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하는 정세
바하 영주는 초췌한 얼굴로 쭉 늘어선 5백 명 병사를 살폈다. 전문 병사는 2백도 안 되고 나머지는 고용한 용병과 떠돌이 모험가다. 이미 저들 계약금만으로 수백 골드를 지출했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데.'
보름 전 보나르의 파비앙 자작이 바하 마을에 영지전을 선포했다. 바하도 견제할 겸 평민 영주들을 단합하려는 목적으로 일부러 비싼 가격에 식량을 사들이며 위화감을 조성했지만, 바하 영주는 자신이 공격받을 가능성은 떠올리지도 않았다. 보나르의 세 자작이 비나크와 보나르 경계에 있는 마을을 잠깐 공격하다 말 것으로 예측했었다.
그러나 바하 영주의 예상은 어이없이 빗나갔고 이미 교단 허가가 떨어져 이틀 뒤면 전쟁이다.
'그간 교단에 들인 돈이 얼만데.'
바하 영주는 교단이 당연히 영지전을 막아줄 것으로 생각했다. 교단의 허가가 없어도 귀족인 상대는 일방적으로 선전포고하고 바하를 공격할 순 있다. 그러나 점령할 수는 없고 영주성을 공격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바칸이 천 명이나 되는 병사를 끌고 와서 겁만 준 이유기도 했다.
"알아냈어?"
"교역권을 물고 늘어져서 수도 총단에서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바하의 교역권은 왕국이 아닌 교단이 내렸다. 신권이 왕권에 도전하는 아주 의미 있는 일이어서 바하 영주는 줄곧 교단의 지극한 보호를 받았다.
"구체적으로 말해봐."
"파비앙은 영지 상단이 가죽 가격에서 큰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여러 상단의 장부와 자기 상단의 장부를 증거로 제출하여 교단도 반박하지 못했다고 한다."
교단이 내린 교역권이 지지를 받은 건, 교역 마을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왕실과 달리 세금을 아예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유 교역을 주장하며 교역 마을의 영주나 교구가 모든 거래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다.
하지만, 바하 영주는 상인과 상단을 압박해 보나르의 가죽에 싼 가격을 매기게 했다. 상인들은 바하 영주의 협박도 협박이었지만, 본인들 역시 이득이 되는 일이어서 기꺼이 동참했다.
"그게 영지전 사유가 된다고?"
그간 손해 본 금액을 적당히 변상하면 된다. 영지전까지 갈 일은 절대 아니다.
"왕실이 파비앙 편을 들어 교단을 압박했다."
바하 영주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단순히 파비앙이 이십여 년 동안 손해 본 것에 대한 화풀이 영지전이 아니었다. 왕실과 교단이 낀 고래 전쟁이었다.
"회답한 영주는 있는가?"
만일을 대비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영주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베르크에서 병사 3백이 출정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그간 웅크리기만 하던 뮬리치도 움직였다. 3백 명이나 되는 병사가 출정했는데 어디로 향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누가 표적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느 영주도 섣불리 군대를 바하로 보내지 못했다.
'너무 성급했는가?'
교단의 압박에 비나크 공작과 조금씩 멀어졌다. 근래에는 완전히 갈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관계가 악화하였다. 교단의 지원도 있고 평민 영주들의 떠받듦도 있어서 걱정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영지전이 벌어졌다.
"아틀란티스가 파비앙을 지원할 가능성은?"
"거긴 이젠 공국이다. 그쪽이 끼어들면 국가 간 전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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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크 공작 율도르는 동생 헤노르와 함께 수도로 향했다. 헤노르는 가장 일찍 율도르와 손잡은 형제였고 계승권을 포기한 후 율도르가 공작이 될 수 있도록 전력으로 지원했다.
"톰슨이 투항했다고?"
바하 영주의 이름이었다.
"그래. 비둘기로 온 소식이다."
동대륙에서 비둘기를 훈련하여 소식을 전하는 방법이 들어왔다. 마법사들이 사라져 원거리 통신이 어려워진 지금 가장 빠른 소식 전달 수단이다. 바하와 더 먼 거리의 왕실에서 비나크보다 먼저 소식을 얻은 건 비둘기 덕분이다.
"수도 방위대 3백 명만 지원하면 바하를 빼앗겠다."
공작의 전문 병사 1천까지 합치면 세 자작이 동시에 덤벼도 자신 있다.
"빼앗은 다음엔? 직접 통치할까? 아니면 누구한테 줘버릴까?"
