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나크 공작
바칸은 다미앙과 함께 비나크로 향하는 배에 탔다. 배로는 사흘거리, 발로 걸으면 최소 20일 걸렸다.
"이 지역은 왜 비나크라고 이름 지은 거야? 공작의 마을이 생긴 건 40년 정도밖에 안 된 일이라고 들었는데."
"비나크는 원래부터 여기 살던 사람들이 따르는 신의 이름이야. 비나크와 베르크는 부부 신이지. 중심지는 베르크라고 이름 짓고 지역은 비나크라고 지었어. 공작이 와서 마을 차지하고 지역 이름을 따서 비나크라고 한 거야."
"바칸, 넌 이런 걸 어떻게 알아?"
"글쎄. 어릴 때부터 알던 것들이라서."
"그럼 비나크 공작은 왜 바하처럼 좋은 자리를 두고 지역 외곽에 마을을 세운 거야?"
"왕실 지원을 받아야 하니까. 거긴 수도하고 물길이 잘 뚫려있어. 그리고 바하는 예전에 베르크에 눌려서 기도 못 펴는 작은 마을이었어. 그냥 베르크로 가는 길에 잠깐 머무는 경유지였지. 그리고 40년 전이면 베르크가 꽤 강하던 시절이야. 왕실도 함부로 못 할 영지여서 공작이 일부러 거리를 둔 거 같아."
베르크 곁을 지나던 물줄기가 바하 쪽으로 틀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공작을 제대로 설득할 자신 있어?"
"상대가 멍청이만 아니라면."
배로 사흘거리라고 하여 사흘 내내 배를 타는 건 아니다. 배가 낮에만 운항하기에 밤이 되면 마을에서 자야 한다.
"시장 가자."
곧 해가 질 시간임에도 시장에는 사람이 북적였다.
"처음 보는 광경인데? 보통 늦은 시간엔 사람이 없잖아."
"율족이야. 평생 보기 힘든 신기한 물건이 많을 거야. 어두워지면 동대륙의 등롱이라는 물건으로 빛을 만들어."
율족은 동대륙과 서대륙 중간 위치의 섬에 사는 부족이다. 양 대륙 사이를 오가는 배는 반드시 율족의 섬에서 물과 음식을 보충해야 한다.
덕분에 율족의 섬은 술과 보존성 좋은 음식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서대륙 사람들이 남대륙에 대거 이주하면서부터 동대륙으로 향하는 배가 줄었다. 동대륙에만 나는 줄 알았던 물건을 남대륙에서 꽤 많이 발견했다. 멀고 위험한 동대륙 한 번 다녀오는 것보단 남대륙을 세 번 다녀오는 게 훨씬 나았다.
그때부터 율족은 직접 배를 만들어 동대륙과 서대륙 사이 무역을 했다. 이제 와서 동대륙과 서대륙 사이 무역은 율족이 독점하다시피다.
"이거 얼마지?"
바칸의 질문에 10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가 고개를 돌려 뭐라고 외쳤다.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꼬마가 해맑게 웃으며 '3실버'라고 어눌한 제국어로 여러 번 반복했다.
"꼬마야. 이건 1골드에 팔아야 하는 물건이야."
바칸은 금화 하나를 꺼내 꼬마에게 건넨 다음, 손가락으로 투명도가 낮은 보석을 가리키며 '1골드'를 반복했다.
꼬마는 금화를 들고 황급히 뒤로 달려갔다. 바칸과 다미앙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격렬하게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싸우는 게 아니야. 섬에 살다 보니 목청이 큰 거야. 바람 소리나 파도 소리 때문에 조용한 대화가 어려운 곳이거든."
"그냥 3실버에 사면 97실버 이득 보는 거잖아. 왜 멍청한 짓을 하는 거야?"
다미앙이 소리를 낮춰 질문했다.
"너라면 3실버로 알았던 게 1골드에 팔리면 어떻게 할 거야?"
"당연히 창고에 있는 거 다 꺼내서 팔고 싶겠지."
"창고뿐이겠어? 다른 율족 상인에게서 물건 사다가 나한테 넘길 거야. 그럼 난 97실버가 아니라 수십 골드 이득 보는 거고."
다미앙은 그제야 바칸이 산 물건이 고작 1골드짜리가 아님을 알았다.
"뭔데?"
"모양으로 구분이 안 돼. 괜히 비슷한 걸 마구 사들이지 마. 크게 손해 볼 거야."
