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은 언제나 옳다
구름꽃은 사시장철 따뜻한 남대륙에선 1월에 싹을 틔우고 5월 말에 꽃을 피운다. 바칸 영지에선 가장 뜨거운 8월 정도에 꽃을 피울 가능성이 크다.
"잘 보관했다가 다음 해 4월에 심어야 해."
지금 심으면 꽃도 못 피우고 겨울에 얼어 죽을 가능성이 크다.
카쿠는 지금이 딱 철이다.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6월부터 서늘해지는 10월까지 경작할 수 있는데, 7월과 8월 기온이 카쿠의 성장에 가장 알맞다.
"이거 보름이면 다 자라."
게다가 성장주기가 짧아 5개월이면 10번 수확할 수 있다.
"대장, 남대륙은 어떤 곳이야?"
남대륙은 사시장철 따뜻하니 겨울 날 준비가 필요 없다. 겔트 왕국에선 얼어 죽지 않으려고 가을 추수가 끝난 다음 장작 마련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게다가 땅만 파도 카쿠 열매가 주렁주렁하니 애써 농사지을 필요도 없다. 일 년 내내 카쿠만 먹는 것도 힘든 일이어서 농사를 짓긴 하지만, 농사에 목숨 걸 정도로 절박하진 않다.
몬스터만 없다면 남대륙은 그야말로 천국이다.
"우리도 남대륙 가서 살면 좋지 않아?"
바칸의 설명에 존이 질문했다.
"남대륙은 왕국이 없어. 영주도 없고."
"왜?"
존은 당연하고 톰슨과 미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대륙은 먹을 게 많아. 굳이 마을이나 왕국이라는 형태로 뭉치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어. 모든 건 필요하니까 생기는 거야. 비나크 지역만 봐도 사람이 뭉치지 않으면 먹을 게 부족해 굶어 죽든 겨울에 얼어 죽든 몬스터 습격에 먹이가 되든 했을 거야. 그리고 국가로 뭉치지 않았으면 맨날 야만족에게 약탈당했겠지. 다른 왕국이나 제국에게 당하든지."
"남대륙도 몬스터 있잖아."
"사람 말고도 먹을 게 많아. 괜히 마을 만든다고 모여 살지 않으면 몬스터도 굳이 사람을 먹지 않아. 소나 양 그리고 말처럼 무리를 지어 사는 놈을 사냥하는 게 훨씬 편하니까."
"사람을 모아 왕국 세우고 몬스터 몰아내면 더 살기 좋지 않아?"
"대부분 사람은 그저 배부르게 살면 돼. 왕국이 있든 없든 달라지는 게 없다면 왜 목숨 걸고 싸워야 하지?"
"그래서 다음 달부터 먹여주는 거 그만두고 돈 주는 거야?"
8월부턴 일하는 대가로 월급을 준다. 영지민은 그 월급으로 음식을 사 먹고 옷과 신발 등을 사 입어야 한다. 반년에 한 번씩 옷 2벌과 신발 하나 주는 것도 노예 8천 명 생기는 바람에 취소했다.
"내년부터 방값도 받을 거야. 놀고먹어도 되는 환경에선 대부분 놀고먹어."
카쿠는 바칸과 존과 톰슨 그리고 미클 넷이 직접 심었다. 이미 개간한 땅 중에서 흙색이 다른 세 곳을 골라 1/3씩 심었다. 어느 땅에서 가장 잘 자라는지 확인하고 카쿠 밭을 정하려는 거다.
어차피 아무 땅에서나 잘 자라지만, 남대륙처럼 풍족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열매가 많이 그리고 크게 달리는 땅에 심어야 한다.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미클이 책임지고 진행해. 각 토양에서 나온 열매 특징을 적어둬. 어느 토양에서 키운 게 열매가 많은지. 어느 토양에서 키운 게 열매가 큰지. 어느 토양에서 싹을 틔울 눈이 가장 많이 나왔는지. 열매에서 나온 눈은 삼등분하여 서로 교차해 심어. 여기서 나온 걸 저쪽 땅에도 심어보고 저쪽 땅에서 나온 걸 이쪽에도 심어보고. 그 모든 결과를 문자로 기록해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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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칸은 호위 일곱과 존을 데리고 배에 탔다. 첫 목적지는 바하였다.
"다미앙. 쓸 만한 사람 좀 소개해 줘. 그리고 바하 사업 다 정리해. 네게 중요한 일 맡길 거야."
공작의 수작 때문에 바칸의 구상이 전부 깨졌다.
"바하는 완전히 버리라고? 여기 수익도 만만치 않아."
