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 타투
바칸은 지방 빼는 약물에 담근 오크 가죽을 자세히 살폈다. 발바닥 가죽 떼고 항문부터 배꼽까지 자른 걸 제외하면 전혀 손상이 없는 최고급 가죽이었다.
바칸이라면 굳이 배꼽까지 안 가고 더 짧게 자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클이 한 것보다 품질이 하나에서 두 등급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창 몸에 힘이 깃드는 나이여서 가끔 의도치 않게 힘 조절이 안 된다.
"대장, 언제 마무리해?"
오크 몸에 새겨진 17개의 문신. 명확히 보이는 건 13개다. 4개나 되는 문신이 흐릿한 점선으로 그려져 굵고 진한 선으로 그린 문신들 사이에 몰래 숨었다.
"문신과 문신이 겹쳤어. 겹친 문신끼리는 싸운단 말이지. 내가 잘못 그리면 오크와 다른 능력이 생길지도 몰라. 아예 능력이 안 생길 수도 있고."
겹치지 않은 문신은 셋밖에 없다. 남은 14개 문신은 많게 적게 겹쳤다. 문신 물감의 양을 잘 조절해야 차기 족장 혹은 주술사로 보이는 오크와 같은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족장 혹은 주술사의 문신이라면 절대 하찮거나 위험한 능력은 아니다.
"대장, 나도 떠버리한테 들은 건데 오크는 문신이 10개 안 넘는대. 문신이 많으면 오히려 허약해져서 쉽게 죽는다더라."
미클의 말에 바칸은 이마를 찌푸렸다. 오크의 타투에 관한 기억을 쭉 떠올렸지만, 미클이 방금 말한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바칸의 기억에 없다고 사실이 아닌 건 아니다. 그리고 가끔 기억이 틀리기도 했다.
"미클, 네 생각을 말해봐."
미클은 가슴을 쭉 폈다. 바칸에게 조언할 기회는 1년에 3번 이상 안 생긴다. 대부분 상황에서 바칸의 판단과 결정은 절대적이라고 할 정도로 정확했다. 그런 바칸에게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건 미클에게 큰 기쁨이었다.
"저 오크는 어쩌면 대족장 후보가 아니었을까?"
뜻밖의 말에 바칸은 오크 잡을 때 기억을 떠올렸다.
제국 동북 방면에 자리를 잡은 겔트 왕국은 북쪽에 '차가운 바다'를 둔 최북단 문명국이다. 겔트는 맹수도 몬스터도 다른 지역보다 훨씬 강하다. 겔트의 오크라고 하면 노련한 모험가도 고개를 흔들 정도로 질기다.
그러나 지금 가죽만 남기고 고기와 내장은 땅에 묻혀 비료가 되는 과정을 착실히 밟는 오크 정도로 질기진 않다. 17문신 오크는 트롤이라고 여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질긴 생명력을 보여줬다.
"대족장이 나올 만큼 이쪽에 오크가 많은 게 아니잖아."
바칸의 말에 미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영리한 편이긴 하지만, 아는 지식이 적어서 더는 추론을 이어갈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족장 하나에 주술사 하나인 오크 부족에서 대족장 후보를 키운다니. 언어 능력이 없다뿐이지 오크도 사회를 이룬 종족이야."
오크의 최대 문제점은 말을 못 한다는 것이다. 구강 구조가 자유분방하여 같은 단어를 들어도 제각각 다르게 발음한다.
그래서 족장과 주술사 그리고 대전사를 제외한 오크는 아예 말하지 않는다. 괜히 잘못된 정보로 무리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기에 현명한 오크 주술사는 일반 오크의 발언권을 없앴다.
지식의 전달은 인간이 주술 문신이라고 부르는 타투로 한다. 주술사가 그려주는 타투를 통해 지식을 본능처럼 몸에 새긴다.
타투를 많이 새길수록 현명해지고 강해진다. 만약 미클의 말이 사실이라면, 너무 많은 타투는 몸이 감당하지 못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
오크 부족은 대부분 타투를 가장 많이 새긴 자가 족장이 된다. 타투 수가 같다면 함께 족장 직을 수행한다.
"문신이 17개나 되는데 일반 오크라고?"
족장과 주술사 그리고 대전사는 배변을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일반 오크처럼 꾹 참고 영역 외곽까지 갈 필요가 없다.
정상 상황이라면 타투가 17개인 저 오크가 족장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저 오크는 외곽까지 나와서 용변을 했다.
"강제로 주술사 만드는 건가?"
바칸은 자신이 갖춘 지식을 총동원하여 추리했다. 고블린이나 오크는 지혜를 전달할 주술사가 없으면 큰 무리를 이룰 수 없다.
