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크
"대장, 어떻게 된 거야?"
투구에 이어 갑옷 상의도 사라졌다. 남은 건 허리띠와 갑옷 하의 그리고 신발뿐이다.
"부르크 제단이 깨지면서 빛줄기가 생겼잖아. 철창은 네구르의 힘만 막아주고 부르크의 힘은 안 막아줬어. 덕분에 하체만 남았어."
다섯은 일단 페글릭 영지로 향했다. 언데들들이 휩쓸고 지났지만, 사람을 함부로 해치지 않았기에 남아있는 사람이 꽤 되었다.
본드와 톰슨에게 음식과 마실 물 그리고 술 등을 구하라고 보내고 바칸은 존과 드레이크와 함께 부르크 교단으로 갔다.
돌로 든든하게 지은 건물이 전부 박살 났고 종이와 천이 탄 재가 아직도 흩날렸다. 다른 신을 모시는 신도라면 굳이 여길 찾을 일 없고, 부르크 신도는 모두 도망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제단은 저기 있을 거야."
수십 개 제단을 부순 경험으로 존이 위치를 단번에 잡아냈다. 바칸은 부서진 제단을 찾아갔다.
"역시, 제단을 완전히 부수지 못했어."
존이나 드레이크 눈엔 완전히 박살 난 것처럼 보이지만, 바칸에겐 다르게 느껴졌다.
"1년은 더 지나야 제단이 완전히 파괴될 거야. 제단의 외부 구조만 파괴했고 내부 구조는 그대로야."
"그럼 게르크의 제단도?"
"아니야. 바르바리얀 부족은 제대로 부쉈어. 거인족의 피가 진하게 흐르니까."
말을 마친 바칸은 돌조각만 가득한 곳으로 들어갔다. 바칸의 갑옷에서 스파크가 탁탁 튀었다.
"네구르와 부르크가 충돌한 것과 마찬가지야. 비슷하지만 다른 힘은 상반되는 힘보다 더 심하게 싸워. 상반되는 힘은 서로 소모하지만, 동종의 힘은 이긴 쪽이 반대편을 흡수하거든."
"그럼 대장 위험한 거 아니야?"
"제단이 부서졌기에 괜찮아. 힘쓰는 방법이 사라졌거든."
금속 신발까지 다 사라지고서야 바칸은 제단에서 내려왔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멋진 기사가 순식간에 거지가 되었다.
신발은 그나마 봐줄 만한데 옷과 바지는 찢어질 대로 찢어졌고 핏자국이 가득했다. 얼음섬에서 갑옷 입을 때 몰골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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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인은 덩치가 작다. 일행 중에서 톰슨 다음으로 덩치가 작은 바칸이지만, 몸에 맞는 옷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저기 마을 있다."
"본드와 톰슨이 다녀와. 대충 사람 눈길 안 끌 정도로 깨끗한 옷이면 돼."
그때 마을에서 사람 한 무더기가 나왔다. 몇몇은 밧줄에 묶여서 병사로 짐작하는 자들이 압송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묶인 자들을 향해 자갈 따위를 던졌다.
"부르크 신은 자애롭다. 전쟁은 평화를 위한 수단이다. 전쟁을 위한 전쟁을 하는 야심가들과 우린 다르다. 우린 평화를 위해 무기 들고 싸우는 것이다."
맥락 없이 떠들어대는 말에 사람들이 환호한다.
"이교도를 향해 돌을 던져라. 그러나 죽이진 마라. 우린 전쟁을 통해 저들이 부르크 신을 따르게 하려는 목적이다. 돌 던지는 건 전쟁이고 저들이 위대한 부르크의 따뜻한 품으로 들어오는 건 평화다. 우린 전쟁으로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뭔 개소리야?"
제국 남부 특유의 억양 때문에 본드와 드레이크는 내용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러나 알아들은 존이나 톰슨이어도 별다를 게 없었다.
"부르크를 안 믿는 자들을 괴롭히는 거야. 죽여버리거나 하면 심하게 반발할 수 있으니 저런 식으로 괴롭혀 개종을 강요하는 거지. 네구르를 비롯해 헤루스와 미아구까지 들고 일어선 걸 알면 바뀔 거야. 아마 저들 모두 죽여버리려 하겠지."
그때 누군가가 던진 돌멩이에 어린 소녀의 머리가 터졌다. 빨간 피가 흐르자 군중들이 더욱더 흥분했다. 병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말릴지 말지 고민했다.
"어두운 밤은 우리에게 휴식을 주고."
"우리에게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주고."