"다미앙. 드워프 장신구만 해도 바하 수익을 넘을 거야. 그리고 상인 조합장 자리 줄게. 영지에서 하는 여러 가지 거래를 누구한테 맡길지 정할 수 있는 권한을 너한테 줄 거야."
다미앙이 아틀란티스 영지의 실세가 될 훌륭한 기회다.
"좀 더 고민해 보자. 너무 급작스러워서."
바칸은 다미앙의 대답을 오래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저 밖에 아이들 보이지? 전부 마나 수련법 익혔어. 존도 마찬가지고."
다미앙은 놀란 눈으로 밖에 있는 일곱 아이와 존을 바라봤다. 존은 아이 일곱을 한쪽 팔에 매달고 버티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저 중 한 명만 성공해도 비나크 지역에선 두려울 게 없어. 둘이 성공하면 어떨까? 너도 제국 기사의 위력을 알잖아."
"네가 간단한 놈은 아니란 걸 알았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다미앙은 드워프 장신구 하나 보고 바칸에게 투자를 결심했다. 금전적으로 손해 볼 일이 없고 다미앙만 잘하면 인맥을 확장해 더 큰 사업 할 수 있다.
그런데 바칸은 훨씬 큰 걸 보고 있었다.
"아틀란티스는 인구 10만의 대도시로 만들 계획이다. 야만족에게 잘 만든 옷과 신발을 주고 가죽이랑 뿔과 발톱 등을 받아올 생각이다. 키울 가축도 받아오고. 해적섬에도 따뜻한 옷과 무기를 팔고 희귀 광석이랑 진귀한 가죽 그리고 몬스터 부산물을 얻을 거다."
"그걸 아틀란티스에서 가공해 비싼 값으로 팔겠다는 거지?"
"당장은 아틀란티스 말고 바하에 가져다 팔 생각이다. 비나크 공작이랑 베르크 자작이 애 좀 타겠지."
"바하에서 교역하는 거로 왕실과 공작을 자극하겠다는 거지?"
"몸값 불려야 필요한 물건 쉽게 얻어내고 견제도 덜 받지. 식량을 비롯해 외부 의존도가 너무 높아서 노예 일은 저항도 못 하고 그냥 당했어. 계속 그런 식으로 끌려다닐 순 없잖아. 주도권을 가져와야지."
"나한테 맡기겠다는 일은 뭐야?"
"헤크 지역에 가서 쌀을 대량으로 사 와."
바칸은 바퀴 하나짜리 작은 수레를 가리켰다.
"이건 드워프가 만든 손수레야. 길이 안 닦인 헤크 지역에서 요긴하게 쓰일 거야. 가죽으로 만든 옷과 신발 그리고 무기도 줄 테니 식량을 최대한 사들여."
헤크는 겔트의 두 번째 곡창으로 불리는 곳이다.
"좋아. 네 말에 따르지."
다미앙은 바하의 사업을 친구들에게 전부 넘기고 헤크 지역의 쌀을 아틀란티스로 가져가는 일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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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칸의 두 번째 목적지는 비나크 마을이었다. 바칸은 존과 호위를 밖에 두고 혼자 비나크 교구를 찾았다. 금화 다섯 개를 헌금하는 거로 주교를 끌어냈다.
"아틀란티스 영주 바칸입니다. 신을 가까이 모시는 신실한 분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과일주 조금 얻어 마셔도 되겠습니까?"
"신의 말씀 한 조각이라도 듣기 위해 발버둥질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영주께서 귀한 발걸음 해주셨으니 마땅히 훌륭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죠."
"신의 가장 부지런한 시종 드워프가 만든 조각품입니다. 부족한 솜씨지만, 신께 향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 위대함을 조금이나마 표현하려 노력했습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게르크 신의 형상이었다. 보석 조각으로 눈동자를 장식했고 은으로 머리카락을 표현했다. 등에는 깃털 하나하나 빚은 금속 날개가 달려있었고 발밑에는 흰 돌을 깎아 만든 구름이 있었다.
"크기는 작지만, 제가 지금까지 본 게르크 신의 조각상 중에 가장 훌륭합니다."
서로 적절히 덕담을 나눴다. 어느 정도 체면치레를 끝내고 주교가 과일주를 입에 댔다 뗐다를 반복했다.
"여기 영지민 등록 문서입니다."
바칸은 가방에 들고 온 8천 명 노예를 영지민으로 등록하는 문서를 꺼냈다.
"지금 영지민이 천도 안 되어 소작으로 불립니다. 노예 8천 명을 영지민으로 등록해 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교구도 세워주길 바라는 겁니까? 솔직히 그건 어렵습니다. 소문이 잘못 나면 성복을 벗고 평생 신의 외면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일입니다."
