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판
겔트의 왕성으로 비둘기가 분주히 드나들었다. 바칸은 겔트 왕실이 수십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훈련한 비둘기를 효율적으로 이용했다.
"부르크 군대 10만이 북상한다고?"
바칸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숫자였다. 저 정도 병력을 지원하려면 보급 부대도 최소 6만 규모는 되어야 한다.
"이유는? 뭔가 꿍꿍이 있는 거겠지?"
"부르크 교황이 치매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미그릭의 말에 바칸은 이마를 찌푸렸다.
"고딕 제국은?"
"카르챠 왕국의 병력을 펠릭 제국과 가까운 영지들에 보내고 제국 군대 2만 명을 카르챠 왕국으로 보냈습니다."
고딕 황제도 카르챠 국왕도 멍청이는 아니었다. 이들은 서로 변경을 바꿔 지키기로 했다. 기마병이 대다수인 카르챠 군대는 평야가 대부분인 제국 땅에서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고 바칸의 흰머리수리도 피할 수 있다.
고딕 제국의 2만 보병은 수비에 특화한 병과다. 중장보병과 경장보병 및 방패병에 궁수까지 적절히 섞여서 기마병의 돌진도 거뜬하게 막아내는 정예다.
"우리가 부르크를 해치우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고딕 제국이 우릴 공격할 겁니다. 우리도 성한 몸은 절대 아닐 테니깐요."
"펠릭 황제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그럴 겁니다."
바칸은 톰슨이 그리웠다. 톰슨이 있다면 미그릭이 진심인지 아닌지 쉽게 판단할 수 있었을 텐데.
"중요한 정보 하나 드리겠습니다. 겔트 지역을 저와 제 가문에 맡겨주신다면 말입니다."
겔트는 면적이 비나크나 게르메르 지역의 절반도 안 된다. 그러나 대부분 땅이 농지여서 왕국의 심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지역이다.
"어떻게 알았지?"
바칸은 봉건제 대신 중앙집권제로 지배 체제를 굳힐 생각이었다. 교통과 군사력 문제만 해결하면 봉건제보다 훨씬 효율적인 체제다.
그러나 혼자 구상만 했을 뿐 톰슨이나 미클한테도 얘기한 적 없었다.
"저뿐만 아니라 제국 출신 중 눈치챈 자가 꽤 많을 겁니다. 제국 황실에서 수십 년 전부터 연구해 왔거든요."
중앙집권제가 되면 영주의 권한이 대대적으로 줄어든다. 영주는 영지의 주인이 아닌 황실을 대신해 영지를 관리하는 고용직이 되는 셈이다.
반면, 경제적인 면에선 엄청난 이득이 있다. 영지들은 자체로 군사를 양성하지 않아도 된다. 치안 유지 정도의 병력만 유치하고 국방의 의무는 황실에 떠넘기면 된다.
황실에서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할 게 뻔하지만, 쓰지도 않는 병력을 계속 데리고 있는 것보단 훨씬 낫다.
겔트 왕실도 중앙집권제를 꿈꿔왔다. 그러나 게르크 교단을 중심으로 뭉친 평민 영주들과 동 겔트의 제국 출신 귀족들이 큰 걸림돌이었다.
현재는 게르크 교단을 없앴다. 아틀란티스 왕국이 부르크 제국까지 이겨버리면 중앙집권제 명분이 생긴다. 부르크 제국에 승리한 바칸은 평민 영주들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 할 수 있다.
아틀란티스 귀족 작위는 제국을 비롯한 다른 왕국에서도 인정받을 가능성이 크다. 제국이 임명한 귀족이 인정받는 것도 정통성 따위라기보단 강함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백작은 내가 부르크를 이길 거로 생각하는가?"
"저라도 이길 수 있습니다. 단, 부르크와 싸우고 나면 왕국군도 얼마 안 남을 겁니다. 국왕이라면 적은 피해로 적을 쉽게 처단할 것 같습니다."
"백작이 겔트를 대가로 요구할 정도라면 펠릭 황제에 관한 아주 중요한 정보겠지?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오르긴 하는데, 확실히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니까 백작의 제안에 응하고 싶어. 그런데 가문으로 넘기는 건 안 돼. 세습을 없애고 능력에 따라 역할을 분배할 거야. 미그릭 백작을 겔트 지역 초대 집정관으로 하는 건 약속할 수 있다. 겔트 지역을 잘 운영하고 후계자도 훌륭히 키워놓으면 자리를 물려줄 수 있을 거야."
