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칸의 전략
"노예는 전부 데려가서 일정 기간 교육한 다음 영지민으로 받아들인다."
밤새 공작이 도망쳤다. 들키지 않으려고 헌 옷을 입고 영지민들 틈에 섞여서 나갔다. 덕분에 비나크의 창고와 영주성에 재물은 그대로 남았다.
"산을 두드려 호랑이를 몰아내고 동굴을 쑤셔 뱀을 놀래준다."
동대륙 병법서에 나오는 말이다. 꼭 죽일 필요가 없는 상대는 적당히 놀래줘서 쫓아내는 게 상책이다.
도망가지 않고 남은 영지민들에겐 올해 세금은 모두 면제라고 일러줬다. 그리고 2천 명이 넘은 아틀란티스 공국군은 무기를 내려놓고 삽과 자루를 들었다. 비나크 공작은 배를 타고 온 자들이 마을에 잠시라도 머물게 하려고 강 두 개를 잇지 않았다. 바칸은 병사들에게 두 강을 연결하는 짧은 운하를 파도록 지시했다.
"이건 두 가지 의미가 있어."
투치가 갭릴에게 설명했다.
"하나는 나라를 관통하는 주도로를 확보하는 거야. 제국은 이런 국가 도로가 여럿 있거든. 이를 주간 도로라고 한다. 주간 도로에서 지간 도로가 파생해 전국을 빠르게 잇는 도로망이 형성되는 거야."
"그러니까 바하부터 겔트까지 강으로 쭉 통하게 한 다음, 강으로 통하는 길을 많이 닦는다는 뜻이지?"
"그것뿐이 아니야. 바하에서 비나크를 지난 강은 미아르 쪽으로 흘렀거든. 그런데 지금 두 강이 통하면 일부는 겔트 쪽으로 흘러. 그렇게 되면 미아르로 가는 물이 적어지지."
"저런 얘기 뭐가 재밌을까?"
지아르가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댔다. 지아르는 호기심이 많지만, 뭔가 깊이 파고드는 걸 싫어한다.
가드 역시 지아르와 마찬가지다. 가드는 뭐든 간단하고 명료한 게 좋았다. 강 둘을 연결해야 지금 비나크 마을 부두에 정박한 아틀란티스의 배들이 겔트까지 갈 수 있다. 그래서 강을 파는 거다. 거기에 어떤 숨겨진 의도가 있는지는 알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근데 가드. 존이랑 드레이크랑 싸우면 누가 이겨?"
아틀란티스 영지 소년들의 최대 관심사다. 존을 따르는 아이들과 드레이크를 숭앙하는 아이들이 가끔 모여서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
"난 존이야. 존은 기술을 뛰어넘는 감각이 있어. 힘도 세고."
가드의 말에 자이르는 고개를 저었다.
"드레이크도 힘이 어마어마해. 커다란 쇠망치를 부지깽이처럼 가볍게 휘두르는 거 봐."
"너 존이 훈련하는 거 못 봤구나."
자이르는 눈알을 팽글팽글 굴렸다. 그간 훤칠한 키에 백금발의 멋진 기사 드레이크에게 반해 존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뭔데?"
"달걀 껍데기 바르는 훈련."
자이르는 입을 막고 쿡쿡거렸다.
"내가 질문했어. 왜 달걀 껍데기 바르냐고."
"그래서 뭐래?"
"힘 조절 실수해서 벽 부쉈대."
자이르는 팔에 닭살이 돋았다. 분명히 실수라고 했다. 존이 허세 부리는 성격이 아니니 말 그대로 실수일 것이다. 힘줘서 때린 게 아니라 그냥 몸 돌리거나 할 때 손이 벽을 스치면서···
"진짜야?"
"락한테 물어보니까 존 방에 벽이 부서져서 수리해줬다고 하더라."
"가드. 너도 2단계잖아. 존만큼 힘이 세?"
"어림도 없어. 존만 한 사람은 세상에 둘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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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다들 존만 해."
북풍과 자애의 여신 와희를 모시는 바르바리얀 부족이 도착했다.
바르바리얀 부족은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 그 한 끼에 양 한 마리 정도 먹는다는 게 문제다. 오래 정착하면 해당 지역이 황폐해져서 자주 이사하는 부족이다.
"내가 너희 대장이다."
존이 배에서 내린 바르바리얀 부족에게 말했다. 바르바리얀 부족은 남자만 있다. 여자아이는 태어나면 다른 부족에 맡긴다.
유일하게 바르바리얀 부족을 떠난 남자아이는 아뮬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마르카다의 집정관이다. 남자아이라고 여기기엔 너무 덩치가 작아서 롱가바르 부족에 줬다.
