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외 변수
"공왕. 모로끄 후작이 페코 공국에 편입했다."
게르메르를 이끄는 실세에 왕비의 오라비인 모로끄의 영지는 위치가 매우 특별하다. 일개 영지 주제에 플란코와 지르 및 페코 세 국가와 국경을 맞댔다.
그러나 엄청난 지리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모로끄 후작은 가난하다. 오로지 페코를 통해야만 플란코와 지르와 교역할 수 있다. 플란코는 바다를 통해 바하랑 교역하는 게 훨씬 이득이고 지르 역시 조금 남쪽으로 내려간 다음 강을 타고 바로 겔트 지역으로 가는 게 이득이다.
일개 도시 국가인 페코를 점령하고 싶지만, 페코는 제국이 정식으로 인정한 공국이다. 충분한 명분 없이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겔트 왕국군이 패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모로끄는 바로 페코 공국에 투항했다. 모로끄의 딸과 왕세자의 혼약도 바로 결정됐다.
"동쪽 방벽이 사라졌네?"
모로끄의 영지가 페코 공국의 땅이 되었다는 건 겔트 동쪽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거나 다름없다.
궁벽한 지역임에도 모로끄가 후작이 될 수 있었던 건, 영지가 지르와 플란코 두 국가를 막는 장벽이었기 때문이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어서 왕실이 특별히 세금을 면제해줬기에 모로끄는 노예를 모두 영지민으로 전환해 후작이 되었다.
모로끄는 지르와 플란코와는 세가 험한 산을 사이에 두고 있고 페코 공국하고만 좁은 길로 통한다. 모로끄 영지민 태반이 험한 길을 따라 페코 왕국에 가서 물건 들여오는 거로 입에 풀칠한다.
"페코가 게르크를 모시지?"
페코는 분지에 세워진 도시 국가다. 사이가 별로인 플란코와 지르 사이를 오가며 무역하는 거로 큰 이득을 남겼다.
플란코의 물건은 바다를 통해 바하로만 가고 지르의 물건은 강을 통해 겔트로만 간다. 페코는 바하와 겔트의 물건 시세를 확인하여 플란코 물건을 지르를 통해 겔트로 가게도 하고 지르 물건을 플란코를 통해 바하로 가게 하면서 차익을 벌었다.
상인 정신이 뼛속까지 스며든 국가여서 당연히 게르크를 모신다.
"미아르 지역은 아직 정보 없고?"
"거긴 선택 여지가 별로 없다. 우리한테 투항하거나 헤크에게 가겠지. 그런데 게르크 교단과 사이도 나쁘고 헤크 지역과는 쉬지 않고 싸웠기에 우리 쪽으로 올 가능성이 크다."
모로끄의 돌발 행동으로 게르메르의 남은 영주들이 어정쩡해졌다. 페코에 붙기엔 바칸의 군대가 두렵고, 바칸에게 붙으면 군사력이 강한 모로끄가 겔트로 향하는 걸 막아야 한다. 이건 왼뺨 맞을지 오른뺨 맞을지 고르는 것이다. 어느 뺨이 더 아플지는 누구도 모른다.
가까운 쪽에 붙으면 또 자기들끼리 싸워야 한다. 3대나 4대 정도 거스르면 친척 아닌 사이가 없는 게르메르 지역이다. 평소 친하게 지냈는데 서로 칼 겨누는 것도 꽤 고통스러운 일이다.
"부르크에서 보낸 3천 명 병사가 배를 타고 오고 있고."
추가로 보낸 3천 병사는 세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게르메르 지역에 상륙하는 거다. 겔트 지역은 강이 너무 많은 탓에 바다와 수도 사이 꽤 넓은 늪지가 형성됐다. 바닷물과 강물에 적셔진 땅은 목재로도 못 쓸 잡목만 가득하다. 거기로 행군해서 수도까지 도착하면 싸우기 전에 지쳐버릴 것이다.
만약 겔트를 노리려면 플란코를 지난 다음 바로 게르메르에 상륙해야 한다. 게르메르 지역은 큰 강도 없고 길도 제대로 안 닦여서 겔트까지 오는 길이 꽤 멀고 험하다.
"하나는 바하를 노리는 거고."
바칸이라면 아마 바하를 차지할 것이다. 바하를 점령하면 비나크 지역과 보나르 지역 그리고 겔트 지역 어디든 빠르게 공격할 수 있다.
"아틀란티스를 직접 공격할 수도 있고. 내가 모든 병력 다 끌고 나왔다고 소문이 퍼졌으니."
브릭섬에서 건너온 병력이 2천이나 있다. 이들은 율족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크기의 마을 하나 만들어서 따로 살게 했다. 고분고분한 노예들이야 아무렇게 섞여 살아도 큰 문제 없지만, 브릭섬 사람들은 술 마시고 마을 처녀 희롱하는 걸 당연시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남편이 있는지 아이가 있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슴슴이, 이리 와."