'큰 부족은 주술사 없어도 3대 간다'라는 말이 있다. 반대로 아무리 큰 부족이어도 주술사가 없으면 3대 안에 망한다는 뜻이다.
'오크가 멍청한 건 단순한 언어와 문자의 부재로 지식을 후대로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족장이나 주술사는 웬만한 인간보다 현명하다고 했다. 틀림없이 뭔가 있다.'
주술사는 문신이 하나도 없다. 자연의 축복으로 태어날 때부터 지혜와 지식을 갖춘다.
'주술사가 수명이 다 됐는데 새 주술사가 안 태어난 것인가?'
자신의 지식이 반드시 정확하다는 확신이 없기에 바칸도 자신 있게 추리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이유를 꼭 알아야 할 정도로 절실하지도 않았다.
'주술 물감이 아닌 일반 문신 물감이다. 문제가 생겨도 톰슨에게 큰 피해는 없다. 단, 성공해도 큰 능력이 생기진 않는다. 물감에 깃든 기운이 너무 약하니까.'
바칸은 복잡한 생각을 멈추고 타투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톰슨, 이거 다 네 복이야.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게 최고의 결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어. 이제부턴 네 운에 달린 거야. 네가 운 좋은 사람이길 기도해."
가장 많은 문신과 겹치는 17번째 문신을 완성한 바칸은 물감이 마르길 기다렸다. 양 손목을 밧줄에 묶여 나뭇가지에 매달려진 톰슨은 밥 좀 달라고 애원했다.
"나 사흘 굶었어. 서 있기도 힘들다고. 먹을 걸 좀 줘."
등과 배와 다리 그리고 얼굴과 목에까지 문신이 있기에 톰슨은 사흘째 밧줄에 묶여 선 자세로 생활해야 했다. 주술 물감이라면 지워질 걱정 없지만, 문신 물감은 뒤척이다 지워지거나 문신이 변형될 수 있다. 그리고 물감과 불량 반응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음식 섭취는 물론 금지고 물도 조금 마시게 했다.
"곧 끝날 거야."
"그런데 문신 엄청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나 하나도 안 아픈데?"
금방 끝난다는 말에 톰슨이 억지로 기운을 차렸다. 식사할 생각으로 입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존, 검은 물 담은 나무통 가져와."
미클이 비수로 나무 조각을 잘라서 만든 물통으로, 틈마다 물에 잘 불어나는 나무를 밀어 넣었다.
수분을 흡수한 나무 조각이 덩치를 부풀리며 틈을 막은 덕분에 겉모습은 볼품없어도 물은 전혀 안 새는 물통이었다.
"미클, 톰슨 입에 천 뭉치를 넣어. 혀를 씹으면 죽을지도 모르니까."
미클이 천 뭉치로 톰슨 입을 틀어막았다. 바칸은 나무 바가지로 존이 가져온 물통에 담긴 검은 액체를 가득 퍼서 톰슨 몸에 뿌렸다. 문신 물감이 검은 액체와 반응하며 적갈색으로 변했다. 바칸은 톰슨 몸에 검은 액체를 골고루 뿌렸다.
문신들이 연한 빛을 내면서부터 톰슨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적갈색으로 변한 문신이 톰슨 몸을 파고들었다. 거친 칼로 몸을 쑤시는 듯한 고통에 톰슨 얼굴과 목 그리고 몸 곳곳에 핏줄이 곤두섰다. 상상 이상의 통증에 가슴이 크게 부풀고 허벅지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톰슨은 입이 막혀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그저 손목을 묶은 밧줄에 매달린 채 양발을 요란하게 버둥대는 거로 아픔을 표현했다.
톰슨의 몸부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주 잠깐 세상을 깨부술 듯 난동을 부리곤 곧바로 기절했다. 문신들이 꿈틀거리며 반항을 멈춘 톰슨 몸으로 거칠게 파고들었다.
"대장, 괜찮은 거지?"
"응. 톰슨은 물감 적합도가 최상이었어. 체력은 우리 셋 합친 것보다 더 강해. 위험은 전혀 없어. 걱정할 건 다른 일이지."
"실패하면 톰슨이 다시 겁쟁이 될까 봐?"
미클의 말에 바칸은 고개를 저었다.
"톰슨은 리나 좋아했어."
리나는 마을 유일한 여자아이였다.
"리나가 톰슨에게 겁쟁이라고 별명 지어줬어. 톰슨은 리나가 거짓말쟁이 되는 게 싫어서 겁쟁이가 된 거야."
"리나가 죽었으니 이젠 톰슨은 겁쟁이 될 걱정이 없겠네?"