왕세자는 율도르와 동갑이다. 그러나 율도르는 십 년 전에 공작이 되었고 왕세자는 여전히 왕세자다. 굳이 따지면 율도르가 왕세자보다 신분이 조금 더 높다.
그래서인지 친밀하던 사이가 조금씩 벌어졌다.
"당연히 말 잘 듣는 평민 영주한테 줘야지. 톰슨도 20년 정도는 고분고분했잖아."
"이번엔 그리 간단하지 않아. 세 여우가 편지를 보내왔어."
율도르는 왕세자 손에서 보나르의 세 여우가 보낸 편지를 받아 읽었다. 빠르게 읽고 동생 헤노르에게 넘겼다.
"빈 소리 같은데? 난 저들이 아틀란티스 공국에 편입하거나 독립하는 걸 믿을 수 없어."
독립하려면 예전에 했다. 셋 모두 왕이 되려는 야욕을 내려놓지 못했고 보나르는 계속 겔트 왕국의 여섯 지역 중 하나로 남았다.
"이번엔 좀 달라."
"뭐가 다른데?"
"그건 내가 말할게."
편지를 다 읽은 헤노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틀란티스는 달랑 영지 하나다. 구색을 갖추려고 야만족 지역과 해적섬에 있는 도시 두 개의 지배권을 줬지만, 그건 말 그대로 보기 좋아라는 거다. 두 곳까지 거리도 거리지만, 지배력을 행사하는 건 더 어림없는 일이다."
"다 아는 얘기잖아."
율도르의 핀잔에도 헤노르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선례가 생긴 거야. 작은 영지도 공국이 될 수 있는 선례가."
"네 말은 세 자작이 각자 독립한다는 거야?"
"그럼. 세 자작은 우선 아틀란티스 공국으로 편입한 다음 삼 황자 도움으로 독립할 거야. 바하는 자유 마을로 하고 집정관이 관리하며 세금은 세 자작이 골고루 나누겠지. 아틀란티스는 잠깐 이름 빌려주는 거로 이득을 얻을 거고."
"황태자한테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황태자는 그걸로 자기 이득 챙길 거야. 우리가 황태자랑 가까운 사이인 건 맞지만, 우릴 적극적으로 도울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 우린 제국과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왕국이야. 가까운 국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만으로도 황태자는 여력이 부족해. 우리가 요청하면 그걸 빌미로 삼 황자한테서 뭔가 뜯어낼 궁리나 하겠지."
"그럼 이대로 당하자고?"
"올해 가뭄이 온다는 예언이 진짤까?"
헤노르의 질문에 율도르는 왕세자를 바라봤다.
"아마 맞을 거야. 제국의 기후 예측은 틀린 적 없어."
"우리 왕국은 여섯 지역이 있다. 서 겔트는 미아르와 게르메르 그리고 겔트가 있지."
수도가 있는 지역이 겔트다. 겔트 지역의 곡식은 미아르와 게르메르까지 먹여 살릴 정도로 풍족하다.
"겔트는 총 7개의 강이 지나는 곳이야. 홍수엔 취약하지만, 가뭄에는 정말 질기지."
"게다가 우린 전쟁을 대비해 몇 년 전부터 식량을 비축했고."
왕세자가 헤노르의 말에 맞장구쳤다.
"가뭄이 오면 동 겔트는 헤크만 버틸 거야. 목축업 위주인 보나르나 사냥과 채집의 비중이 큰 비나크는 버티기 힘들어."
"교역은 금화로 하지만, 교역량은 곡식 생산량에 따라 달라지지."
율도르 역시 헤나르가 뭘 말하려는 건지 알아챘다. 금화를 찍어내는 제국도 흉년에는 상업이 위축한다. 곡물 생산량이 교역 규모를 정한다.
"미아르가 헤크 지역을 먹어 치우면 비나크와 보나르를 완전히 궁지로 몰 수 있겠구나."
왕세자 역시 흥분을 참지 못했다.
"동서 대립을 끝장낼 건지 아니면 적당히 이득을 얻을 건지 결정해."
"좀 더 상세하게 얘기해 봐."
헤노르는 과일주로 목을 살짝 축였다.
"동서 대립이 끝나면 뭐지?"
"교단과 싸워야겠지. 그런데 헤크와 비나크의 지지를 잃으면 교단이 힘을 못 쓸 거야."
"부르크 교단 잊지 마. 한 달 안에 여기까지 병사 1만을 보낼 수 있어."
"황태자나 삼 황자가 막아줬으면 하는 건 멍청한 생각이겠지?"
"당연하지. 이득이 안 되는 일에 뭐하러 피를 흘려? 오직 광신도들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적당히 이득 취하는 방법은 뭐지?"
