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히고 설키고
교단의 제단 앞에 뮬리치와 바칸 그리고 네비치가 섰다. 원래는 네이치가 끼어야 할 자리지만, 신에게 드리는 금식 기도는 신성한 것이어서 무엇보다 우선한다.
그래서 네비치가 대신했다.
주교가 날카로운 칼로 셋의 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셋의 피가 각각 다른 그릇에 떨어졌다. 세 그릇을 제단에 올려놓은 주교는 중얼중얼 고대 제국의 언어로 된 기도문을 외웠다.
기도문의 운율에 따라 핏방울이 생명을 얻은 것처럼 통통 튀었다. 점점 높이 뛰던 세 핏방울이 허공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하나로 합친 핏방울은 고르게 섞이더니 바칸의 핏방울을 담았던 그릇에 떨어졌다.
"게르크 교단에 기록된 겔트 왕국 7번 혈통에 부합합니다. 그리고 바칸 형제의 피가 가장 진합니다."
뮬리치의 뒤집기 시도는 실패했다. 오히려 바칸의 피가 뮬리치보다 훨씬 진하다는 불리한 판결을 받았다.
뮬리치가 실책을 저질러 영지에 큰 피해를 주면 영주가 바칸으로 교체될 가능성이 커졌다. 혈통에서 오는 명분은 바칸이 뮬리치보다 훨씬 크다.
뮬리치로선 오크 막으려다가 오우거 불러온 셈이나 다름없었다.
실망을 가득 안고 영주성으로 돌아온 뮬리치는 침실부터 찾았다. 바칸이라는 강력한 계승권자가 갑자기 생겨서 마음이 급했다.
창백한 얼굴로 잠자던 부인이 뮬리치의 기척에 눈을 떴다. 뮬리치는 갓 잠에서 깬 부인에게 과일주를 건넸다.
"내가 지난번에 부탁했던 일은 어떻게 됐지?"
뮬리치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는 달리 편하게 말했다. 과일주로 잠긴 목을 푼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가문에서 거절했다. 네이치가 죽으면 딱 한 명만 내 아이로 등록할 수 있게 허락한다고 했다."
부인은 자기주장을 하나도 안 펼치고 가문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는 여자였다.
뮬리치는 밖에 바람을 피워 낳은 자식이 여럿 있다. 합법적인 부인과는 자식을 보지 못한 자작은 밖의 아이들을 교단에 등록하여 귀족 신분으로 만들고 싶었다. 마치 뮬리치의 아버지가 네비치네 여섯 남매한테 해줬던 것처럼.
그러나 부인 가문에서 동의하지 않았다.
부인 가문에선 뮬리치의 아들이 영주 자리를 빼앗을까 봐 걱정이었다. 많은 마을을 지배하고 군사력도 출중한 뮬리치와 달리, 부인의 가문은 고작 작은 마을 하나 지배했다. 하나뿐인 마을을 뮬리치에게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이었다.
네이치가 죽고 아들 하나뿐이라면 걱정할 게 없다. 그 아이는 베르크의 영주가 되어야 하니까. 베르크의 영주가 되면 다른 계승권은 소멸한다.
뮬리치와 네이치의 사이가 안 좋은 걸 알면서도, 네이치가 베르크의 영주가 되고 뮬리치의 자식이 자기 마을 영주가 되어 마을을 빼앗아갈 것을 걱정했다.
가문의 여인이 낳은 아이라면 영주 자리를 빼앗겼을 때 덜 억울하기라도 할 테지만,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놈팡이에게 빼앗기면 분통이 터질 것이다.
그래서 네이치가 죽기 전엔 절대 안 된다고 버텼다. 부인한테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아는 뮬리치는 좀 더 쉬라고 다독이곤 밖으로 나왔다.
'네비치와 바칸만 아니면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졌을 텐데.'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네이치를 큰 피해 없이 독립시킬 수 있어서 바칸에게 고마운 마음이 조금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빨리 죽어버렸으면 싶을 뿐이었다.
"집사에게 서재로 오라고 전하도록."
집사가 서재에 온 이후에도 뮬리치는 하얀 종이를 펼쳐놓고 한참 고민했다. 수많은 상황을 가정하고 분석한 후 깃털 펜을 들고 글을 써 내려갔다.
"읽어보도록."
집사는 편지를 받아 자세히 읽은 다음 곱게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바하 영주한테 네가 직접 전해야 한다."
집사는 봉투를 밀랍으로 봉한 다음 도장을 찍어 소매에 넣었다.
