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릭섬
항구에서 검은 연기 한 가닥 피어올랐다. 기병 3대 대장 에릭은 열 명의 수하를 데리고 항구로 말을 달렸다.
엉성하게 만든 배 한 척이 부두로 느리게 접근했다.
"고작 한 명인데 경보 올린 거야? 가뜩이나 추워 죽겠는데."
부두 경비대 병사는 에릭의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금속 갑옷 입은 거 안 보여? 그리고 춥긴 우리가 더 추워. 너희야 따뜻하게 불이라도 지필 수 있지. 우린 안돼."
"어서 기병대 들어오라니까. 마을 처녀들도 잘 따르고 얼마나 좋아."
"말이 무서워."
대화하는 사이 배가 부두에 닿았다.
방문자는 특이하게 푸른색 광택이 도는 갑옷을 입었다. 투구와 면갑은 물론 금속으로 만든 목 보호대까지 착용했다. 상의와 바지를 금속 허리띠로 연결한 것도 여타 갑옷에서 볼 수 없는 형태였다.
등에는 짙은 보라색 가죽 주머니를 멨는데, 사람 둘 넣어도 넉넉할 거 같은 주머니가 저러다가 터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꽉 찼다.
"여기 리차드 영지 맞지?"
"그래. 이름은?"
"바칸이다. 혹시 애꾸눈 벨크 영지에 있어? 나한텐 벨크라고 했는데 다른 이름일지도 몰라. 오른쪽 눈에 안대 하고 머리가 흑금발인 놈이야."
에릭은 방문자의 입항을 허락했다. 무기도 없이 혼자였고 애꾸눈 본드도 아는 걸 보면 손님일 가능성이 크다.
"본드는 나랑 사촌이야. 몇 년 전에 사라졌다가 두 달 전에 돌아왔어."
"그래? 난 본드랑 두 달 전에 헤어졌는데. 근데 블라우크로 가는 배는 출발했어?"
"사흘 전에 출발했지. 노 40개 달린 배여서 따라잡기 힘들 거야."
방문자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에릭은 너무 오지랖이 아닌지 주저하다가 결국 못 참고 입을 열었다.
"투구랑 면갑 안 차가워? 전쟁터도 아닌데 투구 벗고 모자나 쓰지."
"사정이 있어."
"본드 찾는 거 맞지?"
에릭은 방문 목적에 본드 이름을 적었다.
"응. 만약 본드가 내가 찾는 사람 아니면 리차드 만나려고."
서류 작성을 마친 에릭은 말을 부하에게 맡긴 후 이상한 손님을 데리고 마을로 향했다. 마을로 향하는 길은 미끄러워 말 달리는 건 조금 위험하다.
"본드가 네가 말한 벨크 아니면 다시 여기 돌아와서 말 타고 영주성 가야 해. 영주성은 멀거든."
브릭섬은 겔트 왕국과 구조가 달랐다.
겔트 왕국은 마을 목책 안에 영주성과 거주지는 물론 농지까지 있다. 그러나 브릭 섬은 영주성 따로 마을 따로 농지 따로 있었다.
영주성은 언덕에 돌로 쌓아 지은 석성이다. 반드시 우물이 있고 대부분 성벽이 없다. 돌로 쌓은 집 자체가 성벽 역할을 한다.
보통 병사와 하인까지 합쳐 백 명 정도 생활하고 드물게 2백 명이 생활하는 큰 성도 있다.
마을은 시냇물을 끼거나 호숫가에 짓는다. 태반이 농지와 가까운 곳에 지어지지만, 그렇지 않은 마을도 적지 않다.
영주성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마을은 목책이 없다.
"여긴 몬스터 적은가 봐?"
"맹수가 적고 몬스터는 많지."
"그럼 왜 목책으로 보호하지 않는 거지?"
"소용없으니까. 여긴 대부분 비행 몬스터야. 그리고 얼마 안 되는 맹수도 남부의 화냥년 덕분에 사라지다시피 했고."
"엘리자베스인가 하는 드루이드 말하는 거야?"
"응. 원래 리차드 약혼녀인데 우리 영지가 춥다고 파혼했어. 남편이 죽고 영주가 된 후에 리차드가 다시 청혼했는데 또 거절하고 드레이크랑 붙어먹은 더러운 년이지."
리차드의 영지는 섬 최북단이다. 어차피 비나크 지역 정도 크기의 섬이어서 북쪽이나 남쪽이나 큰 차이는 없지만, 아무래도 남쪽이 조금 낫긴 했다.
"드루이드랑 계약한 맹수는 번식 능력을 잃어. 멍청한 년이 섬의 맹수 대부분과 계약했어. 몇 년 안에 맹수가 다 늙어 죽을 거야. 그럼 드레이크 영지를 빼앗고 리차드가 왕이 될 수 있어."
