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 톰슨
울창한 숲은 달빛도 제대로 스며들지 못했다. 밤이 깊어지며 도주와 추격 모두 멈췄다.
해적들은 작은 공터에 자리 잡고 모닥불을 네 개나 피웠다. 하나는 추위를 물리치는 용도고 셋은 시야를 밝히기 위함이다.
해적은 겔트 왕국의 동북쪽에 있는 커다란 섬에 살았다. 사면이 바다긴 하지만, 면적은 겔트 왕국보다 더 커서 섬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사면이 바다인 관계로 해적들의 고향은 생각보다 덜 추웠다. 더구나 겨울이면 거의 돌아가는 법 없이 덜 추운 곳에서 노략질로 바빴기에 추위에 대한 내성이 겔트 왕국 북부 사람보다 못했다.
세 명이 등을 기대고 앉은 채 불침번을 섰고 남은 사람은 잠잤다. 자면서도 고래 혹은 상어 가죽으로 만든 가죽옷을 입고 투구도 쓴 채 무기를 가슴에 품었다.
기습당해도 웬만큼 강하고 정확한 공격 아니면 별 피해 없을 것이다.
"저기 모닥불 약해졌다."
모닥불 담당자가 툴툴대며 일어섰다. 불침번 서는 셋은 모닥불 하나씩 담당했다. 방금 일어선 자의 모닥불은 바람을 강하게 맞아 장작이 빨리 탔다.
굵은 장작 몇 개를 올리니 모닥불이 밝아졌다. 해적은 남은 둘을 등진 채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술을 아주 조금 마셨다.
많이 마시면 냄새를 풍겨 들킬 것이기에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해 한 모금만 마셨다.
술 주머니를 품에 넣고 돌아선 해적은 목에 화끈한 느낌을 받았다. 화끈한 느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목덜미가 시원해졌다. 죽음을 예감한 해적은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술 다 마셔버릴걸.'
쿵 소리에 잠자던 해적들이 일어났다. 불침번 서던 둘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자주는 아니어도 이런 경험을 한두 번씩은 다 해봤다.
"너하고 너. 날 따라와."
아주 유명한 해적이 아니면 이름도 별명도 없다. 두목에게 지목당한 두 해적이 허리와 목을 돌리며 굳은 몸을 풀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뒤로 넘어진 해적의 시체를 뒤집어보니 목에 가늘고 짧은 화살이 박혀있었다.
"재수 없는 기사가 당했던 그 화살이다."
"이렇게 작은 화살을 어떻게 쏘지? 손으로 던져?"
두목이 목덜미에서 화살을 뽑아 무게를 가늠했다.
"가볍다. 오우거가 던져도 목에 박히지 않는다."
셋은 죽은 해적의 갑옷과 옷을 벗기고 무기도 회수했다. 몸에 지닌 술이나 고기 등도 모조리 거둬서 남은 자들이 나눴다.
발가벗은 시체는 조금 먼 곳에 버렸다. 새로 불침번 하나 뽑고 남은 해적은 다시 잠들었다.
###
겨울의 숲은 황량하다. 먹을 게 부족하여 몬스터도 적다. 부족을 이루지 못한 몬스터는 겨울에 보통 숲 외곽으로 가거나 인간 마을을 습격한다.
먹이가 많은 여름과 달리 겨울엔 숲이 오히려 더 안전하다.
한적한 숲 덕분에 바칸 일행이 남긴 흔적은 헷갈릴 염려가 없었다. 해적들은 발자국을 따라 뒤를 꾸준히 쫓았다.
벌써 셋이나 죽었지만, 포기하고 돌아간다는 선택은 없었다. 서로 그렇게 친한 건 아니어도 함께 싸우다 죽은 동료의 복수를 남기고 돌아간다는 건 용감한 전사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으아."
드워프가 설치한 함정을 밟아 선두에서 걷던 해적이 죽었다.
해적이 바닥에 둔 얇은 나뭇가지를 밟자마자 함정이 발동했다. 밧줄은 해적 발목을 조인 후 높은 곳으로 끌어당겼다.
밧줄에 묶여 높은 곳에 끌려간다고 사람은 죽지 않는다. 그러나 끌려간 자리에 공교롭게도 뾰족하게 깎은 나무창이 기다린다면 다른 얘기다.
나무창은 정확히 투구와 가죽옷이 보호하지 못한 해적의 턱을 찔렀다. 거꾸로 올라가던 해적은 턱을 뚫고 뇌까지 침입한 나무창 탓에 비명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기사 보고 앞장서라고 하자."
"기사를 기다리다간 놈들이 도망친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 다 죽는다."
