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의 체제
바칸은 모든 영지민을 모아놓고 전체 회의를 열었다. 아이들까지 합치면 370명에 달했다.
"7월까지 영지에서 먹이고 재운다. 8월부터는 하는 일에 따라 보수를 지급하고 너희는 번 돈으로 음식을 사 먹어야 할 것이다. 그럼 각 직업에 따른 보수를 발표하겠다."
"금속 세공사. 최저 임금 월 1골드."
미클과 함께 드워프에게서 금속 세공과 보석 세공을 배우는 사람들이 작게 환호했다.
"만든 물건이 비싸게 팔리면 수익 일부를 받을 수 있다. 1골드는 최저 임금일 뿐이다. 제대로 못 하고 게으름 피우면 일자리에서 쫓겨날 것이니 열심히 하도록."
"가죽 재봉사. 최저 임금 30실버. 품질 좋은 물건 만들면 더 받을 것이다. 매달 정해진 양만큼 만들어야 하고 품질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역시 쫓겨난다."
가죽 가공과 재봉을 배우는 자들도 기뻐했다. 금속이나 보석 세공은 손재주를 타고나야 한다. 그러나 가죽 가공과 재봉은 노력으로 해낼 수 있다. 본인만 부지런하면 쫓겨날 걱정이 거의 없다.
"염전 관리, 최저 임금 50실버. 소금 생산량이 많으면 돈을 더 준다. 날씨 영향을 많이 받기에 생산량이 적어도 처벌은 없다. 대신, 소금 등급을 잘못 매기면 벌금을 물릴 것이다."
서퍼를 비롯한 염전에서 일하는 자들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늘 햇볕에서 일해야 하고 바람도 심한 곳이기에 돈 조금 더 주는 거다. 그러니 힘들다고 불평하지 말도록."
"목장은 기본 월급이 30실버다. 달마다 가죽과 고기 생산량 및 목장에 남은 가축 숫자를 헤아려 포상금을 줄 것이다. 포상금 분배는 알아서 해라."
미클이 어리둥절해 있는 목장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했다. 바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직업의 월급도 일일이 선포했다.
"영지 관리는 월급이 2골드다. 읽고 쓸 줄을 알아야 하고 보고서 만드는 법과 장부 읽고 만드는 법도 알아야 한다. 일 제대로 못 하면 상응하는 벌을 주고 영지에서 추방한다."
지금 이 조건에 부합하는 건 베록밖에 없다. 베록은 창고 관리인 겸 식당 관리인 겸 학교 교장이다. 식당과 학교는 창고 양옆에 나란히 새로 지었다.
"전문 병사는 한 달에 10실버다. 일할 때마다 따로 돈을 지급할 것이고 식사는 영지에서 책임진다."
전쟁 노예 출신들은 돈 준다는 말에 환호를 터뜨렸다. 전투 교육만 받았다고 모두 무식한 건 아니다. 자기들이 한 달에 얼마나 많이 먹는지 잘 알기에 바칸이 계속 언급하지 않자 다들 포기한 상태였었다.
발표가 끝나자 마냥 기뻐하는 자들도 있고 모여서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영주.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돈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닌가?"
세인과 베록이 사람들을 이끌고 바칸에게 질문했다.
"아틀란티스는 마을이 아닌 도시다. 도시는 재화가 모이는 곳이다. 너희는 열심히 일만 하면 된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해결한다. 다들 자리로 돌아가라. 남은 얘기 마저 해야지."
"아이들은 10살까지 영지에서 돌본다. 10살 이후에는 직업에 따라 각 조합에서 관리할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조합 설립과 조합장 선거를 시작하겠다."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많기에 바칸은 조금 기다려줬다. 무슨 말인지 이해한 사람들이 가까운 자들에게 쉽게 설명했다.
바칸이 조금 어려워하는 스킬이었다.
"세공 조합. 지금 미클까지 총 여섯 명이다. 조합장은 누가 맡을까?"
당연히 미클이 맡았다.
"가죽 가공 및 재봉 조합. 지금 서른두 명이 있구나. 조합장은 누가 맡을까?"
남대륙 출신 뮤릭이 맡기로 했다.
"목축업 조합."
세인이 조합장을 맡았다.
"도축 및 무두 조합."
헤릭을 비롯한 자들이 어안이 벙벙해 서로 쳐다봤다. 백정이나 무두장이는 이발사나 창녀나 부랑자만큼 천대받는 직업이다.
"뭘 놀라. 잘 도축한 고기가 더 맛있고 잘 벗긴 가죽으로 더 비싼 물건 만든다. 당연히 조합을 만들어 기술을 발전시켜야지."
