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가짜
게르크 교단의 군대가 대규모 적과 마주친 건 보나르 영지에 들어가고 나서 엿새째였다.
게르크 교단의 군대는 함락한 마을에서 게르크 신자를 병사로 받으며 숫자가 처음보다 오히려 늘었다. 마주 선 부대도 3천 규모는 되었지만, 게르크의 군대와 비교하니 확연히 적어 보였다.
"저 멍청이들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이야."
보나르의 세 여우는 군대를 지원하겠다는 바칸의 호의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뒤늦게 게르크 군대의 규모를 알고 나서야 마지못해 승낙했다.
보나르의 세 자작이 2천 명 군대를 긁어모았고 바칸이 천 명을 지원했다. 물론, 보나르의 세 자작을 열심히 욕하는 존과 바르바리얀 부족도 있었다.
바르바리얀 부족이 쓸 무기는 아직도 완성하지 못했지만, 갑옷은 전부 끝냈다. 와희를 상징하는 검은색 바탕에 하얀 선으로 폭풍과 비바람을 상징적으로 새긴 갑옷을 보며 바르바리얀 전사들은 안 먹어도 배부르다며 뻥쳤다.
"저기 성복 입은 놈들 보이지? 우린 저들을 모조리 죽이는 게 목표야."
존의 눈은 불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뜨거웠다. 자신을 살리겠다고 직접 배를 가른 어머니를 이단으로 몰아 시체를 화형에 처한 나쁜 놈들이다. 예전엔 미워하면서도 감히 복수를 떠올리지 못했지만, 지금은 바칸의 허락도 있고 함께 싸울 전우도 가득하다.
"저놈들을 다 죽여야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 승리하고 싶은가?"
"수바르카!"
"간다."
아직 양측이 교전사를 주고받지도 않았는데 존과 바르바리얀은 진영을 뛰쳐나갔다. 금속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한 거한들이 달려오자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게르크 군대의 선봉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바르바리얀 부족은 대부분 워해머나 큰 도끼를 들었다. 일반인은 두 손으로도 휘두르는 게 힘든 중병기지만, 바르바리얀이 잡으니 평범해 보였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존의 새 낭아봉은 후앙 소리를 내며 휘둘러졌다. 그러나 바람 가르는 소리는 순식간에 퍽 소리에 묻혔다. 존의 낭아봉 궤적에 걸린 자들은 갑옷을 입었는지에 상관없이 모조리 살이 터지고 뼈가 부서졌다.
"뭐해! 저놈들 막아. 저들은 이단이다. 악마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다."
존과 바르바리얀 부족의 기세에서 게르크 대주교는 필살의 의지를 읽었다. 급한 나머지 존대도 잊고 반말로 고래고래 외쳤다.
아무리 큰 전쟁이어도 성직자가 죽는 일은 거의 없다. 정말 재수 없게 눈먼 화살에 맞지 않으면 전장에서 성직자만큼 안전한 사람도 없다.
자신이 믿는 신이 아니어도 성직자에게 무기를 휘두르는 자는 드물다.
보나르와 비나크를 점령할 생각을 하면서도 자기 죽음을 떠올리지 못했던 대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은 그제야 겁에 질렸다.
"집행관, 어서 신의 전사들을 도와 저들을 저지하십시오."
화살받이로 선봉에 세웠던 신자들은 이미 뿔뿔이 도망쳤다. 화살받이 뒤에 숨어서 상대에게 타격을 주려던 신성 전사들 역시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하고 차례로 죽어갔다.
'지금까지 제단만 부수고 성직자를 살려둔 건 우리가 도망칠까 봐 걱정되어서다.'
비나크나 보나르에서 게르크 성직자를 죽였다면 대주교가 교단 핵심 전력을 데리고 페코나 다른 왕국으로 도망쳤을 가능성이 크다. 바칸은 제단을 부숴 상대를 분노케 하는 동시에 성직자들을 모두 살려서 추방하는 거로 게르크 교단의 방심을 유도했다.
부르크 교단의 집행관들은 제국 기사를 여럿 죽인 전적이 있다. 그러나 게르크의 집행관들은 그 정도로 장비가 좋지 못하다. 게다가 무력 담당을 제외하면 싸움 실력도 어중간한 자들이다.
그리고, 게르크의 집행관들에게 정말 안 좋은 상황이 벌어졌다. 집행관들이 가까이 접근하자 누군가가 눈이 뒤집혔다.
"크아아."
존 눈에 어느새 갈색 눈동자 수십 개가 생겨났다. 갑옷으로 가려져서 표나진 않았지만, 존의 피부 역시 갈색이 되었다.
