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이한 조합
보름이 지났다. 바칸과 벨크는 곡괭이로 나무문을 찍었다. 바칸이 보름 동안 마나 수련에 매진한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구멍 냈다.
"너 정체가 뭐야? 힘도 세잖아."
벨크가 힘 빠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알면 네가 놀라 죽을까 봐 말 못 하겠어."
바칸의 농담에 벨크가 낄낄 웃었다. 보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며 둘은 부쩍 친해졌다. 멍청하고 흉악한 연기를 내려놓은 벨크는 엄청 재밌는 대화 상대였다.
"리차드 영지에서 해마다 블라우크로 가는 배가 한 번 있어. 작년엔 해적왕이 방해해서 며칠 만에 돌아왔거든. 올해는 방해꾼이 없으니 블라우크까지 가는 데 성공할 거야."
브릭섬은 해적섬 출신이 절반 정도 된다. 크기는 겔트 왕국의 비나크 지역보다 조금 더 큰 정도지만, 영지는 백 개가 넘는다. 브릭섬은 극심한 추위 때문에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약 2백 년 전부터 사람이 살 만한 정도가 되었다.
"드레이크가 대놓고 방해하진 못하나 보네."
"드레이크가 직접 방해하면 리차드의 기병이 드레이크 영지로 들이닥치겠지. 명분이 리차드한테 있으니 대부분 영주도 리차드 편을 들 거고."
"리차드가 드레이크보다 강해?"
"둘이 비슷한 수준이야. 문제는 엘리자베스가 드레이크 편이라는 거지."
보름 동안 음식을 아껴먹은 덕분에 바칸도 쉽게 지쳤다. 얼마 안 남은 물로 목을 축이며 엘리자베스에 관해 질문했다.
"엘리자베스는 여자 같은데?"
"브릭섬에서 영주가 죽으면 부인이 영주가 돼. 부인이 죽으면 자식이 이어받고."
"그럼 엘리자베스랑 드레이크가 리차드를 죽이면 되잖아."
"엘리자베스는 드루이드야. 굉장한 맹수를 잔뜩 거느리긴 하는데 짐승이 적군 아군을 구분 못 해. 힘을 합칠 수 없어."
"리차드랑 드레이크가 싸우다 약해지면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겠군."
"그럴 가능성도 무척 크지."
휴식을 마친 바칸은 곡괭이를 들고 문을 찍었다. 반대편으로 구멍이 뚫리고 나선 곡괭이보다 망치를 애용했다. 길쭉한 돌 혹은 곡괭이 날을 대고 망치로 두드리는 거로 문을 천천히 헐어버렸다.
"내가 신호 주면 바로 뒤로 도망쳐. 큰뱀이 어두운 곳을 싫어하는 건 맞지만, 절대 안 들어오는 건 아니야."
벨크는 바칸과 5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걸었다. 해적왕의 창고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드레이크가 급하긴 급했구나."
창고에는 진주를 비롯해 꽤 많은 물건이 남았다.
"목숨이 중요해. 재물은 상황 봐가며 챙기자."
벨크는 입맛을 다시며 창고에서 나왔다. 바칸과 벨크는 조금 가파른 길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망가진 철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나가서 살필게."
공동에 기름을 태우는 등불이 있어 빛에 적응할 필요는 없었다. 벨크는 몸을 돌려 궁둥이를 철문 쪽으로 향했다. 바칸이 신호를 주기만 하면 전속력으로 안으로 달릴 예정이었다.
"없어. 큰뱀이 떠난 거 같아."
그제야 시름을 푹 놓은 벨크는 밖으로 나와서 햇볕을 만끽했다. 바칸 역시 바로 움직이지 않고 높은 곳에서 섬의 상황을 두루두루 살폈다.
"드레이크가 급하게 떠나서 성한 배가 꽤 많아. 어느 쪽으로 가면 좋은 배가 있을까?"
"둘이 돛을 올리고 내릴 수 있는 작은 배여야겠지?"
"아니. 둘이 아닌 거 같아."
왜소한 인영 하나가 멀리서 나타나 비칠거리며 둘에게 다가왔다. 외팔이 훼이크였다.
"반가워. 애꾸랑 까막눈. 너희도 살아남았구나."
훼이크는 키도 크고 덩치도 큰 편이었다. 그러나 보름 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형편없이 홀쭉해졌다. 게다가 팔 하나 없어서 실제보다 더 왜소하게 보였다.
"외팔이는 큰 도움 안 되니까 버리고 가자."
벨크의 냉정한 말에 훼이크가 고개를 저었다.
"내겐 술과 음식이 있어. 벨크 넌 몰래 감춰둔 술이나 음식 없지?"