말린 물고기를 질겅질겅 씹던 슴슴이가 바칸 옆으로 날아왔다. 조금 지나서 슴슴이가 입을 열었다.
"용건."
"드워프 보내서 바하 부두 세 개에 방벽 세우라고 해. 투석기랑 쇠뇌 넉넉하게 배치하고."
"톰슨 잘 있어?"
"응. 다음 배로 돌아갈 거야."
###
뮬리치는 이마 주름을 한껏 잡았다.
"이거 진심인가?"
"당연하지. 어쨌든 우린 같은 피가 흐르는 혈족이야. 생판 남보다 네가 훨씬 믿음직해."
바칸의 제안은 너무 놀라웠다. 비나크 공작이 차지했던 노른자 지역과 베르크를 바꾸자는 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베르크 지역은?"
"네비치에게 맡길 거야. 어찌 되었든 혈족이니까. 그리고 네 아이 모두 귀족 신분을 인정해줄게."
뮬리치는 바칸의 속내를 대충 짐작했다. 네비치는 게르크 교단 성직자 출신이다. 네비치가 베르크 영지를 통치하면 평민 영주들을 쉽게 아우를 수 있다. 비나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이 순식간에 안정을 찾는다.
"내가 해줄 일은?"
"네가 보유한 병사와 비나크 공작이 버리고 간 병력 합치면 천은 몰라도 팔백은 될 거야. 미아르 지역을 관리하고 견제해. 미아르를 잘 아우르면 네게도 좋은 일이야."
뮬리치가 나직한 신음을 뱉었다.
"넌 겔트로 만족 못 하는 거야?"
"넌 비나크 영지로 만족하길 바란다."
비나크 영지는 바하와 사흘, 수도 겔트와도 사흘 정도 거리다. 그리고 미아르 지역으로 흐르는 두 개의 강 중 하나가 비나크를 지난다. 바하와 겔트와 더불어 매우 중요한 교통 요충지인데 바칸이 믿고 맡기니 뮬리치는 기분이 묘했다.
"보나르는 같은 편인가?"
"우린 제국 출신 귀족이잖아. 헤크의 다미앙까지."
뮬리치는 생각을 단순하게 하기로 했다.
바칸은 바하와 육로로 하루 걸리는 거리에 있는 베르크에 박혀있는 골칫덩이 뮬리치를 뽑아냈다. 그 자리에 네비치를 넣어 최선의 수습을 했다.
뽑아낸 뮬리치를 비나크 지역에 박아넣는 것으로 미아르 지역까지 해결했다.
눈치 열심히 보던 보나르의 세 여우는 당연히 마음을 굳히게 된다. 아틀란티스와 비나크 지역 그리고 겔트 지역의 서너지는 엄청나게 강하다. 괜히 다른 곳에 붙었다간 뼈도 못 추린다.
게르크 교단만 어떻게 해서 제거한 다음 다미앙까지 끌어들이면 겔트 왕국은 실질적으로 바칸 손에 완전히 들어온다. 게르메르나 미아르는 겔트를 지키는 성벽 이상의 역할이 아니다. 겔트와 분리되면 경쟁력이 전혀 없는 곳들이다.
'괜히 딴마음 품지 말고 목숨이나 건지자.'
###
아틀란티스 해군 제독은 곤혹에 빠졌다.
"쇳덩이가 어떻게 바다에 뜰 수 있지?"
크기는 2천톤급 배와 비슷했다. 그러나 무게는 몇 배 족히 된다. 배의 앞뒤로 충각을 달았다. 뱃전에는 소형 쇠뇌와 게르크 집행관들이 사용했던 단창 발사기가 수십 대나 고정되어 있다.
2만톤급과 만톤급은 마르카다와 블라우크 무역에 이용되었다. 5천톤급은 아틀란티스와 겔트를 잇는 역할이다.
드레이크 해군은 천톤급과 2천톤급 나무배 그리고 2천톤급으로 추정하는 금속 군함을 타고 출정했다. 목표는 부르크의 3천 병사를 나르는 운송선을 찾아 격침하는 것이다.
"저거 이름이 뭐라고 했지?"
"구명선."
실상은 바칸이 제안한 동력선이다. 동력선에 든든한 밧줄을 여럿 매달고 거기에 솜을 넣은 가죽 주머니를 가득 달았다. 물에 빠진 사람들은 동력선에 매단 밧줄을 잡으면 익사할 위험이 없다. 가죽 주머니는 밧줄이 가라앉지 않고 수면에 뜨게 하는 역할이다.
평소엔 2천톤급 배 뒤꽁무니에 매달아둔다.