"모두에게 공평한 죽음을 주며."
"죽음으로도 앗아갈 수 없는 영원한 삶을 준다."
소녀가 피를 흘리며 억지로 기도문을 읊었다.
"까마귀의 날개는 접혔고."
"검은 염소의 뿔은 썩었고."
"흰 양의 눈은 멀었고."
"그리하여 내 심장을 제물로 바치나니."
"네구르여. 너를 진심으로 따르는 나에게 자비를 내려라."
소녀의 몸이 퍽 터졌다. 톰슨이 황급히 바칸 뒤로 숨었다. 페글릭 영지에서처럼 위협적이진 않지만, 죽지 않는다고 자기 손가락에 가시 박히는 걸 바라만 볼 사람은 없다.
"성직자. 성직자를 불러라. 이교도가 섬기는 악마가 강림했다."
부르크 신도들은 우르르 마을로 도망쳤고 병사들 역시 밧줄에 묶은 사람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소녀가 터지면서 생긴 검은 기운이 서서히 퍼지더니 하얀 해골들이 바닥을 뚫고 올라왔다.
"우리도 움직이자."
"어딜?"
"마을에 몰래 들어가서 부르크 교단으로 간다. 거기서 성직자들이 입는 옷을 훔치자."
하얀 해골들은 먼저 밧줄에 묶인 자들을 죽였다. 부모 죽인 원수를 본 것처럼 무자비하게 공격하다가도 숨이 끊어지면 바로 구타를 멈췄다.
묶인 사람을 다 죽인 해골들은 생기가 강하게 느껴지는 마을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갔다.
빠르게 빙 돌아 마을 목책을 넘은 다섯은 영주성보다 더 크고 멋진 부르크 교단을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에 숨었고 병사와 성직자들은 해골이 몰려오는 정문으로 갔다.
덕분에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교단에 도착했다.
"저기."
바칸은 물론 남은 넷도 부르크 성직자의 로브를 걸쳤다. 땅에 질질 끌리는 로브는 소매도 길어서 얼굴 빼고는 다 가렸다.
"대장. 제단 부수고 가자."
바칸은 잠깐 고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존과 드레이크가 해. 전쟁과 평화의 부르크를 모시는 교단이니까 무기가 많을 거야."
존과 드레이크는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거대한 망치와 철퇴를 골랐다. 과시 목적으로 만든 거여서 전혀 효율적이지 않고 무게 중심마저 제대로 안 잡혔다. 그래도 든든함만은 신경 써서 제단 부수기엔 넉넉했다.
'아무 반응도 없구나. 드레이크도 거인족의 피가 많이 흐를까? 아니면 해적섬의 태양신이 진짜 신인 걸까?'
제단이 다 부서졌는데도 아무런 반발이 없었다. 해적섬의 태양신을 모시는 드레이크라면 작은 반발이라도 있어야 한다. 반발이 없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해적섬의 태양신이 진짜 신이거나 드레이크도 거인족의 피가 짙게 흐르거나.
'해적섬의 신이 진짜라면 제단이 많아야 한다. 비밀의 숲에 엄청 많은 제단이 지어진 건가? 그런데 제단 숫자보단 차지한 면적이 중요한데.'
가까운 곳에 제단 2개 세우면 효과가 1개와 같다. 물론, 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겐 제단 2개로 쳐지지만, 신을 찾아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하려는 자들에겐 1개와 마찬가지다.
부수는 수고만 더할 뿐이어서 가까운 곳에 제단을 여럿 짓지 않는다.
제단을 부순 다섯은 빠르게 목책을 넘어 마을을 벗어났다. 소녀의 심장이 제물로 꽤 가치가 있는지 해골 숫자가 30을 넘었다. 병사들은 창이나 몽둥이로 해골을 열심히 밀어내고 성직자들은 무릎 꿇은 채 기도문을 외웠다.
"우리가 제단 부숴서 기도문이 약해졌을 거야."
"잘됐어.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대장. 돌아가 성직자도 다 죽일까?"
존의 말에 바칸이 고개를 저었다.
"부르크 제단을 다 부수는 게 제대로 된 복수야. 게다가 우린 중요한 일을 하고 빨리 돌아가야 해. 생각지 못하게 사흘이나 지체했으니 이제부턴 휴식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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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구르와 헤루스와 미아구 세 교단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교황은 얼마 안 남은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원래는 아주 풍성한 잿빛 수염이었는데 교황이 되고부터 푸석푸석해지더니 최근에는 뭉텅이로 빠졌다.