술은 있는 족족 먹어 치우는 벨크 무리다. 고기잡이 실력 역시 최고여서 음식을 쌓아두는 법이 없었다.
"너라면 왠지 적은 숫자로 도망칠 배도 준비했을 거 같은데?"
"당연하지. 우리 셋이면 충분히 배를 바다에 내릴 수 있어."
그때 사람 체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도 끼워라."
바칸은 빠르게 머리를 비웠다. 벨크와 훼이크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브릭섬으로 가서 드레이크에게 복수할 거야. 너희도 브릭섬이 목표지?"
바칸을 비롯한 셋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바칸은 해적섬으로 가고 싶지만, 벨크는 브릭섬으로 가는 물길밖에 모른다. 큰 배와 선원이 있다면 해적섬으로 가볼 만도 한데 지금은 안전하게 브릭섬으로 가는 게 최선이다.
"복수를 나도 도울게."
훼이크가 이를 갈며 말했다.
"네가 벨크랑 짜고 날 죽이려 했다던데?"
"헛소리야. 드레이크는 처음부터 널 죽이고 네가 그간 모은 재물 빼앗으러 온 거야. 네 배를 가라앉힌 것도 드레이크가 한 짓이 틀림없어."
훼이크의 말에 해적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큰 좌절을 겪어선지 감정 기복이 전처럼 심하지 않았다.
"이제 뭐 하지?"
"내 창고에 가서 남은 물건 꺼낸다. 각자 마음에 드는 물건 마음껏 집어 들어. 어차피 보름 뒤면 드레이크가 와서 다 가져갈 거야."
넷은 창고로 가서 값이 나갈 것 같은 물건을 몇 개씩 챙겼다. 해적왕은 죽은 물고기와 비슷한 눈을 하고 비수 몇 개에 짧은 검 하나만 챙겼다. 머리에는 복수 외에 아무 생각도 없는 듯했다.
바칸은 목걸이나 반지 위주로 챙겼다. 율족의 물건이나 드워프의 세공품과는 완전히 다른 형식이어서 미클을 비롯한 세공사들에게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았다.
벨크는 눈짓으로 바칸에게 물으면서 비싼 물건만 챙겼다.
적당히 챙긴 넷은 남쪽 부두로 갔다. 남쪽 부두에는 작은 배가 무척 많았다. 대부분은 파손되어 땔감 되기를 기다리는 망가진 배였다.
남쪽 부두를 영역으로 차지한 훼이크는 폐선 사이에 멀쩡한 배 한 척 숨겼다.
훼이크가 꼭꼭 숨긴 배에는 술이 열 통이나 있었고 잘 포장된 밀가루와 말린 고기도 가득했다.
넷은 근처의 배를 부숴서 불을 지핀 후 물을 끓여서 밀가루를 타고 고기도 넣었다. 바칸은 뜰채를 들고 바다에 잠수하여 물고기 몇 마리 잡았다. 빠르게 손질한 물고기가 팔팔 끓는 물에 들어가 음식을 풍성하게 해줬다.
배를 두둑이 채운 다음 둥근 나무를 구해다가 배 밑에 깔았다. 배를 나무 위로 조금씩 굴려서 바다에 띄웠다.
"보다시피 난 팔이 하나라서 노를 못 저어. 대신 음식 준비하는 거랑 청소 같은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바칸이 뒤로 가고 해적왕과 벨크는 배 옆에서 노를 저었다. 바칸은 머리를 비우고 노만 열심히 저었다. 괜히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가 해적왕의 의심을 사면 도망칠 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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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앞이 해류가 여럿 모이는 곳이야. 저기서 해류 잘못 타면 큰일이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배는 지금까지 브릭섬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브릭섬 해안을 지나는 큰 해류를 타기 위함이었다.
"소용돌이 있다. 피해."
훼이크의 외침에 바칸과 해적왕이 노를 정신없이 저었다. 급히 방향을 선회한 배는 겨우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았다.
"뭐 이런 바다가 다 있어? 방금 소용돌이 사라졌어."
강한 해류가 여럿 모이는 곳이어서 가끔 소용돌이가 갑작스럽게 생겼다가 금세 사라졌다.
"가짜 소용돌이였어. 뿌리 없는."
바다 표면에만 형성된 힘도 약한 소용돌이였다. 문제는 넷 모두 소용돌이의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능력이 없었다.
"조심해서 나쁜 건 없지. 소용돌이 만나면 일단 피하고 보자."
일행은 동쪽으로 흐르는 굵은 해류를 원했다. 그러나 소용돌이를 피하느라고 좀처럼 접근할 수 없었다.
"곧 밤이야. 밤이 되면 어찌 될지 몰라."
"소용돌이 타고 날자."