2천톤급 배에는 투석기도 있다. 사정상 바위 열 개 정도밖에 싣지 못했지만, 하나만 날려도 상대를 혼비백산하게 할 수 있다.
물론, 투석기는 상대를 놀래주는 목적으로 실질적인 효과는 기대하지 않는다. 아틀란티스 해군의 주요 작전은 충각 공격이다. 같은 크기의 배보다 무거운데 속도는 훨씬 빠르다.
"가자. 태양신의 빛이 세상 어디까지 비추는지 확인해보자."
아틀란티스에서 출발한 선단은 얼마 안 가고 한 척이 빠져나왔다. 빠져나온 배는 백여 명의 사람을 바하에 내려놓은 다음 아틀란티스로 돌아갔다.
"건물은 놔둔다. 제단만 철저하게 부순다."
존이 이끄는 바르바리얀 부족이었다. 제국 전투마보다 힘이 더 센 아틀란티스의 야생마도 못 버티는 육중한 몸들이 바하 교단으로 달려갔다.
금속 갑옷은 제작 중이어서 전부 가죽 갑옷을 입었고 투구는 맹수 이빨이나 발톱으로 치장했다. 무기는 망치나 도끼 혹은 낭아봉을 들었다.
"수바르카."
북풍과 자애의 여신 와희에게 기도를 올린 바르바리얀 전사들은 게르크 교단의 제단을 한 번씩 두드렸다. 채 서른 명까지 가지 않아 제단은 원래 모습을 절대 연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서졌다.
"마무리는 내가 한다."
존이 예전보다 조금 더 길고 머리 부위가 훨씬 두꺼운 낭아봉으로 내리쳤다. 제단이 완전히 부서졌고 건물이 흔들렸다. 제단을 부순 존은 지도를 꺼내 다음 목표를 확인했다.
미클이 미리 화살표로 순서를 정해줘서 머리 쓸 필욘 없었다.
"자. 다음 마을까지 달려간다."
겁에 질려 아무 대응도 못 하고 부들부들 떨던 바하 교구의 주교와 성직자들은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부두로 갔다. 병사들은 성직자들을 배에 태워 헤크 지역으로 보냈다.
###
다미앙은 과일주를 연속 석 잔 마셨다. 그런데도 불은 전혀 꺼지지 않았다.
"대주교. 올해 가을까지 기다리기로 했잖아. 약속은 지켜야지."
"미안합니다. 그러나 비나크 지역의 성직자들이 전부 쫓겨났고 제단이 박살 났습니다."
"부르크가 졌으니까 나 따위는 눈에 안 찬다 이건가?"
"후작. 우리도 사정이 있습니다."
"이건 바칸의 계략이야. 너희를 끌어낸 다음 날 해치우려는 계략이라고. 뻔히 알면서 왜 바보같이 당해주는 건데?"
"어쩔 수 없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면 바칸이 공격하기도 전에 먼저 무너집니다."
"그러니까 왜 집행관 보내서 바칸 건드렸냐고. 하려면 제대로 해서 죽여버리든가 할 것이지."
게르크의 집행관이 오우거를 사주해서 아틀란티스 공왕 바칸을 공격했다. 악마의 하수인인 몬스터와 결탁한 게르크는 악신이다. 악신을 모시는 성직자를 쫓아내고 제단을 박살 낸다.
바칸이 내세운 명분이었다.
'게르크 대주교와 함께 진실의 심판을 받겠다.'
이 한 마디에 게르크 교단은 아무 대응도 할 수 없었다. 진실의 심판은 숨긴 진실을 끄집어낸다. '사주'와 '결탁'이라는 단어는 악의적이지만, 남은 건 모두 사실이다.
게르크 교단이 공식적으로 대응하지 않자 수많은 신자가 등 돌렸다. 어차피 세상엔 믿을 신이 많다. 굳이 나쁜 신을 모실 필욘 없다.
"보나르로 가서 우리 지지자들을 모은 다음 바하를 공격하겠습니다."
대주교도 마음이 갑갑했다. 감히 신의 제단을 부수려는 자가 없어서 현재는 비나크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이대로 보고만 있으면 보나르나 겔트는 물론이고 미아르의 제단도 전부 부서질 게 뻔하다.
'겔트와 미아르 그리고 게르메르가 보나르와 비나크와 싸우는 구도를 예상했는데, 어떻게 순식간에 이렇게 되었지?'
예상외의 변수가 너무 컸다. 게르크 신성 왕국 혹은 공국을 세우고 신성왕이 되려던 대주교의 꿈은 아스라이 멀어졌다.
- 작가의말
게르크 교단이 바칸을 생포하려고 한 이유 중 하나가 다미앙 설득입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바칸의 실력을 키워주고 병력도 얻게 하고 갑옷도 얻게 하고 지식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