영지민 8천이 넘으면 당연히 교구를 세워야 한다. 그러나 주교는 바칸이 단지 자작 작위를 얻으려는 목적에 노예를 영지민으로 허위 등록하려 한다고 지레짐작했다. 괜히 교구를 세웠다가 8천이나 되는 영지민이 허위로 등록되었다는 게 들키면 비나크 주교는 교단 재판에 회부될 것이다.
"주교님 생각이 맞는 거겠죠. 그럼 교구까지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대신 다른 도움 좀 주셨으면 합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비나크 교구에 선박 설계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주교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선박 설계도는 대부분 사람에겐 쓰레기나 다름없다. 그러나 필요한 사람에겐 정말 귀한 물건이다. 조각상의 가치가 대단해 보이지만, 선박 설계도를 내줄 정도는 아니다.
"제가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 아닙니다. 2시간 주시면 필사해 가겠습니다. 척박한 땅이어서 바다에서 고기를 안 잡으면 영지민이 굶습니다."
"좋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주교는 교단의 비밀 서고로 바칸을 데려갔다. 주교 손에 들린 등불이 컴컴한 서고를 음침하게 비췄다.
"여기가 선박 관련 자료입니다. 필요한 자료가 맞는지 확인해 보시지요."
바칸은 선박 자료를 빠르게 뒤졌다. 그러고 나서 30장이 넘은 종이를 뽑아냈다.
"시작하십시오."
말을 마친 주교는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바칸은 가방에서 종이와 깃털 펜 그리고 자와 컴퍼스를 꺼내 설계도를 베꼈다.
약 한 시간 지났을 때 등불이 꺼졌다. 주교는 바칸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새로운 등불 가지러 나갔다.
주교가 비밀 서고를 벗어나자마자 바칸이 빠르게 움직였다.
'무기, 대형 무기. 여기다.'
바칸은 가죽 주머니에서 빛나는 돌을 꺼냈다. 다급히 필요한 자료를 찾아서 책상에 올려놨다. 그리고 배 설계도 중 쓸모없는 것들을 대형 무기 자료가 있는 곳에 갖다 놨다.
빛나는 돌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조금 기다리니 주교가 새 등불을 들고 돌아왔다.
"지체한 시간만큼 봐 드릴 테니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바칸이 서두르는 거로 오해한 주교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대형 선박 설계도는 사실 반 시간도 안 되어 다 끝냈다. 바칸은 대형 무기 설계도를 얻으려고 일부러 시간을 끌었던 것이었다.
지금은 대형 무기 도면을 베끼는 걸 주교한테 들킬까 봐 긴장한 거지 시간이 촉박해서 서두르는 게 아니었다.
모래가 거의 다 쏟아질 즈음 바칸은 대형 무기 설계 도면을 전부 베꼈다. 바칸은 베낀 도면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주교는 바칸과 함께 나가지 않고 서고에 남아 기도문을 외웠다. 고대 제국 언어로 된 기도문은 웬만한 연습 아니면 제대로 읽기조차 힘들다. 평소 안 쓰는 발음이 많을 뿐 아니라 억양도 9개나 되어 실수 없이 끝까지 외우는 건 주교한테도 어려운 일이다.
'문서 숫자 4996개.'
비밀 서고를 나온 주교는 대기하던 신성 전사들에게 휴식하라고 일렀다. 바칸이 베끼기만 하고 문서를 도둑질한 게 아니라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주교와 대화를 좀 더 나누고 교단을 떠난 바칸은 그제야 긴장을 늦추고 숨을 편하게 쉬었다. 교단은 신앙의 힘뿐이 아니라 실질적인 무력도 대단하다.
그 무력은 왕국 수도에 있는 게르크 교단에 모여있다. 왕실로선 턱밑에 날카로운 비수가 놓인 셈이다. 왕실은 백작 이상 작위를 갖춘 귀족 영주들이 보낸 군대를 수도에 상주하여 교단의 무력에 대항했다.
'지금까진 순조로웠다. 다음 목적지는 수도. 그러나 비나크에 들렀는데 공작한테 인사 안 하면 이상하지.'
바칸은 비나크 공작을 찾아가 식량 좀 팔아달라고 사정했다. 비나크 공작은 쌀에 여유가 없다고 딱 잡아떼며 중고 무기를 바칸에게 판매했다.
- 작가의말
남대륙은 얼어 죽고 굶어 죽을 걱정이 없는 대신 몬스터의 위협을 받습니다. 뭉치면 오히려 몬스터의 주의를 끌기에 일부 지역만 제외하면 다들 흩어져 삽니다.
그래서 왕국이 없고 작은 마을은 있어도 영주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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