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족의 후예
바칸은 적당한 크기의 얼음산에 기어올랐다. 차가운 기운이 신발을 뚫고 올라왔다. 바칸은 얼음을 다듬어 햇빛을 모았다. 한 점에 모인 햇빛은 가죽 주머니에 담긴 얼음을 녹였다.
얼음 녹인 물로 얼굴과 몸을 씻고 피에 절은 옷과 신발도 빨았다. 가죽 주머니의 핏자국까지 깨끗이 닦아낸 다음 알몸으로 옷과 신발이 어서 마르기만 애타게 기다렸다.
"큰일이다."
바칸의 피에 섞인 히드라 독이 바다뱀을 불러왔다. 바닷물이 차가워 바다뱀이 없을 거로 지레짐작했는데, 히드라 독의 유혹은 바칸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먼 곳에서 바다뱀들이 원정을 왔다.
바칸은 서로 몸을 비벼 체온을 얻으며 히드라 독이 섞인 바닷물을 꿀꺽꿀꺽 삼키는 바다뱀들을 지켜보며 얼음을 다듬었다. 손이 얼어서 감각이 무딘 상황에서도 다행히 부러뜨리지 않고 창 모양으로 깎아냈다. 끝을 적당히 뾰족하게 다듬은 바칸은 제발 덩치 작은 큰뱀이 오기를 기도했다.
히드라 독을 탐닉하던 바다뱀들이 갑자기 상체를 세웠다. 유일한 천적인 큰뱀이 나타난 것이었다.
큰뱀은 머리를 바다 밖으로 드러내고 헤엄쳤다. 바다와 닮은 푸른색 비늘이 머리를 덮었고 날카로운 이빨과 함께 세로로 쭉 째진 빨간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대가리와 목이 이어지는 곳에 난 세 개의 아가미가 기쁨으로 펄럭였다. 따뜻한 바다와 달리 바다뱀이 적게 사는 차가운 바다여서 포식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바칸은 얼음을 깎은 창을 들고 기회만 노렸다. 큰뱀이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뭉친 바다뱀을 삼키려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창을 힘껏 던졌다. 바칸이 던진 창은 큰뱀의 입천장에 작은 상처를 냈다.
두려움에 꼼짝도 못 하고 죽기만 기다리던 바다뱀들이 희망을 얻었다. 그토록 피하고 싶던 큰뱀 입으로 바다뱀들이 선뜻 뛰어들었다. 대부분은 큰뱀의 혀에 말려 목구멍을 넘어가 한 끼 식사로 전락했지만, 운 좋은 몇몇은 입천장에 난 상처를 파고들었다.
길이 60미터 됨직한 큰뱀이 세차게 몸부림쳤다. 상처로 들어간 바다뱀들이 물고 뜯고 독을 토했다. 아픔도 아픔이지만, 바다뱀의 독에 신경이 이상 작동하며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제발 여기서 끝나라.'
바칸은 주먹으로 얼음산 꼭대기를 부수며 제발 다른 큰뱀이 나타나지 않기만 바랐다.
큰뱀의 몸부림은 꽤 오래갔다. 그러나 점점 많은 바다뱀이 상처를 파고들면서 회생할 가망이 사라졌다. 바다에 저녁놀이 내려앉을 때 큰뱀의 버둥질이 멈췄다.
바칸은 얼음산 꼭대기에 판 구멍에 가죽 주머니를 넣었다. 채 마르지 않은 옷을 입고 가죽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어렵게 주머니 끈을 동여매 양팔이 겨우 드나들 틈만 남겼다. 그러고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귀에 똑똑히 들리는 촤르륵 소리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어쩌면 60미터짜리 큰뱀보다 더 큰 놈이 왔을지도 모른다. 얼음산에 구덩이를 파고 숨었기에 조금 안심이지만, 진짜 큰놈이면 얼음산까지 삼켜버릴 수 있다.
"큰뱀이다. 운이 좋구나."
쩌렁쩌렁 울리는 말소리에 바칸은 급히 주머니를 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길이 60미터의 '작은 배'에 사람 셋 타고 있었다.
둘은 키 20미터 정도의 성인으로 보였고 하나는 12미터 정도 되는 아이였다.
"내가 잡은 거다."
바칸의 말에 세 사람은 머리를 긁적였다. 특히 아이가 아쉬운 눈으로 계속 큰뱀을 힐끔거렸다.
"날 배에 태워주면 큰뱀을 선물로 준다."
###
"난 푸른 가시라고 해. 키 작다고 동년배들이 놀려서 엄마·아빠랑 먹을 거 구하러 나왔어."
푸른 가시가 큰뱀 고기를 씹으며 말했다. 바칸의 하루 식사를 우물거리면서도 말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언제 돌아가는데?"