"다른 곳에서 맹수를 사 오면 되잖아. 예를 들면 비크라 북부의 맹수 말이야. 아무래도 그런 이유로 드레이크랑 같은 편 된 거 같은데?"
에릭이 입을 딱 벌렸다. 몇 년 있으면 왕의 기사가 될 거라고 마을 처녀들한테 자주 자랑했는데 방문객 말대로라면 오히려 위험한 상황이다.
"여긴 나무가 적구나."
대부분 비행 몬스터여서 목책을 안 지은 것도 있지만, 나무가 귀한 것도 이유였다.
"섬에 가장 큰 숲은 드레이크가 차지했어. 우린 땔감도 아껴야 하는 판인데 그놈은 함대까지 만들고. 정말 나쁜 놈이야."
여러 화제로 대화하는 사이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목책이 없는 대신 지붕이나 땅에 뾰족하게 깎은 대나무를 가득 세웠다.
"날개를 다쳐 떨어지면 대부분 죽창에 찔려 죽어. 놈들도 이젠 알아서 마을을 잘 덮치지 않아."
에릭은 친절하게 비행 몬스터가 보이면 죽창 가까이 달려가라고 조언했다.
에릭은 본드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장 주점으로 갔다. 술 파는 곳이 드문 비나크 지역과 달리 집이 백 채 조금 넘은 작은 마을인데도 주점이 셋이나 있었다.
에릭은 주점에 들어가자마자 소리 질렀다.
"난봉꾼 본드. 손님이다."
"아니 이게 누구야. 마을 처녀한테 인기 최하위인 에릭이잖아."
대낮부터 불콰하게 취한 본드가 에릭을 골려댔다. 애꾸긴 하지만, 본드는 얼굴도 몸도 괜찮고 섬 밖을 구경한 모험가라는 버프도 있어 마을 처녀들한테 인기가 좋았다.
"벨크, 나야."
벌겋던 본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귀신이지? 분명히 숨도 멎고 심장도 멎은 걸 확인하고 바다에 던졌는데."
바칸은 면갑을 슬쩍 들어 얼굴을 보여줬다. 본드가 눈물을 흘리며 환호했다.
"붉은 까마귀가 널 안 태워줬구나. 다행이다."
술을 단박에 깬 본드는 바칸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 방 세 개 달린 꽤 큰 집이었다.
"내가 리차드 그렇게 안 봤는데. 쓸모없다고 바로 버리더라고. 정말 나쁜 사람이야."
마나 익힌 놈이 영주성이 아닌 마을에 살고 대낮부터 주점에 있는 걸 보고 대충 짐작은 했다.
"해적왕은?"
"리차드가 융숭하게 대접하고 있지."
본드는 해적 벨크로 신분을 위장하고 몇 년 동안 첩자 노릇을 했다. 그러나 해적왕과 드레이크의 거래를 방해하는 임무는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다.
비록 최근에 바칸 도움을 받아 둘 사이를 갈라놓긴 했지만, 금광에서 생산한 금은 대부분 드레이크 손에 들어갔다. 결과적으론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다.
"블라우크 혹은 마르카다로 갈 방법이 없어?"
"드레이크가 해적왕과 결탁해서 다른 영지의 배를 대부분 부쉈어. 게다가 먼 바다까지 갈 만한 큰 배는 리차드랑 드레이크밖에 없어. 리차드는 한 척밖에 없는데 이미 출발했고."
"마르카다나 블라우크에 소식 전할 방법은?"
본드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마녀한테 부탁하면 가능하긴 한데."
"문신 새겨서 마법 쓰는 마녀 말하는 거지?"
"응. 마녀가 새를 길들였어. 멱에 흰색 점이 있고 한 달씩 막 날아다녀."
"슴새 말하는 거구나. 길들이기 굉장히 어려운데."
본드와 바칸은 새날이 밝으면 마녀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갑옷은 어디서 났어?"
"새로 사귄 친구가 선물한 거야."
"갑갑하지 않아?"
본드는 바칸에게 술을 권하며 물었다.
"특별한 갑옷이어서 당분간 계속 입고 다녀야 해. 잘 때도 못 벗어."
금속의 정령이 심술 좀 부렸다. 정령석을 끝까지 안 준 탓에 대부분 정령이 바칸과 사이가 안 좋았다.
"떠날 때 나도 데려가면 안 될까? 마을 처녀들도 슬슬 내게 흥미 잃은 거 같아. 여기에 있을 이유가 이젠 하나도 없어."
