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인간
바칸은 존이 상대하던 두 늑대 인간 중 하나를 끌어다가 싸움을 벌였다.
약한 공격으로 상대를 흥분하게 한 다음 함정 파서 심장을 가격하고, 위기를 느낀 늑대 인간이 변신하면서 집중력이 떨어지는 순간에 톰슨이 석궁으로 저격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두 번째 늑대 인간도 잡았다.
"존, 죽이지 마."
존은 일대일로 늑대 인간을 압도했다. 기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공격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니다. 단지 어마어마한 힘을 실은 부드러운 공격으로 늑대 인간을 궁지에 몰았다.
세 번째 늑대 인간은 어깨 둘 부서지고 잡혔다.
"톰슨, 이빨 자국 있어?"
"없어. 근데 왜 이빨 자국 찾는 거야?"
"순혈이야. 부족을 이뤄 사는 놈들이니 죽이면 안 돼."
늑대 인간은 순혈과 변이로 나뉜다.
순혈은 번식을 통해 피를 이어간다. 이들은 가족 단위로 뭉쳐서 살며 몇 년에 한 번씩 거주지를 옮긴다. 식성이 어마어마하여 먹이가 많은 곳이 필요한데, 괜찮은 땅은 강자의 영역이거나 인간이 차지해버렸다.
변이는 늑대 인간에게 물려서 낮은 확률을 뚫고 늑대 인간이 되는 현상을 말한다. 보통은 늑대 인간에게 물리고도 죽지 않은 몬스터가 변이한다. 인간은 물리고도 살 정도로 목숨이 질기지 않아 늑대 인간이 되는 확률이 오크를 비롯한 몬스터들보다 훨씬 낮다.
순혈끼리는 피로 끈끈하게 이어져서 철저하게 복수해준다. 변이는 감염으로 인한 종의 전환이기에 죽여도 뒤탈이 없다.
"가족을 불러. 협상하고 풀어준다."
바칸의 말에 가장 먼저 잡힌 늑대 인간이 목을 쭉 빼 들고 늑대 울음소리를 냈다. 컴컴한 밤에 들으면 바지에 오줌 지릴 것 같은 으스스한 소리였다.
약 20분 정도 기다리니 늑대 인간 스무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물이면 바칸 일행을 다 죽이고도 남을 숫자다. 바칸과 존이 없었다면 아마 셋이서도 백 명이 넘은 병사를 학살했을 것이다.
"너희 영역도 아닌데 왜 우릴 공격했지?"
바칸이 먼저 따지고 들었다.
"너희 영역도 아니다."
푸른 보석을 다듬은 듯 신비한 눈동자를 한 늑대 인간이 말했다. 가슴에 흰털이 수북하여 다른 늑대 인간과 구분되었다. 남은 늑대 인간은 털 빛깔이나 키나 체형이 비슷비슷하여 쉽게 구별 되지 않았다.
"좋은 이웃이 되고 싶은데."
바칸에겐 목을 뻣뻣하게 세울 밑천이 없었다.
"같은 먹이를 다투는 자들끼리 좋은 이웃이 될 순 없다."
바칸이 운 좋게 인질 셋 잡아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벌써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을 것이다.
"마음먹고 싸우면 그쪽도 반 정도 죽을 거야."
바칸은 기세에서 너무 눌린다는 생각에 강하게 나갔다.
"마법사 냄새가 안 난다."
늑대 인간의 후각은 입체적이다. 냄새로만 수많은 정보를 얻어내는 신기한 종족이다.
"주술사가 있어."
바칸의 말에 늑대 인간은 망설여졌다. 주술사가 있다면 자신들의 약점을 알 가능성이 크다. 알아도 쉽게 공략할 수 있는 약점은 아니지만, 상대 숫자가 많으니 꽤 큰 희생을 치러야 한다.
"공생을 제안하지. 먹이가 많은 영역을 알려주고 병을 치료해준다. 사냥이 어려울 땐 우리가 고기와 피를 제공하지. 어때?"
바칸은 늑대 인간이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했다. 먹성이 좋은 늑대 인간은 겨울에 배곯는 일이 많다.
게다가 회복력이 어마어마한 늑대 인간은 일단 앓으면 목숨이 위험하다. 목숨이 위험하지 않은 병은 잘 걸리지도 않고, 걸려봤자 경이로운 회복력으로 바로 극복한다.
"우린 뭘 해야 하는가?"
늑대 인간 대표가 유혹에 흔들렸다.
"헌혈."
"헌혈?"
"정기적으로 피 뽑아주면 돼."
늑대 인간 대표가 한참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진심이 아니군. 맹세해. 달의 여신 베로라한테."
제국에선 늑대 인간을 몬스터로 규정한다. 그러나 겔트 왕국에선 변이로 생긴 떠돌이 늑대 인간만 몬스터로 하고 순혈은 이성을 갖춘 종족으로 정의했다.