"계획 실행을 앞당기고 준비는 더 철저하게 해야 한다. 제국 기사를 상대하는 마음으로 준비하라고 꼭 강조하도록."
집사는 부하 몇 명 급히 불러서 영주성을 떠났다. 밤길을 재촉할 것을 대비하여 횃불도 몇 개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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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가 지났다. 이미 1천 명에 달하는 영지민이 서류로는 바칸의 마을 소속이 되었다. 이제 재산 분할을 마친 후 계승권을 포기하고 독립하면 서류상의 일은 끝난다.
네비치가 건네는 재산 목록을 확인한 바칸은 기가 막혔다.
가죽만 십만 장이 넘었다. 해마다 세금으로 올라오는 가죽 외에도 초반 몇 년 동안 큰돈을 들여 사들인 가죽까지 포함했다. 시세로 따지면 3천 골드 정도로 추정되는 어마어마한 물량이다.
그 외에도 딱 봐도 쓸모가 없겠구나 싶은 물건이 대다수였다.
"노예 5천?"
5천이나 되는 노예를 먹여 살리는 것도 문제다. 이건 순전히 망하라고 하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가문 소유의 노예입니다. 자작과 상의하여 노예 대신 다른 걸 받아도 됩니다."
노예 가격이 계속 내려가서 다른 물건으로 주는 게 손해다. 다른 물건은 내년에도 가격이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노예 가격은 내년에 최소 1/5 수준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측한다.
네비치는 약속대로 뮬리치의 손해를 최소화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당장 모두 가져가야 하는 건 아니지? 추운 겨울인데."
"자작과 상의하십시오."
바칸은 바로 뮬리치를 문서방으로 불러서 협상했다.
"가죽과 노예만 가져가겠다. 대신 명년 6월까지 시간을 달라."
바칸은 오크 부락 자리에 지은 마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러모로 괜찮은 마을이지만, 베르크와 바하와 모두 하루 안 걸리는 거리라는 점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십만 장이 넘는 가죽과 오천 명이 넘는 노예를 계속 끌고 다닐 수도 없기에 일부 재산을 포기하는 걸 조건으로 유예를 원했다.
"그건 어렵다. 재산은 반드시 1/7로 가져가야 한다. 괜히 꼬투리 잡힐 일은 하고 싶지 않다."
"포기한 재산은 가죽을 보관하는 창고 비용이랑 노예 먹여주는 음식 비용으로 해줄게."
처분이 어려운 물건이라고 안 아까운 건 아니다. 바칸에게 설득당한 뮬리치는 네비치에게 지시했다.
"내년 6월까지 가죽이랑 노예를 나한테 맡긴다고 한다. 거기에 드는 비용을 계산해서 노예 숫자를 늘리도록. 누구도 꼬투리 못 잡게 확실히."
결국, 바칸은 10만 장이 넘는 가죽과 8천에 달하는 노예를 받기로 했다. 창고 임대 비용과 노예 식대를 최대로 쳐준 결과였다.
계산 근거까지 문서로 작성해 첨부한 후에야 바칸의 독립에 관한 일을 마무리했다.
"바칸, 신께서 네 앞길을 밝게 비췄으면 한다."
뮬리치가 환한 웃음으로 작별하고 영주성으로 돌아갔다.
바칸은 10만 장이 넘는 가죽에 대한 권리 문서와 노예 8천 명을 데려갈 수 있는 노예 문서, 그리고 오크 부락이었던 곳에 세운 마을에 대한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와 영주 직위를 승인하는 문서 등을 들고 베르크를 떠났다.
바칸의 짐에는 어머니의 초상화와 처음부터 눈독 들였던 목걸이도 들어있었다.
베르크 마을을 나선 바칸은 빠르게 달려 고블린 산으로 갔다. 바칸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일행이 진한 포옹으로 바칸을 맞이했다.
"대장, 어머니 그림. 어머니 보고 싶다."
발디의 초상화를 본 존이 눈물을 흘리며 아이처럼 울었다. 바칸도 울컥했지만,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감상에 빠질 겨를이 없었다.
"다들 짐 수습해. 바하로 가서 다미앙을 찾는다."
"다미앙은 어제부터 여기 있었어. 방금 숲으로 갔는데 곧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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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칸, 내가 너라면 당장 도망치겠어."
다미앙이 말했다.
"며칠 전에 베르크의 집사가 편지를 들고 바하를 찾아왔다. 최대한 안 들키려고 노력했지만, 내 눈을 벗어나진 못했지."
"잿빛 수염?"