개죽음을 당하면 다음 생엔 겁쟁이로 태어난다. 어제 낮에 싸우다 죽은 둘은 다시 전사로 태어날 거지만, 밤에 죽은 놈과 방금 죽은 놈은 다음엔 겁쟁이가 될 것이다.
"몽둥이로 땅 두드리며 간다."
조금 추격이 느려져도 어쩔 수 없다. 하찮은 죽음으로 겁쟁이가 되고 싶은 전사는 없다. 조심한 덕분에 함정 몇 개를 파훼했고 살아남은 자 전원 무사했다.
그리고 밤이 빠르게 찾아왔다.
"모든 일엔 셋이 함께 움직인다. 모닥불에 장작 넣을 때도 셋이 함께 가라."
"조심할 필요 있을까? 벌써 멀리 도망갔을 텐데."
"겁쟁이로 태어나고 싶으면 맘대로 해."
두목의 말에 불만이 쑥 들어갔다. 해적들은 오줌 눌 때마저 셋이 함께 움직였다.
식사를 마치고 세 불침번이 먼저 잤다. 남은 해적들은 술을 마시며 조금씩 대화를 나눴다. 몇 시간 흘러 푹 잔 불침번들이 깨어난 후 남은 자들이 잠들었다.
"다시 태어날 때 겁쟁이 안 되려고 벌써 겁쟁이 됐어."
몇몇 해적은 과하게 조심스러운 두목에게 불만을 품었다. 정작 자신이 두목 된다면 똑같이 행동할 것이지만, 불만이 가득한 해적은 거기까지 생각할 머리가 없었다.
"그래도 돌아가자는 말은 안 했잖아. 계속 믿고 맡기자고."
조금 머리가 돌아가는 놈은 두목이 겁쟁이 역할을 해주는 게 고마웠다. 그래서 오히려 더 확고하게 지금 두목을 지지했다.
그때, 둥그런 물건이 날아왔다. 해당 방향을 주시하던 불침번이 빠르게 일어나 손에 든 몽둥이로 날아온 물건을 후려쳤다.
"뭐야!"
잠자던 해적이 모조리 일어났다.
"무슨 냄새야?"
썩은 음식에서 나는 역한 냄새가 퍼졌다. 그런데 묘하게도 자꾸 맡고 싶었다.
"우릴 못 자게 하려는 수작이겠지."
"그럼 그냥 자지 말자. 어차피 바다에서 며칠씩 못 자는 일은 자주 있잖아."
냄새를 풍기는 음식을 수습해서 멀리 던졌다. 그러나 여전히 냄새가 남아 해적들의 코를 괴롭혔다.
"우리가 올 걸 미리 알고 준비한 거 같은데?"
"그냥 상한 음식 버린 거겠지."
"지금 겨울이야. 음식이 아무리 상해도 저런 냄새는 안 나지. 여름이면 몰라도."
"잠깐, 무슨 소리 안 들려?"
"기사인가? 도망치는 놈들이 내기엔 너무 큰 소린데."
"들킬 걱정 없이 달려오는 걸 보면 기사 같아. 거긴 사냥개 있으니 우릴 따라왔겠지."
"아니야. 오크다."
기척이 조금 가까워지자 발 전체가 땅에 동시에 닿는 특이한 달음박질 소리와 오크 특유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봄가을마다 오크와 큰 싸움을 벌이는 해적이기에 헷갈릴 일은 없었다.
모습을 드러낸 오크는 몇 마리 되지 않았다. 해적들은 능숙하게 오크를 해치웠다. 해적 중에서도 명성이 어느 정도 되는 자들이 모인 무리기에 오크 몇 마리는 쉬웠다.
"문신 있다."
"이놈도."
"큰일이다."
이 추운 겨울에 숲에 남았다는 것만으로도 떠돌이 오크는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다. 가죽에 새긴 문신까지 확인하니 확실해졌다. 부락을 이룬 오크가 틀림없다.
"움직이자. 냄새 때문이라면 백 마리 이상 올지도 모른다."
해적들은 급히 짐을 수습하고 자리를 떴다. 오크의 역한 배변 냄새는 맡지 못했으니 오크 영역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도 마을 안에만 있는 게 아니듯, 오크의 수렵과 채집도 영역 안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해적들이 숙영한 곳은 오크들의 사냥 영역에 속한 모양이었다.
"저기 개울이 있다. 아까 음식을 손으로 만진 놈들은 손을 닦아 냄새를 없애라."
두목의 지시에 해적 몇몇이 냇물에 가서 손을 씻고 갑옷에 튄 음식물도 깨끗이 닦아냈다. 그때 가냘픈 슝 소리가 울리더니 해적 하나가 개울에 코를 박았다.
"저기다. 쫓아라."
도망치는 인영을 발견한 해적들이 무기를 들고 개울을 뛰어넘었다.
"유인이다. 추격하지 않는다."