이들이 믿는 달의 여신 베로라는 비나크와 베르크의 셋째 딸로 알려졌다.
"너희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는데 나만 맹세할 순 없다."
맹세를 어겨도 상관이 없는 인간과 달리, 늑대 인간은 신의 이름을 건 맹세를 어기면 신벌을 받는다.
'존재의 부정'이라는 벌로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죽을 때까지 느껴야 한다.
"상대에 우선하여 협약을 어기지 않는다. 이 정도 맹세는 괜찮지?"
"좋다."
상대가 배신하면 약속을 어겨도 되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
일행은 계속 숲에서 훈련하게 하고 바칸만 스물이 넘은 늑대 인간과 함께 움직였다. 심지어 포로로 잡은 늑대 인간 셋도 풀어줬다.
"인간은 의심이 많다고 들었는데 넌 다르다."
"베로라의 이름으로 맹세했는데 안 믿으면 멍청한 거지."
바칸은 늑대 인간 못지않은 속도로 숲을 달렸다. 어느새 남쪽 숲을 벗어나 바칸의 영지에 이르렀다.
"내 영지에서 사냥하는 건 금지다."
바칸은 숲 가까이에서 풀을 찾는 양과 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풀이 부족하여 아직 양과 말은 목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저긴 뭐 하는 곳인가?"
"목장. 쥐랑 양이랑 말 키울 예정이지."
"그래서 인간이 점점 약해지는 거다."
바칸은 늑대 인간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농사를 지어 음식을 얻고. 방어구와 무기를 만들어 가죽과 손톱을 대신하고. 사냥이 아닌 사육으로 고기를 얻고. 천 년 전 제국에 비교하면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약해졌다."
기록조차 남지 않은 제국이다. 문자와 언어는 전해졌지만, 제국에 관한 기록은 사라졌다. 인간 제국인데 인간이 가장 몰랐다.
"틀렸어. 개개인이 약해졌지만, 인간이라는 종 자체는 강해졌지."
"종 자체는 약해지고 일부 개체만 강함을 유지하는 거다. 넌 제국을 모른다."
바칸은 조금 고민하고 반박했다.
"그래서 너흰 혼자서 오우거 잡을 정도로 강해졌어?"
"태생의 한계가 있다. 종 전체가 그 한계를 벗어나려면 환경 변화도 필요하다."
"그러니까. 인간이 아무리 편리함을 버리고 야생과 맞서도 한계 이상으로 강해질 순 없어. 인간은 그걸 알고 진화 방향을 바꾼 거야."
"그래서 신에게 버림받았지."
이쪽으론 지식이 별로 없어서 바칸은 언쟁을 멈췄다.
바칸과 늑대 인간은 먼저 항구로 갔다. 항구에는 강철 대나무로 높게 쌓은 단상에 흰머리수리가 날개를 활짝 편 채 바다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에 죽었어. 트롤과 싸우다가."
"너희가 살아남은 게 기적이다."
"우리도 강해."
바칸은 방향을 꺾어 동쪽으로 움직였다. 가는 길에 염전이 나타났다.
"이건 염전. 소금 만드는 곳이야. 그리고 저기 높은 봉우리 보이지? 저기가 흰머리수리 둥지가 있는 산이야. 너희는 저 밑에 집 만들면 돼."
흰머리수리 영역에 들어선 늑대 인간은 코를 벌름거렸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먹이가 사는지 냄새로 가늠하는 것이었다. 공기 속에 퍼진 온갖 냄새가 이곳은 먹을 게 넘치는 곳이라고 알려줬다.
"저기 바위산 보이지? 산 중턱에 호수 있어. 우리 영역이지만, 출입은 허락할게. 대신 사냥은 안 돼."
흰머리수리가 죽은 후 영지 동쪽의 수비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의도치 않게 늑대 인간을 만났다. 바칸은 흰머리수리의 영역을 늑대 인간에게 줘서 영지 동쪽 방어벽으로 만들 생각을 떠올렸다.
제국 출신이나 제국 문화를 따르는 겔트 서부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힘든 결정이었다. 가장 비옥한 땅을 차지하며 몬스터와 제일 격렬하게 싸운 제국인들은 몬스터를 향한 증오가 상상을 벗어날 정도로 강했다.
"영역 표시를 시작한다."
늑대 인간들이 네발로 뛰어 사라졌다. 영역 주인으로 인정받으려면 몇 년 시간이 걸린다. 오크나 다른 몬스터 혹은 맹수의 시달림에 당분간 바칸의 영지 쪽으로 오줌 쌀 겨를조차 없을 것이다.
"헌혈이라는 건 어떻게 하는가?"