"헤릭, 헤릭이 조합장이다."
"상인 조합은 베록이 임시 조합장을 맡을 것이다. 조합원이 많아지면 그때 다시 뽑도록 하고. 운송 조합은 톰슨이 맡는다. 마차로 사람 운송하고 수레로 짐 나르고 배를 이용한 해운도 다 운송 조합 책임이다."
아직 영지에 상인이라곤 없고 운송이라곤 선장이 바하에서 물건 가져다주는 거랑 영지 내에서 무거운 물건을 수레로 옮기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이후 가장 큰 조합이 될 가능성이 있어 미리 베록과 톰슨을 조합장으로 임명했다.
"어느 조합에도 속하지 못한 자들은 '일반 조합'을 만든다. 조합장은 알아서 상의하고 나한테 보고해라. 이후 영지의 중요한 사안은 영주인 나와 각 조합장 그리고 영지 관리가 함께 상의한다. 조합장은 중요한 직책이니 감당하기 힘들면 빨리 말해라."
"그리고 오늘부터 매일 저녁 학교를 연다. 교장인 베록이 셈 세는 법과 글 읽는 법 그리고 글 쓰는 법 등을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재주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싶은 사람은 베록을 찾아가 지원해라. 심사에 합격한 자는 학교 선생이라는 호칭을 선사하고 강의에 대한 보수를 지급한다."
바칸의 말에 또 한바탕 술렁였다. 무슨 뜻인지 잘 못 알아들은 탓이었다.
"자, 의문점이 있으면 회의가 끝난 다음 미클이나 베록에게 문의해라."
바칸의 말에 술렁임이 멈췄다.
"지금부터 보여줄 건 영지에서 사용할 화폐다."
바칸은 드워프가 제작한 화폐를 영지민들에게 소개했다.
"속은 나무로 되어 있다. 그리고 테두리에 금속을 둘렀지. 한 줄 두른 건 1실버고 두 줄 두른 건 1골드고 석 줄 두른 건 10골드다. 가져다가 자세히 보도록."
영지민들이 나무로 만든 돈을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여기 금속 테두리에 무늬가 새겨졌다. 드워프 솜씨니까 쉽게 흉내 내지 못할 거다. 너희 월급은 이걸로 지급한다. 그리고 영지 내부의 모든 거래는 이 화폐로 진행한다. 외부에서 온 사람과 거래할 때도 이 화폐를 쓴다."
"금속 테두리의 무늬를 잘 기억해 둬. 괜히 가짜 돈에 속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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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에는 수레가 줄을 섰다. 배가 오기로 약속한 날짜였다. 허풍쟁이 선장이 박제한 흰머리수리를 보고 뱃머리를 돌리려다가 선원의 설득에 겨우 부두에 정박한 걸 빼면 특별한 일은 없었다.
배에서 내린 짐은 수레에 싣고 사람이 짊어지고 영지로 향했다. 걷기 힘든 어린아이는 짐과 함께 태웠다. 드워프들이 길을 반반하게 닦아놨기에 짐을 많이 실어도 수레에 큰 부담이 없었다.
이번엔 어린 노예뿐 아니라 성인 노예도 수십 명 왔다. 노예들은 멋진 옷을 입은 영지민들이 친절하게 맞이하는 걸 매우 불안하게 생각했다. 어린아이들은 그나마 수레에 탄 게 신기한지 겁내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톰슨, 아이들 데리고 가서 자질 검증해."
10살 미만의 아이는 톰슨을 따라 마나 호흡법으로 수련 자질을 검증하러 갔다. 성인 노예들은 공손히 서서 영주 지시를 기다렸다.
"이름 불린 자는 앞으로 나온다."
바칸은 새로 온 노예들을 식당과 염전에 몇몇 할당하고 대부분은 목장에 배당했다. 제국의 대목장에서 사용하는 겨울에도 자라는 풀의 씨앗 몇 포대가 이들과 함께 왔다. 새로 온 자들은 목장 소속이긴 하지만, 풀밭에 물을 대고 적당히 자란 풀을 베서 목장에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
"한 달 지켜보겠다. 일 열심히 하면 영지민으로 받아들인다. 영지민이 되면 일한 대가로 돈도 받는다."
노예들은 어리둥절해서 베록을 따라갔다. 베록은 창고에서 옷과 신발을 꺼내 이들에게 지급했다. 옷을 다 입고 나서 염전에 배당한 노예는 서퍼를 따라가고 목장에 배당한 노예는 세인을 따라갔다.