"죽인다."
존이 훨씬 가벼운 몸놀림으로 집행관들을 덮쳤다. 바위 구르는 것 같던 존의 움직임이 물 찬 제비를 연상케 했다. 아까는 아름드리나무 같던 낭아봉이 회초리인 양 가볍게 휘둘러졌다.
"데몬. 데몬이다."
존 무리가 쓴 투구 측면과 뒤에는 중병기에 타격당하는 걸 방비하려고 단 뿔이 여럿 있다. 뾰족한 뿔을 타격하면 접촉면이 적어 큰 힘을 전달하지 못하며 뿌리 쪽으로 갈수록 굵어지기에 작은 힘조차 분산된다.
투구에 난 짧은 뿔 때문에 게르크 군대는 존과 바르바리얀 부족을 악마의 군대인 데몬으로 오해했다. 그리고 게르크 군대는 두 가지 양상을 보였다.
겁에 질려 도망가는 자가 태반을 훌쩍 넘었다. 그러나 무기를 휘두르며 존 일행을 덮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우와아."
그때 뒤에서 구경만 하던 남은 군대가 움직였다. 아틀란티스 영지군은 진형을 유지한 채 움직이며 적을 제압하거나 죽였다. 보나르 영지의 군대는 도망치는 자들이 버리고 간 무기를 주워들고 전장에 마구잡이로 뛰어들었다.
"죽어라. 악마."
존은 무기를 휘두르는 대신 왼쪽 주먹으로 상대 배를 때렸다. 주먹에 맞은 상대는 바로 죽지 않았다.
상대는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계절임에도 홑옷을 입은 맨발의 사내였다. 무기랍시고 휘두른 것도 뾰족하게 깎은 살짝 휜 나무였다.
"너희가 악마다."
존은 잠꼬대하는 것 같은 흐린 말투로 대꾸했다.
"네가 악마다. 신에게 대항하는 네가 악마다."
"그냥 죽어라."
존은 발로 악다구니를 퍼붓는 자의 머리를 꾹 밟았다.
"그냥 죽는 게 네겐 더 행복할지도."
조금 뒤에서 대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성복을 벗어던지며 도망치고 있었다. 존을 악마라 믿으며 신을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진 광신도가 그 장면을 봤더라면 뼈가 썩어 사라질 때까지 눈을 감지 못했을 거다.
"도망친다. 대주교가 도망친다. 성복 벗고 도망친다."
존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리 지르는 자는 전투 노예 출신으로 존과도 자주 보는 친한 자다. 전술 공부를 존도 들었기에, 지금 저건 아군 사기를 올리고 적 사기를 깎은 훌륭한 행동임을 안다.
그럼에도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바칸처럼 똑똑하면 얼마나 좋을까.'
집행관은 거의 다 죽였다. 몸을 던져 앞을 막는 광신도들을 훌훌 밀치며 존은 도망치는 성직자들을 향해 달렸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존은 몸을 허공에 띄우며 낭아봉을 힘껏 던졌다. 성복은 벗었지만, 신발을 보면 게르크 성직자와 아닌 자들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추운 날씨와 거친 바닥 때문에 신발까지 벗어던지진 못했다.
"대주교! 대주교!"
존은 성큼성큼 달려가서 피떡이 된 대주교 시체를 잡고 오열하는 성직자를 발로 걷어찼다. 갈비뼈가 부러진 성직자는 땅에 떨어지기 전에 숨이 끊어졌다.
"게르크는!"
존은 대주교의 시체를 향해 소리 질렀다.
"가짜다!"
속이 후련했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알았다.
"게르크는!"
바칸도 신은 잘못이 없다고 했다. 신을 모시는 자들 잘못이라고. 그 말이 맞는다면 이렇게 대주교와 성직자들을 다 죽여도 게르크 교단은 계속 존재한다.
"나쁜 놈이다!"
그 뿌리가 되는 신을 부정하여 게르크 교단이 아예 사라지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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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왔니?"
다미앙은 자신의 거처로 찾아온 바칸을 보고 놀라움을 참지 못했다.
"협상하러. 보나르의 세 자작에게 전권을 위임받았다."
다미앙은 아주 잠깐 고민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갈등을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짧았다.
"들어보자."
"나라 이름은 생각해 둔 거 있어?"
바칸의 말에 다미앙이 씁쓸하게 웃었다.
"글쎄. 그게 지금 와서 의미 있을까?"
"나라 이름은 보나르의 세 자작에게 양보해."
"양보?"