"키가 14미터 되면 돌아가기로 했어."
거인족의 후예는 얼음섬에 산다. 얼음섬에 가봤다는 사람이 드물어 전설이나 설화로 취급된다.
이들의 배는 정령의 힘으로 바다에 뜨는데, 얼음섬과 일정 거리 떨어지면 배가 가라앉는다. 그리고 거인족의 후예는 태생적으로 수영할 수 없다.
얼음섬에 그냥 나무도 있는데, 그냥 나무로 만든 배는 거인족이 타면 쉽게 부서진다.
브릭섬까지 태워달라는 요청이 위의 이유로 거절당한 후, 바칸의 목표는 얼음섬 일반 나무로 배를 만들어 브릭섬까지 가는 것으로 정해졌다.
"아무거나 먹으면 키가 잘 자라?"
"아니. 큰놈을 먹어야 해. 크게 자라는 놈은 유전자가 특별하거든. 그런 놈을 섭취해야 키가 잘 자랄 수 있어."
푸른 가시의 부모는 큰뱀 고기를 끊임없이 흡입하는 아들 모습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그때 고기를 굽던 불의 정령이 툴툴거렸다.
"누군 입이 없나. 나도 정령석 먹을 줄 안다고."
말하면서 힐끗힐끗 쳐다보는 모양새가 바칸 목에 걸린 정력석이 탐나는 듯했다.
"쉬운 일 하면서 뭔 불평이 그리 많아."
금속의 정령은 큰뱀 비늘과 뼈에서 금속 성분을 추출했다. 푸른 가시 부모가 바칸에게 보답으로 금속 갑옷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그냥 불을 지펴 고기를 익히는 불의 정령보다 금속의 정령이 하는 일이 백 배는 어렵고 고단했다.
"불의 정령이 쫓겨났다는 건 정확히 무슨 의미야?"
문득 주술사의 예언이 생각난 바칸이 질문했다.
"정령은 다른 세상이 우리 세상에 비춘 그림자 같은 거다. 우리 세상은 거울이 많다. 그래서 정령도 많은 거야."
푸른 가시 아버지가 대답했다.
"거울?"
"너희가 신이라고 부르고 모시는 존재. 우린 거울이라고 부른다. 거울이 너무 많으면 세상에 정령이 넘친다. 자기 세상보다 다른 세상 존재가 더 많아지면 멸망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거인족은 거울을 부수고 다녔다."
"예전에는 신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는 말이야?"
"그래. 그런데 멸망한 용족이 농간을 부렸다. 거인족은 세상을 보호하고 용족의 음모를 부수려고 둘로 갈라졌다. 우린 얼음섬에서 정령 숫자를 조절하는 역할이고 너흰 용족의 음모를 부수는 역할이지. 지금까진 잘하고 있어."
바칸은 갑자기 몰려오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넌 들을 준비가 안 됐구나. 이 이야긴 그만해야겠다."
"불의 정령이 쫓겨난 게 무슨 의민지는 말해줄 수 있지?"
"어느 별인가 화재로 1/7이 불탔어. 그래서 얼음섬에 불의 기운이 강해졌다. 얼음섬의 균형이 깨지면 거울이 날뛸 수 있으니까 일부 기운을 추방한 거야."
60미터 되는 큰뱀 고기를 거의 혼자서 해치운 푸른 가시는 벌떡 일어서서 아버지한테 다가갔다. 키를 잰 푸른 가시는 13센티나 자랐다면서 기뻐했다.
바칸의 정령석을 탐내던 불의 정령은 섬으로 돌아가고 금속의 정령만 남아서 계속 일했다.
"그거 나 조금만 먹으면 안 될까? 그럼 저 송곳니로 무기 만들어줄게."
금속의 정령의 말에 푸른 가시가 끼어들었다.
"함부로 힘을 키우지 않는다. 너도 쫓겨나고 싶어?"
"우린 힘이 약해서 조금 키워도 괜찮아."
"규칙은 규칙이야. 한 번만 더 그러면 족장한테 일러바칠 거야."
금속의 정령이 툴툴대면서 추출을 끝낸 큰뱀 비늘을 바다에 던졌다. 금속 성분을 추출했는데도 여전히 무거운지 빠르게 가라앉았다.
###
"바칸, 너 정말 대단하구나."
푸른 가시 아버지가 지름이 5미터나 되는 조개를 건졌다. 그런데 껍데기가 너무 단단하여 깰 수 없었다.
바칸이 브레이크 메탈로 결합부를 부숴서 껍데기를 쉽게 열었다. 안에는 커다란 관자와 더불어 바칸 주먹보다 더 큰 오색 진주가 있었다.
"다섯 살짜리 진주야. 바칸 네가 가져."