식당에 배당한 노예들은 베록에게 갔다. 이들은 단지 영지민이 먹을 음식만 만드는 게 아니라 고기를 훈제하고 채소를 소금에 절이는 일까지 해야 했다.
집 배정하고 영지 적응을 돕는 건 각 조합이 할 일이다. 수도에서 물 나오는 걸 보여줬는지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여러 곳에서 울려 퍼졌다.
전체 회의를 열고 조합을 만든 후부터 바칸은 일이 부쩍 줄었다. 대부분 일은 조합장과 조합원들이 상의하여 알아서 했다.
오늘 역시 남은 일정이 없기에 대나무 숲으로 향했다. 단단한 대나무는 여러 기술을 펼치기 적합했다. 때릴 때 울림소리로 타격이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어 정말 좋은 수련 장소였다.
"대장, 대장."
슬슬 땀이 나려고 하는데 톰슨이 호들갑을 떨며 달려왔다. 바칸은 힘과 속도의 조화에 대한 고민을 잠시 접었다.
톰슨 품에는 눈을 떴는지 말았는지 구분이 안 되는 중닭 크기의 새가 안겨있었다.
"대장 말이 틀렸어. 알에서 깨어난 다음에 양 주술사를 먼저 봤는데 나를 따라왔어."
"아니야. 아마 알에 있을 때부터 너랑 교감해서 그럴 거야. 다른 새는 태어나서 처음 본 사람을 따라. 그런데 넌 마나 수련하는 거 안 지켜봐?"
"갑자기 양 주술사가 불러서. 마나 수련하는 걸 지켜보러 갈 테니 얘는 대장이 잠시 봐줘."
바칸은 흰머리수리 새끼와 양젖이 담긴 통을 받았다. 배를 만져보니 이미 많이 먹어서 통통했다. 그런데도 양젖에 맛을 들였는지 머리를 자꾸 통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톰슨, 제발 이대로 무사해야 한다.'
톰슨의 능력이 점점 강해졌다. 마나 수련하는 곳은 목장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졌다. 꽤 먼 거리인데도 양 주술사와 교감을 나눴다.
바칸은 톰슨이 능력을 감당하지 못해 몸이 상할까 봐 걱정되었다.
기어이 양젖을 몇 모금 더 삼킨 새끼 새는 바칸의 품에 머리를 박고 잠들었다. 바칸은 자세를 바꿔 꽁무니를 바깥쪽으로 향하게 했다. 바칸의 지식에 따르면 새는 장이 짧아 배설이 빠르다.
'괴물이군. 벌써 체온으로 깃털이 다 말랐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데 깃털이 벌써 말랐다. 그래도 갓 태어난 새끼한테서 나는 비린내는 남아있었다.
바칸은 트롤과 흰머리수리가 싸우던 곳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날 싸움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존과 톰슨은 마나 수련법을 익혀냈기에 언젠간 한계를 벗어나는 힘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바칸은 여전히 감응에 실패했다. 비록 육체 능력이 하루가 달리 나아지고 있지만, 곧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 된다.'
바칸은 선 자세로 명상에 들어갔다. 소리가 지워지고 향기가 지워지고 감각이 지워졌다. 세븐 브레이크의 기술 설명을 머리로 떠올리며 어려운 단어와 문장을 이해하려 애썼다.
"대장, 대장."
톰슨의 호들갑이 또 바칸을 방해했다. 바칸은 새끼 흰머리수리를 톰슨에게 건넸다. 마음을 읽는 능력은 없지만, 자기 새끼를 맹수 아가리 앞에 둔 어미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다.
"성공이야. 셋이 감지에 성공하고 하나는 감응까지 했어."
"가자."
바칸과 톰슨은 마나 수련장으로 달렸다.
"대장. 흰머리수리에게 이름 하나 지어줘. 강하고 멋진 이름."
원래부터 체력이 좋았던 톰슨은 빠르게 달리면서도 전혀 숨찬 기색이 없었다.
"송골매?"
"그건 뭐야?"
"나도 몰라. 그냥 생각났어."
8살 이전부터 있던 지식은 꽤 체계적이지만, 8살 이후에 얻은 일부 지식은 단편적이고 연관성이 부족했다.
"강부리 어때? 억센 우두머리라는 뜻이야."
"역시 대장. 내가 생각했던 이름보다 훨씬 나아."
하마터면 토마슨이 될 뻔했던 강부리였다.
- 작가의말
주인공에겐 영지 키울 계획이 연도별로 차곡차곡 짜여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뻔한 이야기를 여러분이 원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어서 빨리 분탕 종자를 풀어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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