바칸의 제안에 해적왕이 미친놈 보는 눈으로 쳐다봤다.
"저 소용돌이는 무조건 진짜야. 우린 소용돌이 타고 세 바퀴 정도 돈 다음 노로 바다를 때리는 거야. 배가 떠오르면 소용돌이 힘을 빌려서 원하는 방향으로 날 수 있어."
"난 동의."
벨크는 고민도 없이 바칸의 제안에 동의했다.
"셋이서 배를 띄울 수 있을까?"
"훼이크. 너까지 넷이야. 너도 마나 익혔잖아."
바칸의 말에 훼이크가 해적왕 눈치를 봤다. 해적왕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나를 최대로 끌어올려. 나랑 벨크가 앞을 맡겠어. 둘이 뒤를 맡아. 앞보다는 뒤가 띄우는 게 더 힘들다는 건 알지?"
훼이크가 마지못해 동의하고 해적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넷은 노를 저어 소용돌이로 들어갔다. 배는 소용돌이 결을 따라 원을 그렸다. 바칸만 노로 뱃머리 방향을 조절하고 남은 셋은 노를 치켜든 채 중심을 잡으며 기회를 노렸다.
"셋에 간다. 하나, 둘, 셋!"
바칸은 힘을 조금 아꼈다. 벨크의 수준이 맞추지 않으면 배가 옆으로 뒤집어질 수 있다. 해적왕과 훼이크는 전력을 다했다.
해적왕이 소용돌이 안쪽에 있었기에 힘이 더 강한데도 배가 기울거나 하진 않았다. 바칸의 계산대로 허공에 뜬 배는 원하는 해류 방향으로 날아갔다.
배가 바다에 내리며 크게 흔들렸고 해적왕을 제외한 셋은 바닥을 뒹굴었다.
"이름 없는 놈은 아닌 것 같군."
해적왕이 부러진 노를 바다에 던지며 말했다. 바칸은 어깨를 으쓱하며 노를 갑판에 던졌다. 지금부터는 해류를 타고 쭉 가면 되기에 노 저을 일도 없다.
벨크는 갑판에 드러누워 땀을 뻘뻘 흘려댔다. 바칸은 다가가서 벨크 어깨를 콱 밟았다. 벨크가 악다구니를 쓰며 바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탈구한 거 고쳐줬는데 욕이나 하고. 은혜도 모르는 놈."
정작 바칸은 조용히 있는데 해적왕이 나섰다. 바칸은 방금 자기 생각이 읽힌 걸 알아채고 빠르게 머리를 비웠다.
"자. 위험을 탈출한 걸 축하해 한잔하자고. 그간 쌓인 긴장과 피로도 풀 겸 해서 말이지."
훼이크의 말에 셋은 돛대 곁으로 갔다. 밧줄로 돛대에 칭칭 묶은 상 위에 잔 네 개 있었다. 훼이크가 주전자를 들고 잔에 술을 넘치게 부었다.
"파도다."
해적왕이 소리 지르며 돛대를 잡았다. 바칸 역시 돛대를 잡았고 훼이크와 벨크는 갑판에 엎드렸다. 바칸과 눈을 마주친 해적왕이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바칸은 해적왕의 웃음이 무슨 의민지 궁금했지만, 애써 머리를 비우고 생각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급작스럽게 몰려온 파도는 갑판을 흠뻑 적시고 사라졌다. 벨크와 훼이크의 잔은 파도에 쓸려 사라졌고 해적왕이 남은 잔 두 개를 잡고 있었다. 훼이크는 상자를 열어 잔 두 개 꺼낸 다음 술을 붓고 축사를 읊었다.
"전지하고 전능한 태양신에게 모든 영광을 바친다."
넷은 잔을 부딪친 후 술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바칸은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 무척 달다고 느껴졌다. 소매로 입술을 쓱 닦는 벨크가 멋져 보여 자신도 따라 할까 고민했다.
쿵 소리와 함께 바칸이 눈·코·귀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해적왕이 허리에서 짧은 검을 뽑아 훼이크의 하나 남은 팔을 잘랐다.
"날 죽여서 드레이크 환심 사려고? 어림도 없는 수작이지."
훼이크는 피가 철철 흐르는 팔과 함께 갑판을 뒹굴었다. 벨크는 갑자기 벌어진 일에 멍해 있다가 훼이크에게 다가가서 배를 걷어찼다.
"무슨 독이야? 해약은 어딨어? 이 오크 똥에 어미 삶아 먹을 새끼야."
훼이크의 눈에서 생기가 점점 빠져나갔다. 벨크는 다급히 훼이크 입에 술을 부어 넣었다.
"히드라 독이야. 해약 없어."
- 작가의말
히드라 독이 전부 마나로 바뀔지어다. 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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