미클은 바칸의 신호를 받고 마을 밖으로 도망치면서 리나가 죽는 모습을 눈으로 봤다.
"그래. 내가 걱정하는 건 톰슨이 이상한 힘을 얻는 거야. 이상한 힘을 얻은 톰슨이 이상해질까 봐. 난 톰슨이 좋거든."
"대장, 나도 톰슨이 좋아."
존은 바칸의 말에서 불안을 느꼈다. 명확히 알 순 없지만, 톰슨이 이상한 힘을 얻지 않기를 바랐다.
약 15분 정도 시간이 흘러 모든 문신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몸에 파고들었다. 바칸은 밧줄을 풀어 톰슨을 나무에서 내린 다음 깨끗한 물로 몸을 씻겼다. 옷은 물론 갑옷까지 입힌 후 밧줄로 꽁꽁 묶어버렸다.
"미클, 나랑 존은 시장에 다녀와야 해. 순조로우면 이틀, 문제 생기면 사나흘 걸릴 거야. 우리가 오기 전에 네가 톰슨을 돌보고 감시해. 절대 밧줄 풀어주면 안 돼."
미클에게 신신당부한 바칸은 오크 가죽을 곱게 접어서 가장 큰 가방에 넣었다. 겉은 천을 세 겹 둘러서 평범해 보이지만, 안은 갑옷을 만들 정도의 품질 좋은 가죽을 대서 무척이나 튼튼했다.
바칸과 존이 떠나고 반나절 지나서야 톰슨이 깨어났다.
"미클, 왜 날 묶은 거야?"
"문신이 도망칠지도 모른대. 널 묶은 게 아니라 문신 묶은 거야."
"배고파."
미클은 동대륙에서 건너온 쌀에 밀가루를 섞어서 쑨 죽을 톰슨 입에 넣어줬다. 통발로 잡은 작은 물고기와 새우도 들어가 맛이 제법 구수했다.
"톰슨, 무슨 힘 얻었어? 바칸이 성공했다고 말했는데."
"모르겠어. 힘도 그대로고 머리도 총명해진 거 같지 않아. 평소 궁금했던 거 몇 개 생각했는데 여전히 모르겠어."
"톰슨, 너 지금 말 굉장히 잘해."
"아닐 거야. 오크는 말 못 하잖아. 그런데 말 잘하는 타투를 해서 뭐해?"
"족장이나 주술사는 말을 해. 제국어를 하는 오크도 있어."
톰슨은 죽을 세 사발이나 먹었다.
"미클, 너랑 대장은 말 잘하잖아. 말 잘하면 어떤 점이 좋아?"
"나랑 대장하고는 수준이 다르지. 나도 대장 따라 한 덕분에 이만큼 하는 거야. 대장 없었으면 나도 그저 그런 멍청이가 됐겠지."
"그렇구나. 말 잘하면 똑똑해 보이는구나."
"내 생각엔 말이지. 말 잘하면 다른 사람 말도 잘 알아들어. 덕분에 똑똑해 보이는 게 아닐까? 보통 대장 말에 질문하는 건 존이야. 그래서 존 별명이 멍청이잖아. 사실 마을 어른들도 대장 말을 못 알아듣는 건 똑같은데."
톰슨은 미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어렵기만 하던 미클의 말이 이해가 쏙쏙 되었다. 미클도 바칸처럼 똑똑한 게 아니어서 표현이 명확하지 않은데도 미클이 뭘 말하려는지 알아들었다.
밤이 되어 미클은 코를 골며 잤다. 그러나 낮에 반나절 기절해 강제로 잠을 잔 톰슨은 잠이 오지 않았다.
'미클은 나를 두려워하는 거 같아. 왜지? 겁쟁이 톰슨이 뭐가 두려워서? 설마 내가 벌써 흉포한 톰슨이 된 건가?'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지만, 예전처럼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예전엔 바칸의 말을 듣고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지금은 많은 생각을 하면서도 불편함이 없었다.
밤새 뒤척이던 톰슨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갑갑해. 밧줄 풀었으면 좋겠다.'
아침놀과 함께 눈을 뜬 미클은 몇 가닥으로 끊어져서 여기저기 널린 밧줄에 화들짝 놀랐다. 급히 살펴보니 톰슨은 코를 골며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몸을 불에 구운 새우처럼 구부린 톰슨의 얼굴은 아기 천사 같았다.
- 작가의말
문신 많은 사람과 함부로 시비 붙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본문에서 설명했습니다. 과학적 근거도 있으니 청룡 그린 아저씨 만났을 때 눈 피한다고 자존심 상할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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