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과 도주
"세상의 모든 거래를 공평하게 주관하는 게르크시여. 당신의 신실한 종이 진실한 마음을 담아 기도를 올립니다. 부디 제 작은 마음이 담긴 헌금을 기쁘게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칸의 흠잡을 데 없는 기도문에 성직자는 깜짝 놀랐다. 왕국 수도의 교단 본부에서 수련할 때도 이 정도로 존대를 잘 사용하는 신자는 드물었다.
심지어 일부 성직자보다도 훨씬 능숙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참으로 신실한 형제시군요."
바칸의 손에 들린 금화를 받은 성직자가 손끝을 바르르 떨며 찬사를 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너무 큰 금액에 놀라 손 떠는 줄 알겠지만, 사실은 진짜 금화인지 무게를 가늠하는 것이었다. 큰 헌금이 가끔 들어와서 능숙한 바하 교구의 성직자와 달리 베르크 성직자의 손 떨림은 조금 어수선했다.
"속세의 끈을 끊고 몸과 마음 다하여 신께 봉사하는 형제님들만 하겠습니까. 신께서 제게 모실 자격을 부여하지 않아 형제님처럼 매일 신의 품에서 기도를 드리고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게 한입니다. 제 작은 성의가 형제님들이 신께 다가가는 여정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길 바랄 뿐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시군요. 신께 다가가는 길의 험난함에 가끔 약해졌던 저를 돌아보게 합니다. 형제님의 이름을 꼭 기억하고 싶군요."
"저는 '오크 부락이었던 마을'의 영주 자격을 신청하러 온 바칸이라고 합니다. 제 마을도 규모가 커져서 교구가 생긴다면 형제님처럼 신실한 분을 주교로 모시고 싶군요."
"신의 뜻을 더 넓은 땅에 퍼뜨리려고 노력하는 분이셨군요. 얼른 안으로 드시지요."
바칸은 성직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외관과 달리 내부는 간단하고 실용적이었다. 과일주를 마시며 잠깐 기다리니 하얀 성복을 입은 주교가 방으로 들어왔다. 바칸은 자리에서 일어나 훌륭한 자세와 정확한 순서로 성직자 식 인사를 올렸다.
주교는 손에 든 지도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믿음이 깊은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최우선으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주교는 1골드의 헌금을 받은 대가로 바칸의 신청을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 줄 것을 약속했다. 이것도 일종의 '거래'다.
물론, 딱 1골드까지만 편의를 봐줄 것이다. 자격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고작 1골드로 어떻게 할 수 없다. 그저 정해진 절차를 평소보다 빠르게 진행할 뿐이다.
바칸은 지도에 마을 위치를 표기했다. 그리고 필요한 정보를 전부 적었다. 영주성이 석조이고 3층 건물이라는 정보에 주교도 꽤 놀란 눈치였다.
"오늘은 늦었고, 내일 출발할 겁니다."
한 명의 성직자와 두 명의 신성 전사가 마을로 가서 자격 심사를 할 것이다.
식수, 농지, 안전 세 가지는 필수로 볼 것이고 교통을 부차적으로 살핀다. 크게 확장할 것 같은 마을이면 미리 교단 건물을 지을 부지를 선점하기도 한다.
"거리는 베르크와 가깝지만, 길은 바하 쪽으로 더 잘 닦여있습니다. 베르크 영주께 잘 말씀해 주셔서 길을 좀 닦았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거리가 가까운 베르크 교구에 속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말씀이지요. 바하 교구는 관할 마을이 너무 많아서 더는 여력이 없다고 합니다."
마을은 소속 교구에 세금을 바친다. 영주의 세금처럼 명확히 정해진 건 아니지만, 관례처럼 굳어져서 안 바치는 마을이 없다.
그리고 교단은 계절마다 선언문을 마을에 판매한다. 각 마을의 상황과 영주의 요구에 따라 선언문을 작성해 꽤 비싼 값 받는다. 일 년에 딱 네 번이지만, 역시 무시하기 힘들 정도의 수익이다.
바하 교단에 절대로 빼앗기고 싶지 않다.
작성한 문서가 사실이라면, 3층짜리 영주성을 지을 정도로 재력이 만만치 않다. 게다가 원래 오크 부락이었다고 하니 식수는 물론 농지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단지 수렵과 채집만으로도 오크 부락을 먹여 살렸는데 농경지까지 만들면 수백 명 규모의 마을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유일하게 걱정되는 건 안전이다. 오크 부락이었던 곳이어서 몬스터들에겐 인간의 영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오크의 영역 표시가 약해지면 별의별 몬스터가 다 집적거릴 것이다.