"헤크 지역은 놔두고 바하만 우리가 얻는 거지. 흉년으로 굶주린 비나크와 보나르에 식량을 주고 '합법적'으로 사들이면 돼. 교단이 방해해도 상관없어. 비나크와 보나르에서 많은 사람이 굶어 죽을 것이고 교단에서 마음이 떠나겠지."
"바하만 얻으면 동 겔트고 교단이고 걱정할 필요 없겠구나."
겔트 지역의 식량이 바하로 운반된다면 어마어마한 상승효과를 낼 수 있다. 지금까지는 교단의 통제를 더 받는 바하를 키워주는 게 싫어서 싼 가격으로 처리했지만, 바하로 가져가면 훨씬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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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좋기만 한 일도 없고 나쁘기만 한 일도 없다."
겨우 4월인데 날이 완전히 풀렸다. 이 기세라면 5월에 더위가 닥쳐올 것 같았다.
"보나르의 세 영주도 낌새를 알아챘겠지?"
단순히 날씨뿐이 아니다. 바하를 점령했는데도 비나크나 왕실이 전혀 반응이 없었기에 의심할 빌미는 충분했다.
"그렇다. 사람을 보내 가죽과 양털 대금을 식량 그리고 투석기랑 쇠뇌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투석기 5대에 소형 쇠뇌 10개를 줘."
대형 쇠뇌보다 소형 쇠뇌가 만들기 훨씬 어렵다. 소형 쇠뇌 3개 가격이면 대형 쇠뇌 5개를 살 수 있다. 그러나 보나르는 이동이 편리한 소형 쇠뇌를 원했다.
"대공. 염전이 계획보다 소금이 3배 나올 거 같다."
폭염으로 가장 기쁜 사람은 서퍼였다. 벌써 더위가 시작했고 북풍도 여전히 세차게 몰아쳤다. 3배는 낙관적인 생각이 아니라 소심한 추측이다.
"포상금 많이 줄 테니 차질없이 진행해. 임시 일꾼 넉넉히 모집하는 것도 잊지 말고. 일꾼 삯은 영지에서 부담할 테니 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서퍼가 싱글벙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치어 감별사에게 통보한다. 바닷물이 뜨거우면 물고기 움직임이 활발하다. 작년보다 많이 잡힐 것이니 치어 기준을 조금씩 높이도록. 가까운 바다의 물고기를 다 잡아버리면 먼바다까지 나가야 한다. 며칠씩 바다에서 지내는 게 싫으면 일 제대로 해."
치어 감별사들이 뒷돈 받아먹고 어중간한 크기의 고기를 눈감아준 게 하루 이틀 아니다. 걱정할 수준이 아니어서 놔뒀지만, 올해는 물고기가 엄청나게 잡힐 예정이기에 자제할 필요가 있다.
"대공. 물이 걱정이다."
수도 조합의 조합장이 발언했다. 단순한 폭염이라면 비가 가끔 온다. 그러나 가뭄까지 동반하면 마실 물도 걱정해야 한다.
레드 벨트의 수위가 낮아진 걸 이미 확인했기에 단순한 폭염이 아니라 가뭄까지 동반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북풍이 계속 불고 있다. 그러니 식수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증발한 바닷물이 북풍을 타고 바위산에 흡수된다. 그것들이 천천히 흘러 호수로 간다. 호수 자체는 줄어들 테지만, 적절히 공급을 제어하면 마실 물을 걱정할 정도까지 가진 않는다.
"5월 중순이면 카쿠 심는 일 시작해도 된다."
톰슨이 두 주술사와 상의하고 얻은 결론이었다. 그리고 10월까지 심어도 될 것 같다는 추측도 있었다.
"땅이 중요해. 땅이 버티지 못하면 그냥 종자 날리는 거니까 주술사랑 계속 상의해."
비료는 겨울에도 계속 주고 있긴 한데, 남쪽 숲의 토질이 원체 괴이하여 자신할 수 없었다.
"물도 걱정이다."
카쿠는 마른 모래땅에서도 자라는 식물이다. 오히려 카쿠를 씻고 담그는 데 사용하는 물이 걱정이다.
"그냥 소금물로 씻어. 어차피 소금물은 버릴 거니까 흙 좀 섞여도 상관없잖아."
기후 영향을 덜 받는 카쿠를 주식으로 하기에 큰 가뭄이 닥쳐올 것이 거의 확실시되어도 회의 분위기는 시종 화기애애했다.
- 작가의말
아틀란티스의 발전이 너무 순조로우니 조금 심술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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