진주가 어느 정도로 자라면 줄어든다. 줄어든 진주는 다시 자라다가 어느 정도에 이르면 또 줄어든다. 오색 진주는 다섯 번 줄어든 진주로 푸른 가시는 다섯 살이라고 표현했다.
바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진주를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가죽 주머니에는 진주뿐 아니라 투명 산호도 있고 표범상어 가죽도 있었다.
조개관자를 먹은 푸른 가시가 또 키를 쟀다. 그간 그렇게 먹었는데도 아직 13미터를 안 넘었다.
"장어 잡으러 가자. 애가 배 거의 찼어."
푸른 가시의 위장이 한계에 이르렀다. 아무거나 먹지 않고 음식을 까다롭게 고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섬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음식을 장어로 정했다.
바칸은 이동하는 사이 다리를 틀고 마나 호흡을 했다. 오우거와 싸우다가 굳었던 마나도 다 풀렸고 새로운 마나도 듬뿍듬뿍 쌓였다.
'불, 물, 땅, 나무, 금속. 얼음섬과 가까운 곳이어서 수련 효과가 좋구나. 그런데 차갑고 어두운 거랑 뜨겁고 밝은 건 뭐지? 달이랑 해를 말하는 건가?'
"바칸, 장어 낚시 도와줄 수 있어?"
"내가?"
이들이 잡으려는 장어는 백 미터가 넘는 대물이다. 낚시든 작살질이든 바칸이 도울 일은 전혀 없다.
"셋이 교대로 장어 힘을 뺄 거야. 장어는 자기 영역을 절대 떠나지 않거든. 장어를 영역에서 끌어내면 우리 승리야. 푸른 가시랑 힘을 합쳐줘."
넷은 배를 세워두고 작은 섬에 올랐다. 바칸에겐 작게나마 섬이지만, 이들에겐 갯바위 정도로 볼 수 있는 크기였다. 미끼를 바늘에 달고 슬슬 장어 영역으로 흘려보냈다. 이틀 정도 기다린 후에야 장어가 미끼를 삼켰다.
푸른 가시 아버지가 줄을 잡고 버텼다.
"바위에 묶어두면 줄이 터져. 장어의 움직임에 따라 당기거나 버티거나를 조절해야 해. 푸른 가시는 경험이 적으니까 바칸 네가 당길지 버틸지 결정해."
아버지가 지치자 어머니가 대신 줄을 잡았다. 팽팽할 때는 버티고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당겼다. 장어의 힘이 훨씬 강하지만, 장어는 뒤로 헤엄쳐야 하기에 가진 힘을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푸른 가시. 넌 버티기만 해. 당기는 건 내가 할게."
푸른 가시가 뒤에서 힘으로 버티고 바칸은 앞에서 줄을 좌우로 흔들며 장어의 화를 돋웠다. 지치면 쉬기도 하던 장어는 바칸의 얍삽한 도발을 못 참아내고 다른 때보다 체력을 훨씬 소모했다.
그 뒤로는 세 거인족의 후예가 번갈아 버티고 바칸이 앞에서 줄을 당기고 흔들며 도발했다.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이틀 만에 장어를 영역에서 끌어냈다.
영역을 벗어난 장어는 축 늘어져서 몸도 제대로 못 튕겼다.
"꼬리는 아버지가 먹고 머리는 내가 먹고 몸통은 네가 먹어라. 바칸은 염통 줄게."
불의 정령 다섯이 나타나서 고기를 열심히 구웠다. 길이 140미터 되는 장어는 뼈가 얼마 없고 비늘도 얇아서 온통 고기뿐이었다.
바칸은 자기 몫으로 차려진 염통구이를 입에 한 조각 넣었다. 염통 조각은 끓는 기름에 넣은 얼음처럼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액체가 되어 위까지 흐르더니 활화산처럼 들썩였다.
바칸은 황급히 다리를 틀고 호흡법을 했다. 장어 염통에 가득하던 마나가 조금씩 바칸에게 흡수되었다. 바칸에게 부족한 불의 마나와 금속의 마나가 빠르게 보충되었다. 균형을 이룬 다섯 기운은 장어 마나를 통해 고르게 성장했다.
바칸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얼음섬으로 가는 중이었다. 두리번거리는 바칸에게 푸른 가시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 염통이 너무 맛있어 보여서 내가 먹었어."
어느새 키가 15미터로 자란 푸른 가시를 보면서 바칸은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유전자 어쩌고 하더니. 결국엔 마나를 섭취해서 덩치를 불리는 거였구나.'
"대신 원하는 거 하나 들어줄게."
"거력의 문신이랑 문신 물감 줘. 아기용으로."
아기용 문신과 물감이면 존에게 적합할 것이다.
- 작가의말
고대하던 갑옷 기연을 드디어 만났습니다. 정령이 만든 갑옷 기대해 주세요.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