"우린 제일 센 놈이 대장이다."
"내가 더 세니까 대장 한다."
존의 말에 바르바리얀 부족장이 나섰다.
"손 씨름 하자."
존은 손을 맞잡자마자 바르바리얀 부족장을 그냥 던져버렸다. 2미터의 거구가 10미터 정도 날아가는 모습에 둘러싸고 구경하던 자들 모두 입을 딱 벌렸다.
쉽게 이긴 존도 싱글벙글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수련한 보람이 있어. 힘을 약하게 조절했어.'
바르바리얀 부족은 존을 대장으로 모시기로 했다. 존은 이들을 데리고 식당에 갔다.
"다들 나만큼 먹는다고 하니까 음식 넉넉히 내와. 맛은 상관없으니 소금만 적당히 뿌리면 돼."
양고기와 소고기 그리고 쥐 고기를 삶고 볶아서 내왔고 카쿠 삶은 것도 가득 내왔다. 바르바리얀은 그간 양 한 마리를 사흘씩 아껴먹으며 허리띠 졸라매고 살았다. 간만에 음식이 넉넉히 차려지자 마음껏 폭식했다.
"갑옷 맞추러 가자."
존은 바르바리얀 전사들을 데리고 조선소로 갔다. 드워프들은 조선소 근처에 땅을 파고 지하 도시를 작게 지어 지냈다.
금속 드워프는 160명이나 되는 거구에게 전신 갑옷을 만들라는 존의 주문에 입이 째지게 웃었다. 바위 드워프랑 나무 드워프만 마을 만들고 길 닦으면서 신나게 일하는 게 샘났는데, 금속 드워프도 두 달 정도는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다.
"무기는?"
"힘이 얼마나 센지 측정해야 정하지."
"전번에 네 힘 측정하다가 망가진 거 아직 못 고쳤어. 섬세한 기계라서 시간이 좀 걸려. 갑옷 다 만든 담에 측정하자."
몸 치수를 다 잰 다음 바르바리얀은 존과 함께 남쪽 숲 개간에 동원되었다. 섬세한 일엔 전혀 도움이 안 되지만, 나무를 베고 뿌리 뽑고 무거운 물건 나르는 데는 소나 말보다 훨씬 나았다.
"공왕이 어데 가서 오우거 백 마리 데려온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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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크는 안 지켜?"
"전쟁은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 두 개가 점령전과 섬멸전이다."
드레이크는 해전에 뛰어나지만, 그건 타고난 감각이지 제대로 배운 건 아니다. 바칸은 해군 제독으로 임명한 드레이크에게 전략과 전술에 관한 말을 자주 들려줬다.
가드와 자이르도 귀를 쫑긋 세웠다. 읽고 쓰고 셈 세는 공부보단 싸움에 관한 공부가 훨씬 재밌고 쉬웠다.
"점령전은 말 그대로 상대의 것을 빼앗아 내가 가지는 거다. 내가 겔트 왕국과 장기전을 할 생각이었다면 비나크에 주둔했다. 여기 수비를 든든히 하고 주변 마을부터 점령했겠지."
"섬멸전은 상대를 약하게 만드는 거다. 상대 힘을 계속 깎아 먹으며 땅이나 다른 건 신경 안 쓴다. 난 병사도 충분하고 식량도 충분해. 쉬지 않고 반년 동안 계속 싸워도 된단 말이다. 이럴 땐 섬멸전이 훨씬 유리하다."
몇몇 배는 비나크 공작의 영주성과 창고에서 나온 재물을 아틀란티스로 옮겼다. 남은 배는 병사들을 태우고 겔트로 출발했다. 겔트에 도착하면 병사들을 내린 배가 비나크로 돌아가서 노예를 아틀란티스로 옮길 것이다.
"이번엔 아마 평야에서 대회전을 할 거다."
"왜 그렇게 확신하지?"
"적이 우리보다 숫자가 많으니까."
비나크 공작과 함께 도망친 병사가 수백 명이다. 게다가 비나크 공작이 지배하는 마을 병사들도 합류하여 수도로 향했을 가능성이 크다.
수도 수비군도 2천이다. 그리고 게르크 교단을 견제하려고 백작 이상 작위를 갖춘 자들이 보낸 병력도 합치면 2천이 넘는다.
부르크의 군대 천 명까지 합치면 최소 5천이다. 거기에 비나크 공작의 군대를 포함한 다른 귀족들의 지원군까지 합치면 6천 규모는 반드시 넘는다.