"네구르는 우리가 제단을 부순 원한이 있다고 쳐도 헤루스와 미아구는 무슨 이유입니까?"
"헤루스와 미아구의 제단도 모두 부서졌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걸 우리 짓이라고 여긴다는 겁니까?"
"제길. 정말 못 봐주겠네. 교황이라는 놈이나 추기경이라는 놈이나 멍청하긴."
"무엄합니다. 여기 이분은 대주교가 아닌 교황입니다. 예의를 갖추기 바랍니다."
"교황? 솔직히 추기경이네 주교네 하면서 성직자끼리 급 나누는 것부터 우스웠어. 그런데 성직자의 본분마저 잊고 있다니."
"당신이 나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은 이해합니다. 그래도 함께 부르크를 섬기는 자로서 선은 지키기 바랍니다."
교황의 말에 주교가 코웃음 쳤다.
"내가 그깟 대주교 자리를 탐냈던 거 같아? 본분을 잊고 세력 키우는 데 혈안이 된 이 머저리들을 깨우려고 했던 거지."
"본분? 아직도 그 허무맹랑한 말을 믿습니까? 우리는 신을 섬기는 존재가 아니라 신을 찾아내서 죽이는 역할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게르크의 제단이 대부분 부서졌고 성직자들도 대부분 죽었다. 그럼 게르크는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신은 인간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왜 자기를 섬기는 성직자는 사랑하지 않는 거냐? 나도 오늘부터 제단 부수며 돌아다닐 생각인데, 부르크가 그런 날 사랑할까? 사랑한다면 너희 누구도 날 제지하진 않겠지?"
"이단에 빠지셨군요."
"이단? 웃기는 소릴 하네. 게르크의 제단에서 부르크의 성직자가 기도문을 외워도 효과가 있어. 게르크와 부르크의 기도문이 똑같지 않은 데도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일까? 게르크든 부르크든 뿌리가 같다는 뜻이야."
"계속 그러면 종교 재판에 회부할 겁니다."
"해볼까? 난 게르크가 가짜 신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믿는 게 정확하다면 진짜 신은 강림하거든. 가짜 신은 이대로 사라지고. 진실의 재판에서 게르크가 가짜라고 판명 나면 너 교황 자리에서 내려올래?"
교황은 손가락으로 수염을 돌돌 말았다. 그러다가 코가 뾰족한 주교의 말에 화가 치밀어 손가락에 힘을 과하게 줬다. 톡 소리와 함께 수염 몇 가닥이 끊어졌다.
수염 끊어지는 작은 소리가 우레처럼 귀를 괴롭혔다.
"저는 교황 자리에 미련이 없습니다. 다만, 수많은 성직자와 신실한 신도들이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게 교단의 이익에 가장 부합한다고 여기기에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이 자리는 부르크 신과 성직자 동료와 신도들이 제게 준 것입니다. 함부로 앉을 수도 없고 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투표하기 전에 뇌물 돌렸을까? 미련도 없는 자리에 앉으려고. 이 자리에 뇌물 받아먹은 새끼 열이 넘어. 신 보기 부끄럽지 않아?"
"집행관. 이단에 빠진 우리 불행한 동료를 감옥에 가두십시오. 매일 성수를 마시게 하고 부르크의 말씀을 들려줘서 마음에 깃든 악마를 쫓아내십시오."
"진실의 심판 가자니까. 뇌물 줬는지 말았는지 진실의 심판 해보자. 응? 내가 이렇게 빌게. 진실의 심판 해서 뇌물 받은 새끼 하나도 없으면 내 모가지 바칠게. 응?"
코가 뾰족한 주교는 집행관 둘에게 겨드랑이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으하하. 제단 다 부숴 봐. 부르크가 진짜면 신이 강림한다잖아. 부르크를 직접 보고 네 귀로 부르크 목소리도 들을 좋은 기회잖아. 거짓말로 신도들에게 '어젯밤 신께서 절 찾아와서 이랬어요' 이 지랄 안 해도 되잖아."
교황은 눈을 꼭 감고 기도문을 외웠다. 봄이 여름으로 바뀔 때 얼음이 녹아내리며 형성된 계곡물처럼 시원한 청량감이 마음을 적셨다. 부끄럽고 화나고 짜증 나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렸다.
'이런데도 부르크가 가짜라고? 저놈은 마귀에 속은 미친놈이 틀림없다. 부르크는 진짜고 우릴 진심으로 사랑하신다.'
- 작가의말
권력욕이 1도 없는 부르크 제국의 교황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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