미그릭은 잠깐만 주저하고 바로 입을 열었다.
"펠릭 황제에게 숨긴 병력이 있습니다. 3만 명 규모로 추정합니다."
"우클 부족?"
"그렇습니다. 저는 위치까지 대략 짐작하고 있습니다."
바칸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민했다.
"우클 부족은 부르크를 싫어하지?"
"그렇습니다. 우클 부족은 부르크를 아주 싫어합니다. 노예병으로 제국에 해마다 수천 명씩 끌려갑니다. 그리고 부르크로 개종한 카디스에게 자주 약탈당합니다. 우클도 잘 싸우긴 하지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갑옷으로 몸을 감싼 카디스한텐 부족하죠."
"우클은 주로 제국 내전에 이용되었고."
우클 부족은 부르크를 싫어하고 제국도 싫어한다. 제국은 그런 우클 부족을 노예병으로 데려다가 내부 정리용으로 써먹었다. 반란이 의심되는 지방 영주를 처리할 때 제국군보다 우클 출신 노예병을 보내는 게 훨씬 확실하다.
"부르크를 찌르기에도 좋고 고딕 제국을 찌르기에도 좋은 날카로운 비숩니다."
'펠릭 황제가 노린 게 이거였군.'
펠릭 황제의 목적은 부르크와 고딕이 손잡은 후 속에서부터 곪아 터지는 게 아니었다. 둘이 손잡고 아틀란티스를 공격할 때 우클로 둘 중 하나를 확실히 찌르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원래 그림은 아니지만, 어쨌든 펠릭 황제가 원하는 상황이 된 셈이구나."
그런데도 미그릭이 바칸에게 정보를 누설한 건, 펠릭 황제 쪽에도 뭔가 우환이 있다는 뜻이다.
"아틀란티스가 져야 펠릭 황제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겠지? 네 생각엔 아틀란티스가 질 것 같지 않으니까 나한테 정보를 누설한 거고."
"그렇습니다. 자세한 계획은 모르기에 더 드릴 정보는 없습니다."
'어쩌면 내가 오판하고 있는 것이 훨씬 많은지도 모른다.'
'내 목적이 우선이기에 시야가 좁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정보가 부족하니 모든 일이 뜻대로 되게 하려는 건 욕심이다.'
'그렇다면 제한된 정보를 통해 가장 안전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전쟁은 거래가 아니다. 큰 이득에 집착할 게 아니라 어떤 변수에도 대응할 수 있는 계획을 짜야 한다.'
"좋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겔트 지역을 너한테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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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의중을 모르겠습니다."
고딕 제국의 사령관은 케루치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야만족 출신으로 엄청나게 긴 이름을 쓰던 자인데 고딕 황제가 양자로 들였다.
계승권도 재산 분할권도 없는 양자지만, 덕분에 케루치는 자기 군사적 재능을 마음껏 뽐낼 수 있게 되었다.
"또 뭐가 궁금한데? 이 헛똑똑이들아."
케루치는 전략과 전술에 능하나 임기응변이 약하다. 전투 상황에 따라 계획의 변경이 불가피하기에 엄청난 인재들로 참모진을 구성했다.
"부르크와 아틀란티스의 싸움에 우리가 왜 낍니까?"
"끼는 게 아니라 주워 먹는 거지. 부르크가 공격하고 지나간 곳을 우리가 점령하는 거잖아."
"아틀란티스가 게릴라로 부르크를 괴롭히는 걸 막아주려고 그러는 거잖습니까. 부르크가 버티기 힘들 정도로 소모된 다음 지원을 구걸하면 마지못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초반부터 부르크를 돕는 건 참모 모두 이해하지 못한 결정이었다.
"활 쏴본 적 있지?"
"그럼요."
"활을 최대한 당겼을 때, 그냥 시위를 놔버리는 게 쉬울까 아니면 쏘는 걸 포기하고 천천히 놓는 게 쉬울까?"
"당연히 전자죠. 활은 당길 때보다 놓을 때가 더 힘든 건 상식입니다."
"펠릭 황제는 시위를 당겼다."
"이번 기회에 누구든 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아버지는 군사에 능하고 펠릭 황제는 행정에 능하다. 평화 시기라면 당연히 펠릭 황제가 더 낫겠지. 그러나 지금은 전쟁 상황이다."
"그런데 펠릭 황제가 다급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탈. 일부 멍청한 귀족이 부르크 교단과 내통한다는 정보가 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리고 부르크 쪽에도 우리와 내통하는 귀족이 있다고 압니다."