'만약 그걸 막아낼 정도 무력까지 있다면?'
주교는 놀란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과일주를 담은 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마음이 진정되어 표정을 푼 다음에야 입을 살짝 댄 과일주를 내려놓았다.
'자작에게 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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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크는 생긴 지 오랜 마을이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그저 '100년이 넘은 마을'로 수식한다.
영주성과 멀지 않은 곳에 교단 건물이 있다. 그리고 밑으로 농지가 넓게 펼쳐졌다. 농지 아래로는 영지민의 거주지가 있고 그 아래엔 노예 거주지가 있다.
노예 거주지를 지나면 또 농지가 나온다. 일부 땅은 휴경하는 건지 아무것도 심지 않았다. 그리고 산자락의 목장에는 양 수십 마리와 소 십수 마리가 보였다.
농지를 지나면 거주지가 나온다. 영지민과 자유민이 섞여서 거주하는 곳으로 시장이 매일 열린다. 바하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사람이 꽤 붐볐다.
있는지 확실치 않은 미행을 따돌리기엔 가장 적합한 곳이다.
갑작스럽게 골목으로 빠져들어 간 바칸은 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방향 전환을 자주 했다. 방향을 선택하는 데 약간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아 굉장히 길을 잘 아는 사람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상하게 엮여선.'
떠버리의 일만 아니었어도 이토록 조심할 건 없었다. 오히려 미행이 따라붙기를 바라고, 미행하는 자를 마을 근처까지 유인하려 했을 것이다.
"잠깐 멈추거라."
바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처음 보는 잔데 누군지 대뜸 알았다.
"무슨 일인데? 나 여기 영지민도 아닌데 말이야."
소문으로나 듣다가 몇 달 전에 멀찌감치 실루엣만 봤던 금속 갑옷이었다. 투구나 신발 그리고 하체 갑옷은 입지 않았다. 상체에 입은 금속 갑옷도 몸통만 보호하는 거고 팔 부위는 없었다.
콧대가 높고 콧구멍이 큰 건 제국인의 특징이다. 눈과 눈썹 사이 거리가 가깝고 눈동자가 상대적으로 작은 것도 제국인 특징이다.
'3년 전에 베르크 자작 밑으로 들어갔다고 했지. 제국은 훨씬 전부터 문제가 컸나 봐.'
"자작이 널 보자고 한다."
"네 자작이지 내 자작은 아니야. 급한 일이 있으니 다음에 방문한다고 전해라."
금속 갑옷은 허리에 찬 제국검을 끌러 부하에게 건네고 바칸을 향해 다가왔다. 날이 무려 1미터 30센티나 되는 제국검은 겔트 왕국의 기술로는 흉내조차 내지 못한다.
"자작이 널 보자고 한다."
바칸과 가깝게 접근한 금속 갑옷이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바칸은 오른발을 앞으로 크게 내디디며 왼쪽 주먹을 뻗었다. 상대의 반응에 따라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오른쪽 팔꿈치로 연이어 공격하거나 뒤로 물러나며 들어오는 상대에게 카운터를 먹일 수 있는 꽤 훌륭한 기술이었다.
'제길.'
금속 갑옷은 막거나 피하는 대신 몸을 살짝 움직였다. 금속 갑옷의 팔뚝을 노렸던 바칸의 주먹은 갑옷을 때렸다.
드워프를 최소 반 따라갔다고 평가받는 제국 기술로 만든 갑옷이 바칸의 주먹을 아프게 했다. 말로만 듣던 갑옷 수비술이었다.
금속 갑옷의 왼쪽 주먹이 황급히 물러나는 바칸을 쫓았다. 바칸은 양발을 빠르게 놀려 방향을 바꿔가며 후퇴했다. 그러나 상대는 단 한 걸음 길게 내디뎌 바칸의 회피를 무력화했다.
바칸이 무릎을 굽히고 엉덩이를 내리면서 주먹을 피하려 했지만, 금속 갑옷의 주먹도 낮아지며 계속 바칸 머리를 노렸다.
바칸은 오른쪽 팔꿈치를 높여 금속 갑옷의 손목을 때렸다. 비록 강한 힘은 아니지만, 금속 갑옷의 팔이 살짝 들리며 공격이 끝났다.
금속 갑옷이 주먹을 거두는 틈을 타서 바칸은 몸을 돌려 도망쳤다. 금속 갑옷을 따라온 자들이 황급히 바칸 뒤를 쫓았다.