"보름달 뜨는 첫날 낮에 여기서 보자. 주사기라는 게 있는데 그걸로 피를 뽑아갈게. 뽑은 피만큼 양젖이나 소젖을 주지. 소금을 타서."
늑대 인간은 혀로 입가를 핥았다. 양젖이나 소젖은 늑대 인간이 좋아하는 별미지만, 이들이 다가가기만 해도 소나 양이 경기를 일으킨다. 젖을 안정적으로 얻을 방법이 아예 없다. 더구나 소금까지 넣으면 몇 배는 더 맛있어진다.
"풀 먹는 짐승의 젖은 맛있다. 보름달 뜨는 날이 기다려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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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칸은 늑대 피를 가마솥에 넣고 약불로 끓였다. 피가 끓어오르자 거대 쥐의 척추에서 추출한 척수를 넣었다.
늑대 인간의 붉은 피가 조금 진해졌다.
"좋아. 트롤 피와 골수로 만든 엑타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것도 효과가 좋을 거야."
바칸은 미클에게 피 젓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냥 세고 빠르게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적당한 힘과 적당한 속도로 저어야 제대로 섞여서 약효를 본다.
"대장, 내가 만약 트롤이 되면 어떻게 죽일 거야?"
미클의 말에 바칸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클. 트롤이 되면 멀리 도망쳐."
바칸 대신 존이 대답했다.
"트롤이 흉포한 건 몬스터 변종이기 때문이야. 미클 너라면 트롤이 되어도 지금 이대로일 거야."
"대장이 이런 불확실한 얘기 하니까 기분이 이상해."
미클의 말에 톰슨이 크게 웃었다. 바칸은 톰슨의 반응을 보고 미클이 농담하는 것임을 알아채고 마음을 짓누르는 묵직한 돌을 치워버렸다.
늑대 인간의 피도 끈적끈적한 검은 액체가 되었다. 미클은 직접 만든 가죽 가방에 액체를 담은 후 일행과 작별했다. 드워프한테서 보석과 금속을 세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시간이다.
미클이 도착했을 땐 이미 강의가 시작되었다.
"이건 보석하고 경도와 성질이 비슷한 돌이다. 그러나 흔하다는 이유로 외면받지. 오늘은 이거로 그간 배운 걸 연습하겠다."
링은 금속 드워프가 만든 조각칼을 여섯에게 나눠줬다. 드워프의 솜씨답게 조각칼을 어떻게 잡아도 불편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단면을 잘 설계하여 모든 빛이 보석 중심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빛이 보석 안에서 물방울 형상으로 뭉칠 것이다. 기술이 미흡하면 큰 보석으로만 신의 물방울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드워프는 너희 손에 들린 돌 정도로도 신의 물방울을 빚을 수 있지."
링이 조각칼로 돌을 건성건성 다듬었다. 동그랗던 돌 표면에 수많은 절단면이 생겼다. 링은 순식간에 깎은 돌을 빛이 들어오는 곳에 놓았다.
돌 중심에 희미한 물방울 형상의 빛이 생겼다.
"순도가 높고 색이 고른 보석이라면 깨끗한 물방울이 보일 것이다. 너희도 따라 해보도록. 성공과 실패가 중요한 게 아니라 칼질에 얼마나 마음을 담는지가 중요하다. 우리 드워프는 모두 비슷한 손재주를 타고 난다. 그러나 도구에 마음을 담을 수 있는 특별한 자들이 있어 그랜드 마스터 칭호를 받지."
미클은 정성 들여 돌을 깎았다. 흔한 돌멩이가 아닌 진귀한 보석이라고 자신을 속이면서 칼질했다.
미클이 돌을 다 깎고 정신 차렸을 땐 이미 밤이 되었다.
"자, 미클도 완성했구나. 확인해 보자."
미클이 깎은 돌이 달빛을 받아 밝게 빛났다. 링이 깎은 돌보다 못하지만, 어설프게나마 물방울이 돌 안에 맺혔다.
"미클. 넌 힘이 부족해 금속 세공이 어울리지 않는다. 보석만 익히는 게 좋겠다."
미클을 비롯해 네 명은 보석 세공만 하기로 했다. 손가락 힘이 강한 둘은 금속 세공 전문으로 정했다.
- 작가의말
늑대 인간 : 미 부장. 이번 납혈 계약도 잘 부탁하네. 잘 모르는 사람들이 트롤 트롤 하지만, 사실 우리 늑대 인간 피가 성질이 순해서 훨씬 낫지. 게다가 우린 싱싱하고 깨끗한 고기만 먹어. 트롤처럼 썩은 고기 먹는 놈 피가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겠어. 그래그래. 쭉 마시고 내일 계약에 서명하는 거야. 어이, 거기 뭐해. 미 부장 잔이 비잖아. 안주도 어서 집어드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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