"상황이 달라. 우리 군대는 황제에게 충성한다. 그러나 펠릭 제국의 군대는 황제보단 영주에게 더 충성한다."
"그러니까 펠릭 황제는 시간을 벌어 군사력을 키워야 하는 거 아닙니까? 벌써 시위를 당기진 않을 거 같습니다."
"내가 왜 칼을 뽑았다고 하지 않고 시위를 당겼다고 했을까?"
"일회용?"
칼은 놓치기 전까지 계속 휘두를 수 있지만, 화살은 쏘면 끝이다.
"부르크의 손실을 줄인다. 펠릭 황제의 화살이 동쪽이 아닌 남쪽으로 향하게 한다. 최대한 부르크의 병력을 보전해 남쪽으로 돌려보낸다."
셋 중에서 가장 약한 펠릭이 웅크리고 힘을 키워야 하는 상황이다. 부르크든 고딕이든 펠릭과 먼저 전쟁을 벌이기 부담되기에 균형은 어정쩡하게 유지되어야 했다.
"어쩌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온 겁니까?"
"아틀란티스. 어디서 맹랑한 놈이 튀어나왔어. 펠릭 황제가 모험을 결심할 정도로 대단한 놈이 틀림없어."
"17세에 영주가 되었고 18세에 공왕이 되고 20세에 국왕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놈은 절대 아니죠. 정보에 따르면 군사가 4천이 넘는다고 합니다."
"플란코를 공격한 해적과 지르를 공격한 야만족 모두 아틀란티스 소속이라는 소문이 있어."
"드래곤을 잡았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게 문제야. 제국 황실이 드래곤 슬레이어의 핏줄이니까. 소문이 안 퍼지도록 통제하고 있긴 하지만, 하늘이 뒤집히는 게 아닌지 불안해하는 자들이 많아."
"우리가 개입하지 않으면 부르크가 질 수도 있다는 판단입니까?"
"그건 아니야. 10만 대군은 홍수나 가뭄과 같아. 미리 알아도 막을 수 없는 수준이지. 셋 목숨으로 하나만 바꿔도 승리니까."
"우린 정말 헛똑똑이들이군요. 사령관께서 말한 정보는 우리도 대부분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너희는 보고 싶은 것만 봐서 그래. 나처럼 시킨 일이나 확실히 할 생각뿐이면 오판하는 일은 없었겠지."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참모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부르크가 지면 어찌 될까요? 펠릭 황제가 부르크를 찌르고 아틀란티스가 부르크 군대를 섬멸하면 말이죠. 그때가 되면 우린 펠릭 황제와 아틀란티스를 동시에 상대해야 합니다."
케루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펠릭 황제가 부르크를 찌른 후 카르챠의 기병이 펠릭 제국의 수도를 찌르기로 계획했다. 그런데 네 말대로 되면 우린 펠릭 제국과 싸워야 한다."
"그사이 아틀란티스가 군대를 추스르면 큰일입니다. 싸움을 지켜볼 수도 있고 펠릭 황제를 도와 협공할 수도 있습니다."
"너, 나랑 함께 황궁으로 가자."
케루치는 급히 예복을 챙겨입었다. 참모 역시 케루치가 주는 예복으로 갈아입고 배에 탔다. 여덟 명이 노를 젓는 배는 물살까지 타고 강 위를 질주했다.
"계획대로 간다."
그러나 고딕 황제의 결심은 확고했다.
"아틀란티스가 부르크를 이기면 너희가 해치워라. 제국 정예 2만 명으로 신생 왕국 하나 어쩌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우리까지 지면요?"
케루치의 말에 고딕 황제는 눈을 매섭게 떴다.
"지다니!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이겨라. 겔트 지역이 곡창이니 거기를 점령하고만 있어도 승리일 것이다. 정 불안하면 공성 병기도 지원하겠다. 이 기회에 군대를 전부 황실 밑에 두고 중앙집권제를 실행할 것이다. 영광의 제국 역사는 향후 수백 년 더 지속할 것이다."
"이럴 거면 저는 왜 데리고 왔습니까?"
사령부로 복귀하는 배에서 참모가 툴툴거렸다. 황궁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질책만 받다가 그대로 나왔다.
"너나 나나 좋은 걸 배우지 않았느냐? 제국은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상황을 만들어 움직여야 한다는 훌륭한 말씀을 들었잖아."
- 작가의말
가장 큰 변수는 교황의 치매입니다. 기껏해야 2, 3만 정도 규모로 보낼 줄 알았는데 10만 대군이 출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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