곧게 도망치다가 갈림길이 나오자 바칸은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왼쪽 길은 대문과 가까운 방향이고 오른쪽은 오히려 마을로 들어가는 방향이다. 상대가 미리 길목을 막을 걸 대비해 보통 도망자라면 선택하지 않을 방향을 골랐다.
과연, 고함이 연신 울리더니 '멈춰라'를 외치는 목청이 몇 개 추가되었다. 몰래 숨어서 바칸을 덮치려던 자들이 추격 행렬에 가담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인 것 같구나.'
떠버리가 과장을 섞지 않았다면, 세 개의 붉은 보석은 무척 귀한 물건이다. 그러나 단지 보석의 출처를 알고 싶어서 제국 출신의 기사를 보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마침 그때 다른 적임자가 없었다고 쳐도, 이번 역시 직접 바칸을 쫓아 나온 건 충분히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도망치느라 자세히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바칸은 앞을 가로막은 목장의 2미터 되는 담장을 손도 안 쓰고 단지 발로 두 번 걷어차는 것으로 넘었다.
'제길.'
화나게도 가축 똥을 모아둔 곳이었다. 더러운 건 대수가 아니지만, 발이 푹푹 빠지는 바람에 속도가 완전히 죽어버렸다.
"여기 똥이다. 다른 데로 넘어."
바칸 뒤를 바짝 쫓던 자도 담장을 넘어 똥 무더기에 떨어졌다. 착지에 성공한 바칸과 달리 발이 미끄러져서 똥 무더기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비록 첫 희생자가 빠르게 외쳤으나, 그 뒤에도 셋이나 똥 무더기에 몸을 던졌다.
"고블린 좆만 한 새끼야."
똥의 방해로 느려진 바칸을 따라잡은 추적자가 몽둥이를 휘둘러 바칸 뒤통수를 노렸다. 바칸은 급작스럽게 몸을 돌려 공격자를 덮쳤다. 바칸을 명중하려고 몸을 던지다시피 한 공격자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횡격막에 한 대 착실히 얻어맞은 공격자는 몽둥이를 놓고 땅에 쓰러진 채 작게 바둥거렸다. 숨만 막힌 게 아니라 팔다리 힘까지 빠져서 크게 버둥대지도 못했다.
공격자를 쓰러뜨린 바칸은 아예 방향을 돌려 쫓는 자들을 연속 쓰러뜨렸다. 무기를 든 자들은 빠르게 접근해 확 열린 몸통을 손쉽게 때렸고 맨손인 자들은 턱이나 뺨 혹은 옆구리를 때려 가드를 푼 다음 횡격막을 때렸다.
가축 똥이 안으로 들어간 신발을 벗어서 담장을 넘는 자에게 던졌다. 똥 묻은 가죽 신발에 얼굴 얻어맞고 떨어지는 놈의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할 겨를도 없이 자신과 발이 비슷하게 큰 자의 신발을 강제로 벗겼다. 목장을 가로지르는 작은 냇물에 발을 대충 헹군 바칸은 새 신발을 신고 산으로 달렸다.
"무조건 잡아. 저놈 잡으면 은화 열 개 준다."
바칸은 세 발짝에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혹시 모를 화살이나 무기 투척을 경계했다. 다행히도 바칸을 만만하게 봤는지 활이나 투척용 무기를 들고나온 자는 없었다.
'베르크 영주가 왜 붉은 보석에 집착하는지 궁금해 죽겠어.'
최근 몸이 부쩍 좋아진 바칸은 추적자들과 점점 거리를 벌렸다. 매복을 경계해 속도를 제대로 내지 못했던 골목과 달리 산자락에 있는 목장에선 마음껏 달릴 수 있었다.
'후, 살았다.'
산중턱까지 올라가고 나서야 시름이 놓였다. 산을 넘기만 하면 누구한테도 따라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때, 바칸 앞에 빛이 번쩍였다. 가까스로 멈춘 바칸은 목에 닿은 금속의 서늘한 감촉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나무 뒤에 숨어있던 금속 갑옷이 얼어붙은 바칸을 바닥에 누르고 밧줄로 손발을 묶었다. 금속 갑옷이 땅에 꽂은 검을 보니 한쪽엔 날이 없는 외날검이었다. 바칸이 멈추지 않고 그냥 달렸으면 도주에 성공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작가의말
바칸의 손발을 밧줄로 묶던 기사는 멈칫하더니 허겁지겁 바칸의 팔다리와 몸을 만졌다.
“대단하군. 제국에서도 천년에 한 번 볼 수 있다는 천마지체야.”“그놈의 천마는 좀 쉬게 내버려 둬.”“너도 원한다니 내 제자로 받아 천마신공과 천마군림보를 가르치고 땅 천마지기 물려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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