"수성전은 보통 상대 병력이 더 많을 때 하는 거다. 성벽에 의지하면 상대 병력을 쉽게 깎아 먹는다. 그런데 수성전은 한 가지 결함이 있다. 바로 상대가 공격해야만 전투가 벌어진다는 거다. 이땐 공성하는 측이 주도권을 잡게 되고 수성하는 측은 끌려다닐 수밖에 없지. 병력이 더 많으면 차라리 대회전을 펼쳐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상대를 빠르게 섬멸하는 게 낫다."
"저들이 수도를 지키며 일부 병력을 뒤로 보내 비나크 마을을 빼앗고 우리 퇴로 차단할 수도 있잖아."
드레이크라면 분명히 그렇게 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우리 군에 기병이 없기 때문이다."
겔트 왕국엔 기병이 있다. 전부 보병인 아틀란티스를 상대로 기병은 큰 힘을 발휘한다. 2백 명밖에 안 되지만, 기병의 역할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상대 진형을 흩트려 놓고 지휘부를 급습할 수도 있고, 궁병을 습격해도 되고 군량을 불태워도 되고."
"대안은 있는 거겠지?"
본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본드는 기병 대장이 되겠다고 여러 병종의 지휘자 역할을 거절했다. 그래서 이번 전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구경만 했다.
명목으론 미클 호위로 왔지만, 호위는 뒷전이고 전투 구경에 신났다.
"우리 상륙은 방해 안 하는 건가?"
"저들은 뭉친 힘으로 우릴 깔끔하게 해치워야 한다. 왕국의 모든 귀족이 왕실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왕실은 우리를 단매에 쳐 죽여 자신들의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우리 상륙을 방해 안 하고 정정당당하게 붙을 것이다."
"전투나 전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구나."
브릭섬 싸움은 이기면 끝이다. 어떤 수단을 쓰고 어떤 계략을 부리든 상관없다. 충성과 정직을 과하게 강조하기에 실패하면 다시 일어설 수 없지만, 승리하면 누구도 그런 걸 따지지 않는다.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힘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여럿 생기고 힘보다 더 중요하게 변한다. 이러한 것을 알고 적절히 이용해야 큰 땅을 차지하고 지배할 수 있다."
"궁금한 게 있다. 지난번에 회의 때 사람을 제국 삼 황자한테 보낸다고 했다. 그런데 대답도 안 듣고 바로 움직여도 상관없는 건가?"
바칸은 사람을 보내 삼 황자에게 부르크 교단을 잠깐 견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출병하여 비나크를 공격했고 벌써 수도 겔트와 배로 사흘 걸리는 거리에 있다.
"삼 황자. 뭐 지금은 서부 제국 황제지. 그가 진심으로 우릴 도울 거로 생각해?"
"돕지도 않을 걸 왜 사람 보내서 부탁하지?"
"그는 겔트 말고도 신경 써야 할 국가가 많다. 부르크는 내부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기에 주변 왕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중요해. 내가 사람 보낸 건 여기 좀 관심 달라고 일깨워주는 거야. 겔트 수도까지 공략한 걸 알게 되면 우리한테 흥미가 생길 거야."
"너는 삼 황자에게 도움 줘서 이득을 취하려는 건가?"
"부르크는 체제가 불완전하여 오래가기 힘들다. 전쟁을 통해 사람들의 시야를 좁게 만들어야만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 아마 동부 제국이나 서부 제국 중 하나와 싸우게 될 거야. 남은 하나가 다시 제국을 통일할 가능성이 커지고. 그런데 우리가 겔트 왕국에서 부르크 군대를 격파한 다음 겔트 전역의 교단 건물을 부수고 제단을 허물면 어찌 될까?"
바칸은 드레이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럼 부르크는 반드시 나한테 복수해야 해. 신은 부르크를 강하게 만드는 것인 동시에 최대 약점이야. 신을 건드린 상대를 용서하면 안 되니까. 그렇게 되면 동부 제국과 서부 제국은 부르크와 안 싸우고 힘을 키울 거야. 부르크는 멀리 떨어진 겔트에 있는 나를 공략하려고 용쓰다가 망하겠지. 그럼 동부 제국과 서부 제국이 힘으로 붙어야 해."
드레이크는 전율을 느꼈다.
"제국의 천년 역사에 분열과 통일은 몇 번이나 반복되었어. 그 반복을 끊으려면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야 해."
- 작가의말
존만 한 놈 160명이 합류했습니다. 300이 6천 해치웠으니 단순 계산만으로도 3200명 병력에 해당합니다.
거기에 드워프 갑옷과 무기까지 장만하면.어휴. 얼마나 먹어 치울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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