만들어서 대영주 소리를 듣고 싶었던 자신이 너무 미웠다.
"좋다. 협상 부탁한다."
바하 영주는 무능하진 않았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바하를 잘 경영했고 비나크 공작의 영향력도 많이 떨쳐냈다.
그러나 물려받은 힘을 잘 써먹은 것뿐이다. 자신이 갖춘 힘을 초월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얼간이가 되었다.
"해적을 사주하여 죽이려 한 죄, 2천 골드다."
주교는 바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아마 제단에 기도문을 외워 신의 판정을 받아도 2천 골드 정도가 나올 것이다. 상대는 힘만 믿고 날뛰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불법적으로 빼앗은 마을, 3천 골드에 넘기겠다. 내 자비에 감사하라."
주교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감정을 제치고 사안만 놓고 판단해보면, 그간 잘 키운 마을을 그냥 뺏어가지 않은 건 정말 큰 자비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내 영지의 배를 압류한 죄 2백 골드다."
"세금을 안 냈다."
"언제부터 영주가 자신과 거래하는 상단의 세금까지 책임져야 했지? 배는 영지 소유고 내 영지에는 상단이 없다. 바하에서 장사하던 상단이 내 영지에서 죄를 범하면 그때 네게 선전포고 해도 되는 것이냐?"
바하 영주는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알아챘다. 바칸 역시 영지 관리가 아니었으면 이 부분은 그냥 지나칠 뻔했다.
"체포한 내 영지민을 전부 석방하고 1골드씩 배상해라. 다친 자가 있으면 치료비도 대야 할 것이고, 혹시라도 죽은 자가 있다면 각오해라. 전쟁이다."
바하 영주로선 참 다행스럽게 죽은 사람은 없었다.
"금화만 받겠다. 물건이나 어음은 거절한다. 모든 배상금을 받을 때까지 여길 떠나지 않겠다."
바하 영주는 마차를 타고 돌아가서 금화를 준비했다. 마침 세금도 많이 들어오고 가죽과 쌀을 팔아서 현금이 많은 시기였다. 바하 영주는 일부 귀물을 상인 조합에 급히 처분하여 배상금을 전부 마련했다.
"이래서 평민들이란. 공작이 평민 영주를 멀리하라고 한 이유가 있었어.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꼴 하고는."
바칸의 병사들은 제국의 승전가를 부르며 항구로 돌아갔다. 천 명의 병사를 모두 태운 배는 강물을 타고 북쪽의 차가운 바다로 떠났다.
'뮬리치가 비나크 공작과 손잡을지 평민 영주들과 손잡을지에 따라 달라지겠지.'
바칸은 비나크 지역을 흔들기로 마음먹었다.
- 작가의말
게임 소설 꿈나비 연재 때와 마찬가지로 글 쓰는 저는 즐겁습니다. 읽는 분들도 즐거우셔야 하는데.
지금까지 저는 글쟁이도 아니고 독자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광풍살 전까지는 독자 지분이 더 많았고 이젠 글쟁이 지분이 좀 더 많은 듯합니다.이 상태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약 한 달 전부터 들었습니다. 제 글을 찾아 읽어주시는 분들한테 자랑스러운 글쟁이가 되고 싶습니다.
보은하는 마음으로 약 모으고 있습니다. 11번째 글은 11번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퀄리티로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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