두목이 나서서 말렸다. 두목의 말에 잠깐 멈췄던 자 중, 세 명이 다시 움직였다.
"이제부터 네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
"이제 어떻게 하지?"
"기사 무리에 합류한다. 강한 적이다."
두목의 말에 해적들은 바로 수긍했다. 해적들에게 있어 잘 죽이는 놈이 강한 놈이다. 지금까지 상대에게 아무런 피해도 못 주고 일방적으로 당했다.
기사에게도 상처 입힌 걸 보면 절대 약한 적이 아니다.
톰슨을 쫓던 세 해적은 금방 따라잡을 것 같았다. 그러나 톰슨은 시간이 흘러도 속도가 그대로고 세 해적은 갈수록 느려졌다. 초반에 좁혀지던 거리가 한동안 유지되다가 차츰 넓혀졌다.
"돌아가자."
"안 받아줄 거야. 계속 우리끼리 움직이자."
"그냥 돌아가. 땅으로."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존이 메이스를 들고 해적을 덮쳤다. 세 해적은 힘을 합쳐 존의 공격을 막았다.
메이스와 세 해적의 휜 칼이 부딪쳤다. 메이스도 베르크 대장간에서 산 괜찮은 물건이었지만, 해적들이 든 휜 칼도 제대로 만든 물건이었다.
존의 공격이 아무 성과도 없는 건 아니었다. 직접 피해는 입히지 못해도 바칸에게 틈을 만들어줬다.
뒤에서 몰래 접근한 바칸은 먼저 해적의 손목을 부러뜨렸다. 무기를 잡은 손이 아니지만, 손목이 부러진 통증은 쉽게 참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바칸은 뒤로 돌아서는 다른 해적 허벅지를 힘껏 걷어찬 다음 적당한 거리로 물러났다. 다시 메이스를 들고 호시탐탐하는 존 때문에 세 해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하나는 허벅지를 세게 차여 빠르게 움직일 수 없고 하나는 손목이 분질러져서 통증에 눈물이 글썽했다.
그때 슝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와 유일하게 멀쩡한 해적 다리에 꽂혔다. 화살을 다 쓴 톰슨은 바칸이 설계하고 미클이 만든 '석궁'이라는 물건을 소중하게 가죽으로 감싸서 등에 멨다.
톰슨까지 철퇴를 들고 접근하자 세 해적은 당황했다. 존 하나만 해도 셋이 힘을 합쳐 겨우 막아냈다. 그런데 상대는 셋으로 늘고 자신들은 셋 모두 부상으로 약해졌다.
"존."
바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존이 가까운 해적에게 접근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독한 마음을 먹은 해적은 존의 공격을 무시하고 휜 칼로 상대 목을 노렸다.
어느새 다가간 톰슨이 철퇴를 휘둘러 해적 손을 때렸다. 존 목으로 향하던 휜 칼이 허공을 날았다. 무기를 놓친 해적은 메이스에 머리가 터져 즉사했다.
바칸은 손목이 부러진 해적에게 다가가 브레이크 브레스를 펼쳤다. 바칸의 주먹이 가죽 갑옷을 때렸다. 해적은 캑캑거리기만 하고 호흡을 멈추지 않았다.
자세를 낮춰 얼굴을 노리는 휜 칼을 피한 바칸은 다시 갑옷을 때렸다. 이번엔 손에 전달되는 느낌이 달랐다.
명치를 세게 맞은 해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다리에 화살 맞은 해적은 누굴 도와야 할지 헤매다가 존의 메이스에 머리가 터졌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해적은 바칸이 자비를 베풀어 비수로 숨통을 끊었다.
"존, 조금 도와줘."
두 드워프는 시체 주변에 함정을 만들었다. 존은 둘을 도와 탄성이 강한 나뭇가지를 당겼다. 두 드워프는 꽤 심혈을 기울여 함정을 여럿 설치했다.
"자, 두 시간 전속력으로 달린 다음 휴식한다."
바칸 일행은 쫓기고부터 지금까지 한숨도 자지 않았다. 이쯤이면 상대가 쉽게 덤비지 못할 거란 확신이 생겨 좀 쉬기로 했다.
꽤 빠른 속도로 두 시간 달린 후 적당한 곳을 찾아 모닥불 지피고 바로 잠들었다. 잠과 휴식이 필요 없는 두 드워프는 때마침 투명하게 변한 슬라임 핵을 하나씩 삼키고 불침번을 섰다.
해가 중천에 뜨고 바칸 일행이 잠에서 깰 때까지 추적자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작가의말
며칠 있으면 글 쓴 지 2년이 꽉 차고 3년 차가 되네요. 3년 차에는 새롭고 색다른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천마의 외전 같은 글 써보겠습니다.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