"공왕은 네가 된다. 세 자작은 후작으로 하고 헤크 지역에서 가장 비옥한 땅 세 개를 줘야 할 거야."
다미앙은 양손을 마주 비빈 후 얼굴을 문질렀다. 마른세수를 하고 나니 조금 정신이 맑아졌다.
"날 허수아비로 세우겠단 뜻이야?"
"헤크 지역의 영주들이 널 따른다고 들었다. 허수아빈 아니지."
"여기서 끝이 아닐 텐데?"
"올핸 카쿠 심지 마. 그거 심으면 땅이 완전히 죽어버려서 회생하는 데 시간이 걸려."
"그리고?"
"야만족은 내가 데려갈 거야. 아틀란티스 영지로. 여기에 두면 분란만 일으킬 게 뻔하니까."
"우클은 몰라도 카디스 부족은 부르크 신을 믿는 자들이야."
"모시는 신을 한 번 바꾼 자들이야. 두 번 바꾸는 것도 어렵지 않아."
"요구가 있다."
"말해."
"내 아이들은 아틀란티스 영지에서 키우고 싶다."
"안전을 확실히 보장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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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티스 공왕이 찾아왔다."
바칸은 가드와 자이르까지 셋이서 페코 공국을 방문했다.
헤치꼬는 급히 모로끄를 왕궁으로 불렀다. 그러나 가장 최근 제국으로부터 책봉 받은 공왕을 홀대할 순 없어 일단 혼자서 만나야 했다.
"아틀란티스 공왕 바칸이다."
"페코 공왕 헤치꼬다."
"며칠 전에 부르크 교단이 보낸 3천 규모의 군대가 아틀란티스 항구에서 몰살했다."
부르크 교단의 배는 해류를 타는 바람에 드레이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북쪽으로 돌았다.
드레이크가 새 한 마리를 정찰용으로 달라고 했으나, 슴슴이는 바칸이 아틀란티스와 교류하는 통신용으로 쓰이고 강부리는 점점 커지는 아틀란티스 영지에 침입하는 몬스터나 맹수가 없는지 지키는 역할이다.
유일하게 남은 건 핀핀인데, 날개가 기형이어서 오래 나는 걸 불편해한다. 그래서 훨씬 북쪽으로 움직인 부르크 교단의 배를 놓쳤다.
하지만, 운 좋게 드레이크의 함대를 피한 부르크 교단은 아틀란티스 부두에 상륙도 못 하고 투석기와 불화살 공격에 배가 전부 침몰했다.
"아틀란티스는 게르크 신을 가짜라고 전면 부정한다. 가짜 신을 모시는 게르크에 편드는 모든 이단을 소멸할 것이다."
바칸도 원래 이럴 계획이 아니었다. 그러나 존이 게르크를 가짜라고 수천 명이 듣도록 외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게르크가 자신을 암살했던 걸 명분으로 일을 진행하려 했는데, 존이 사고를 크게 쳤다.
"게르크 교단과 가깝게 지내는 자들이 꽤 있다고 안다. 부르크 교단을 포함해서."
"필요하다면 군대를 보내 페코 공국을 지켜줄 수 있다. 물론, 게르 영지는 돌려줘야겠지."
"상의할 시간을 달라."
"나는 곧 서부 제국으로 갈 예정이다. 삼 황자가 동맹을 제안했다."
바칸의 말에 헤치꼬는 몸이 굳었다. 공국이라고 다 같은 공국이 아님을 절실히 깨달았다.
"게르크부터 시작해 부르크와 친한 교단을 하나씩 약화할 것이다."
헤치꼬는 장사 머리는 좋은데 정치적 감각은 부족하다. 그저 지르와 플란코 그리고 겔트까지만 염두에 두고 살아왔기에 바칸이 너무 큰 얘기를 하자 머리가 멈췄다.
"바하와 비나크 그리고 겔트가 이어졌다. 예전처럼 바하와 겔트가 분리되어 페코 공국이 중간에서 이득을 취하긴 힘들다. 페코 공국이 생존하려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헤치꼬는 다급히 바칸에게 질문했다.
"카르챠와 지르 그리고 플란코를 불러라. 페코 공국에서 담판을 짓자고 해라."
땅이 크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다. 군대가 많다고 무조건 센 것도 아니다.
아틀란티스는 모든 면에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낙수효과로 아틀란티스의 발전이 비나크나 겔트 등 지역에 영향을 미치게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부르크를 내가 건드린다. 부르크를 약하게 하면 동부와 서부로 갈라진 제국이 서로 싸워야 한다.'
- 작가의말
슬슬 판을 키워야겠습니다. 제국아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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