"그렇다면 정식으로 소개할게. 아틀란티스 공국의 공왕 바칸이다."
본드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비록 내가 브릭섬 촌놈이라지만, 그런 공국이 있다는 소릴 들어본 적 없어. 그리고 네 말이 진짜여도 그렇지. 가죽 주머니에 넣어서 버린 걸 보면 반란으로 쫓겨난 게 틀림없어."
"기습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내 친구들이 공국을 잘 지키고 있을 거야. 블라우크 혹은 마르카다에 소식 전하면 날 데리러 올 거야."
"친구 대신 원수가 칼 들고 올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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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외딴곳에 살지?"
무거운 금속 갑옷을 입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반나절 걷는다면 바칸 아닌 누구라도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성직자는 가까이하고 싶고 주술사는 따르고 싶고 마법사는 멀리하고 싶은 법이지."
높은 산도 없고 큰 숲도 없이 망망한 설원이다. 눈보라가 날려 하늘의 태양도 보이지 않아 방향마저 헷갈렸다.
그래도 벨크는 바다에서 돌아다닌 경험이 있어 크게 헤매지 않고 잘 걸었다.
"눈보라 언제 그치냐? 아침까지 멀쩡했잖아."
아무리 변덕이 많은 바닷가 날씨라지만, 쨍쨍하던 해가 갑자기 사라지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건 너무했다.
"예전에 여긴 숲이었어. 마녀들이 모여 살아서 마녀의 숲이라고 했지. 그런데 리차드 아버지가 배 만들려고 나무를 마구 베면서 숲이 사라졌고 날씨도 변덕스러워졌어."
바칸과 본드는 밤이 어두울 때까지 걸었다.
"본드. 솔직하게 말해. 길 잃었지?"
"길 잃은 게 아니라 애초에 마녀의 집이 어딘지 몰라. 오두막 짓고 산다고 했으니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
바칸은 눈을 쓸어서 바닥이 드러나게 한 다음 금속 접시를 내려놨다. 금속 접시에 기름 조금 부은 후 불을 붙이니 환한 빛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퍼졌다.
"이거 뭐야?"
"바다코끼리 기름. 엄청 귀한 건데 얼어 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지."
원래부터 추웠는데 밤이 되면서 기온이 빠르게 떨어졌다. 바칸은 고급 향료의 제작에도 들어가는 귀한 바다코끼리 기름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
"이건 손삽이라고 하는 거야. 얼어 죽기 싫으면 땅을 파."
바칸과 본드는 삽자루가 20센티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삽을 들고 땅을 팠다. 약 1미터 깊이로 판 다음 급속 접시까지 밑에 내려놓으니 얼었던 몸이 서서히 풀렸다.
말린 물고기를 살짝 구워서 배를 채우고 술 한 모금까지 마시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먼저 자. 피곤하면 깨울게."
본드는 옷깃을 세우고 모자를 푹 눌러쓴 다음 쪼그리고 잠들었다. 낮에 피곤하게 돌아다녀서 그런지 꿈을 꿨다.
꿈에 신이 나타났다. 등에 날개가 달린 신은 본드 얼굴에 흙을 묻혔다. 막 항의하려던 참에 사고로 실명한 오른 눈이 번쩍 뜨였다.
"허."
놀라서 꿈을 깬 본드는 한 번 더 놀랐다. 함께 구덩이에 있어야 할 바칸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급히 바닥을 더듬어 끌러놓은 휜 칼을 찾았다. 본드는 칼날에 감은 천을 풀고 구덩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바칸이 몬스터와 싸우고 있었다.
"그리핀. 가슴이 약점이야."
본드는 큰소리로 외치면서 달려갔다. 그런 본드가 무안하게 바칸은 어느새 그리핀을 제압해 바닥에 누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숨 못 쉬게 때렸거든. 죽으면 안 되니까 숨 좀 쉬게 하려고."
바칸은 그리핀 가슴을 양손으로 꾹꾹 눌렀다. 한참 지나서 그리핀이 '끼룩' 소리를 내며 가쁘게 헐떡였다.
"왜 안 죽여? 그리핀 고기 맛있는데."
본드의 말에 바칸에게 눌려 바닥에 누운 그리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독수리를 닮은 커다란 눈에 애처로움이 가득 차올랐다.
"이거 길든 놈이야. 괜히 죽이면 주인한테 부탁하기 미안하잖아."
"다행이네. 경우를 아는 사람이어서. 따라와."
그리핀이 갑자기 입을 열어 말했다. 바칸은 구덩이에 가서 물건을 수습한 후 네 다리로 걷는 그리핀 뒤를 따랐다.
- 작가의말
마녀 만나러 갑니다. 마녀가 남자일 확률은 얼마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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