바칸은 우연히 구한 정령석을 목걸이의 슬롯에 꽂아 넣었다. 해와 달의 정기를 받아 투명해지면 락이나 링에게 먹일 작정이다.
잠시 후, 꼬마가 나와서 바칸 손을 꼭 잡았다. 바칸이 어디에도 못 가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바칸은 다미앙과 함께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아 평소 보기 힘든 물건을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한참 지나서 20대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이 헐떡이며 달려왔다. 바칸 앞에 멈춘 청년은 보자기에 담은 구슬을 좌판에 쏟았다.
바칸은 구슬 네 개 고른 다음 4골드 지급했다. 청년과 아이는 흰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내가 사는 곳이야. 다음 해엔 여기도 들러줘. 여기 오면 2골드."
바칸은 비나크 지역 지도를 꺼내 지금 있는 위치와 바하를 찍은 다음 황무지가 있는 곳을 찍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강을 따라 줄을 죽 그어 오는 길도 알려줬다.
"여기 오면 2골드. 알아들었어?"
꼬마가 고개를 신나게 끄덕였다. 바칸은 은화 하나 꺼내서 꼬마에게 팁으로 준 다음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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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은 바칸이 예상했던 것보단 조금 늦게, 다미앙이 생각했던 것보단 엄청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의 왼쪽 가슴엔 바칸이 집사를 통해 선물한 강철 메달이 달려있었다. 손님 만나는 자리에 상대 선물을 갖고 나온다는 건 매우 우호적인 제스처다.
"비나크의 공작 율도르다."
"향사 바칸이다. 비나크 교단에 마을 설립을 신청했으니 곧 작위가 생길 거다."
"제국 남부 출신 향사 다미앙이다. 바하 상인 조합 소속이다."
인사를 나눈 공작은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마을 위치를 보니 비나크에서도 가장 동쪽이던데. 왜 가장 서쪽에 있는 비나크 교단에 와서 마을 설립을 신청한 거지? 뭔가 마을에 하자가 있는 것인가?"
바칸은 자신이 베르크 영지의 계승권자였음을 밝혔다. 뮬리치의 압박으로 독립하게 되었으나 뮬리치와 바하 영주의 음모에 목숨을 잃을뻔한 일을 적당히 각색해 들려줬다.
"이런 이유로 베르크나 바하 교구는 찾아갈 수 없다. 다른 교구들도 이 둘의 입김에 자유롭지 못할 거 같아서 비나크 교구를 찾아왔다."
공작이 화난 얼굴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평민 출신 영주가 감히 고귀한 귀족을 죽이려고 들다니."
공작은 베르크 자작과 바하 영주가 연합한 일을 최근에야 알았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 이해 못 할 선택도 아니라고 여겼다.
그런데 감히 귀족을 죽이려 했다는 말에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목숨 보전하려고 여기저기 붙는 건 너그럽게 봐줄 수 있지만, 감히 귀족을 해하려는 행동은 용서가 어려웠다.
"그럼 독립하려던 마을은 어떻게 됐지?"
"바하 영주가 가져갔다."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민 영주가 더러운 수단으로 귀족 영주를 공격한 다음 마을까지 빼앗은 일이다.
안 그래도 평민 영주들끼리 뭉쳐서 은근히 시비를 걸어오는 분위긴데 그냥 좌시하면 천한 자들이 더 날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을을 찾아주길 바라는가?"
"아니다. 어차피 거기에선 베르크와 바하의 등쌀에 살기 힘들다. 그리고 새로 마을 세우려는 곳에 드워프가 있다. 운 좋게 돌을 구해서 독점 계약을 맺었다."
공작의 얼굴에 환희와 실망이 빠르게 교차했다. 드워프 장신구는 제국이 유일 공급처였는데 드디어 겔트 왕국에도 하나 생겼다.
귀족 행사에선 몸에 드워프 장신구를 몇 개 달았는지로 상대를 평가한다. 수준에 어울리지 않게 드워프 장신구를 사들인 멍청이는 알아서 자멸하기에 대부분 상황에선 드워프 장신구 숫자가 곧 실력과 능력의 척도다.
드워프 장신구를 구매할 수 있는 경로가 생겼다는 건 좋은 일이다.
실망은 독점 계약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그 말은 다른 사람이 드워프가 원하는 돌을 들고 찾아가도 계약을 안 해준다는 말이다.
"네 선물과 귀족 품위에 어울리는 보답을 하고 싶군."
공작은 더러운 수단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내 마을 신청 허가가 빠르게 났으면 한다."
"마침 저녁에 주교랑 식사 약속이 있다. 좋게 말해주지."