"그래. 그 전엔 베르크 자작과 바하 영주가 직접 만나서 꿍꿍이를 꾸미기도 했다."
"궁금해지는군."
"독립한 네이치를 '북부 해적'이 죽이는 멋진 계획이지. 선원 조합에 있는 나랑 친한 간부가 알려준 정보야. 해적 중에서도 흉악하기로 유명한 놈들을 불렀다고 하더라."
"네이치가 죽은 후 마을은?"
"천 골드. 바하 영주가 갖는다."
"차라리 나한테 200골드 주고 그냥 가져가지."
"어중이떠중이를 모아 영지민 만들기보다 베르크의 우수한 영지민 1천이 낫지. 게다가 바하 영주가 직접 지배하는 데 베르크 자작이 동의하기도 했고. 천 골드가 안 아까울 거야."
"베르크 자작은 뭘 얻지?"
"네이치가 분할 받은 재산을 개인 재산으로 회수. 뮬리치 개인 재산 중 처분하기 어려운 것들을 바하 영주가 팔아주기로 했고. 물론, 수수료 받겠지만."
"비나크의 공작이 두렵지 않은 건가?"
"확실한 정보는 아닌데. 제국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야."
"겔트 왕국에 대한 영향력은 이미 사라졌겠군. 제국하고 거리가 가장 먼 왕국이니."
그때 잠자코 듣기만 하던 미클이 끼어들었다.
"대장. 예전에 제국의 영향력이 사라지면 힘센 놈이 지배한다고 말했잖아. 기존의 제국과 교단에 의해 확립된 질서가 무너질 거라고."
"응. 그런 얘기 한 적이 있어."
"그럼 비나크 공작을 더 두려워해야 하는 거 아냐?"
"미클. 저기 산 두 개 보이지?"
미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가까운 산엔 오크가 있고 저 먼 산엔 오우거가 있어. 넌 오크가 싫어하는 향수와 오우거가 싫어하는 향수 중 하나만 살 수 있어. 어느 걸 살 거야?"
"당연히 오크지. 오우거는 멀리 있잖아."
"마찬가지야. 공작은 멀고 베르크는 가까워. 그리고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야."
"또 뭐가 있어?"
"제국의 권위가 무너진다면 교단의 권위가 강해질 거야. 귀족이 아닌 영주들이 연합하여 공작을 견제할지도 몰라. 비나크 공작이 무너지면 베르크 자작은 바하 영주가 보여주는 우호적인 제스처가 필요해. 반대로 왕실의 지원을 받는 비나크 공작이 승리하면 바하 영주는 귀족인 베르크 자작의 보호가 필요하지."
미클은 바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제반 지식이 부족한 것도 있고 사고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기에 이해가 느린 부분도 있었다.
미클과 톰슨은 바칸이 하는 말을 암기했다. 계속 곱씹다 보면 언젠가는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바칸의 말대로 귀족 영주와 평민 영주 사이의 힘겨루기가 은근히 진행되는 중이다. 지금은 후각이 예민한 일부 영주만 움직이지만, 생존과 직결된 문제여서 정보가 늦은 자들도 곧 분위기를 파악하고 대비할 게 분명하다.
진영을 갈라 상대를 공격하든 섞여서 공존을 선택하든, 새로운 질서를 위한 힘겨루기는 불가피하다. 베르크 자작과 바하 영주는 질서가 재확립되는 위험한 시기를 힘을 합쳐 버티기로 했다.
그리고 그 제물로 바쳐진 게 네이치였다. 네이치를 죽이고 이익을 나누는 것으로 둘의 동맹을 더 확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성직자의 개입으로 지금은 제물이 바칸으로 바뀌었다. 성직자가 알고 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제국으로 도망가는 건 어때? 거긴 지금 기회의 땅이야."
다미앙의 말에 바칸은 고개를 저었다.
"제국인은 자기들 혈통에 과한 자부심이 있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제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뭔가는 없어. 그들 눈엔 겔트 왕국 출신이나 야만인이나 똑같을 테니까. 무지하고 열등하여 깔볼 대상일 뿐이야."
"나도 바하 영주한테 완전히 버려졌어. 대리인 없이 직접 지배하기로 했으니까."
"마을 만들고 영지민 모은 다음 군대를 길러야겠어. 다미앙, 협력하자."
- 작가의말
뮬리치는 바하 영주와 손잡고 독립한 네이치를 죽이기로 계획을 짰습니다. 그런데 바칸이 중뿔나게 끼어들어서.
주인공 버프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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