"드워프 장신구 판매는 여기 다미앙이 맡아서 한다. 올해 6월 1일에 내 영지에서 일 년 동안 모은 장신구를 판매할 거야. 대략 10개 정도로 생각하는데 공작에게 초대장을 부탁하고 싶다."
"이건 오히려 내가 부탁해야 하는 거 아닌가?"
드워프 장신구 팔고 싶은데 살만한 사람을 섭외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공작은 드워프 장신구를 판매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초대장을 무기로 휘두르며 이익을 취할 수 있다.
"원래 부탁이란 건 서로 이득이 되게 하는 게 기본 아니겠어? 여기 도움 되는 부탁 하나 또 있어."
바칸은 어음을 꺼내 공작에게 내밀었다.
"다미앙한테 듣자니 바하 길드가 요즘 말을 잘 안 듣는다지?"
"그런 면이 좀 있긴 하지."
"이걸로 압박해. 대신 공작이 3백 골드 어치의 식량을 내 영지까지 배달해줬으면 해."
"재밌는 친구야. 거래할 맛이 나. 이런 부탁이라면 열 개도 더 들어주지."
"이건 노예 문서. 베르크 영지에서 노예 8천 데려갈 수 있지."
"이건 감이 안 잡히는데? 설명 좀 부탁해도 될까?"
"몬스터 토벌할 봄이야. 쓸모없는 노예는 몰이나 유인에 끌려갈 거야. 그런데 갑자기 8천이나 되는 노예를 데려가면 어떻게 될 거 같아?"
"건장한 노예는 내주기 싫겠고, 쓸모없는 노예를 내주자니 건장한 노예를 죽음으로 내몰아야겠고. 치명적이진 않지만, 여러모로 귀찮겠군."
"쓸모없는 자들은 바하에 그냥 버리고 가도 되고."
8천 명이 갑자기 늘어나면 바하의 치안이 엉망으로 변할 것이다.
"대신 제국에서 온 노예를 좀 줘. 100명 미만으로 가져갈게."
"좋아."
바칸의 거래는 끝나지 않았다.
"이건 가죽 10만 장에 대한 권리 문서."
"어떻게 해주면 돼?"
"원래는 재산 분할 때 내가 가져가기로 한 물건이었어. 품질이 낮아서 대략 3천 골드 정도 가격일 거야. 오랜 가죽이 많아 썩어서 버려야 할 것까지 계산하면 2천4백 골드 정도 가치밖에 안 해."
율도르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칸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뮬리치와 바하 영주가 손잡았어. 그리고 바하 영주가 가죽을 처분해줬지. 정확한 액수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아마 베르크 자작은 2천 골드를 받았을 거야."
"가죽이 없는 베르크 자작한테 가서 가죽을 내놓으라 한다?"
"가죽이 없으니까 돈으로 달라고 해야지. 요즘 시세대로 계산하면 7천 골드까지 받을 수 있을 거야."
율도르는 양손으로 탁자를 부여잡고 낄낄 웃었다.
"네가 하면 콧방귀도 안 낄 테니 나보고 해달라는 거지? 수수료는 얼마?"
"돈은 공작이 다 가져. 대신 배 몇 척 팔아줬으면 해."
배는 크기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7천 골드면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배로 가장 작은 걸 20척 정도 살 수 있다.
"적재량이 많은 배로 5척만 줘."
그러나 배는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배는 아무한테나 팔지 않는다.
"적재량이 많은 배 5척이래 봤자 3천 골드도 안 하는데."
"어차피 원래 받아야 할 돈이 그 정도니깐. 대신 튼튼한 거로 부탁할게."
"좋아. 모든 게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율도르는 이번 거래에 정말 흡족했다.
"받기만 하는 건 품위에 어긋나는 일이지. 전쟁 노예가 있는데 다룰 자신 있어?"
전쟁 노예는 다루기 어렵다. 자질구레한 일엔 쓰이지 않고 전쟁에만 동원된다.
전투가 빈번한 시기엔 없어서 안달이지만, 평화가 긴 요즘 같은 시기엔 밥 축내는 애물단지다. 어려서부터 싸우는 법만 익힌 자들이어서 그냥 풀어주는 것도 부담이다.
"얼마나 있는데?"
"200명 정도. 반년 전에 제국의 친구한테서 선물로 받았지."
- 작가의말
그냥 쓰레기나 다름없던 노예 문서랑 가죽 문서를 처리했습니다. 동시에 베르크 자작과 바하 영주에게 빅똥을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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