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선으로 귀환
공작 영지에는 제국 출신 노예가 수천 명 있었다.
제국의 부르크 교단 역시 노예 제도에 대한 반감이 크다. 교단은 노예를 면천해서 평민으로 만들어주는 걸 지지한다. 근래에 황실의 힘이 약해지고 교단의 힘이 갈수록 강해지며 점점 많은 노예가 평민이 되었다.
그러나 손해 보기 싫어하는 일부 귀족은 교단이 압박하기도 전에 노예를 팔아버렸다. 공작은 제국 귀족과 친분을 쌓으려고 조금 무리하여 필요 이상으로 사들였다.
'해적 출신. 이놈도 필요하군.'
제국 출신 노예는 각자 문서가 따로 작성되어 있었다. 겔트 왕국에서 일반 노예는 그저 숫자로 헤아리는 것과 달랐다.
바칸은 꼬박 사흘 시간을 소모해 노예 수십 명 골랐다. 출신이나 특기 혹은 경력 등을 보며 고른 문서를 노예를 관리하는 가신에게 건넸다.
"투견들 좀 구경해 보겠는가?"
투견은 전쟁 노예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칸은 가신을 따라 노예 거주 지역에서도 가장 깊은 곳으로 갔다.
"일 시켜도 제대로 안 하고. 때리면 반항하고. 이쪽은 몬스터도 대부분 몰아내서 참 쓸모가 없어."
"제국은 한창 내전 중인데 왜 전투 노예를 선물로 줬지?"
"거긴 넘쳐나니까. 패자야 뭐든 부족하고 승자는 뭐든 넘쳐나는 법이야."
전투 노예들은 컴컴한 방에 갇혀있었다. 팔과 다리 모두 질긴 밧줄로 묶었고 입도 천으로 묶었다. 두 입술 사이에 자리한 천 때문에 노예들은 입을 다무는 게 자유롭지 않았다.
"저렇게 묶으면 죽은 먹을 수 있어도 뭘 물어뜯지 못해."
바닥에 놓인 더러운 그릇들이 보였다. 아마 저기에 죽을 부어주면 엎드린 채 핥아먹어야 할 것이다.
제대로 못 먹었는지 노예들은 몸이 앙상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하나같이 매서웠다.
"하나에 10골드나 하는 귀한 놈들이야. 다 합치면 2천 골드 넘어."
"내가 공작한테 귀한 선물 받았군."
바칸이 숲을 개간하려면 어떻게든 맹수나 몬스터와 부딪히게 되어있다. 전쟁 노예들은 그때 큰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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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와 쌀을 실은 바칸의 배 5척이 비나크 마을에서 출발했다. 배들은 강을 거슬러 바하에 도착했다. 공작이 보낸 선장과 선원들은 배를 타고 돌아갔다.
"어렵게 섭외했어."
미리 바하로 돌아간 다미앙은 다섯 척의 배를 운용할 선장과 선원을 구했다.
"능력은 있는데 허풍이 심하고 말을 함부로 해. 그래서 남대륙으로 갈 때만 끼워주고 남은 열 달은 놀기만 하는 자야."
북쪽으로 통한 강은 갈수기인 겨울에도 바다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남쪽 바다로 가는 강은 성수기인 여름에만 큰 배가 다닌다.
다미앙이 섭외한 선장은 실력이 좋아 남대륙으로 가는 선단엔 필수다. 그러나 다른 선장은 물론 고용주들하고도 사이가 나빠 평소엔 일거리 없이 놀기만 했다.
"덕분에 싸게 고용했어. 그런데 여름에 남대륙 다녀오는 2달 동안은 일을 못 해. 저 선장 없으면 사고가 자주 나거든. 물길 보는 눈과 기후를 예측하는 재주는 누구보다도 뛰어나."
"뭐, 영지 차원에서 사람 키워야지. 언제까지 고용해서 배를 맡길 순 없잖아."
다미앙은 아직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영지 구경은 다음 기회에 하기로 했다. 미클과 떠버리는 바칸과 함께 배에 올랐다.
"내가 젊었을 적에 말이야."
사고가 나거나 처음 가는 곳이 아니면 선장은 할 일이 없다. 심심한 나머지 선장은 바칸을 상대로 허풍을 떨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놀란 가슴이 진정하지 않아. 해적선은 세 척이고 우린 한 척이었단 말이지. 속도도 해적선이 더 빨라서 포위당한 거야. 그쪽 바다는 처음이어서 물길도 익숙지 않았거든."
해적들이 배에 쳐들어왔을 때 일부 선원과 함께 해적 배를 몰고 도망친 일을 거의 영웅서사시처럼 장황하고 과장되게 늘어놓았다.
바칸은 반쯤 귀로 흘렸다. 선장은 있을 법한 이야기를 반감이 들 정도로 과장해서 말하는 게 특징이었다.
"선장, 이 배는 먼 바다로 나가긴 무리겠지?"
선장이 잠깐 쉬는 틈에 바칸은 화제를 돌렸다.
"그럼. 먼 바다로 나가기엔 배가 너무 낮아. 물건 많이 싣고 얕은 바다에서 다니기나 좋지."
바칸의 질문이 끊어지자 선장은 새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예전에 말이야. 남대륙에서 낚시를 하는데 글쎄."
선장은 낚시하다가 상어 잡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상어를 낚아 올리는 데 3시간 걸렸다는데, 실제로 3시간 얘기할 기세였다.
"남대륙은 자주 가나 봐?"
떠버리는 '대화'를 즐긴다. 그러나 허풍쟁이 선장은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말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전부 선장 본인이어서 듣는 게 재밌지도 않았다.
바칸은 차리라 자신이 대화를 주도하기로 했다.
"그럼. 남대륙은 사시장철 따뜻하지. 거긴 이쪽에 없는 것도 많아. 여름만 되면 구름꽃이 펴. 쉽게 말하면 나무에 구름이 달려."
"껍질이 깨지면 구름처럼 생긴 꽃이 튀어나오는 나무 말하는 거지?"
"맞아. 너도 아는구나."
"들어는 봤어. 그거 구해줄 수 있어? 영지에 심으면 참 보기 좋을 거 같은데."
"남대륙에서 신의 선물이라고 불러. 나무에 달린 꽃을 따는 건 손목 잘리는 중범죄야. 그리고 꽃이 땅에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람도 엄청 많아. 나 같은 외지인이 꽃을 주우면 맞아 죽을 거야."
"일부 꽃은 물에 떨어지잖아. 그런 것도 줍는 사람 있어?"
"물에 떨어지면 구름이 녹아 사라져. 그럼 의미가 없지."
"그거라도 괜찮아. 가져오면 10골드 줄게."
그쪽 사람들에겐 꽃이 의미 있을지 몰라도 바칸에겐 씨앗이 더 의미 있다.
"얼마나 가져와야 하는데?"
선장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네가 주울 수 있는 만큼. 내 예상보다 많으면 돈 더 줄게."
"약속 지킬 거지?"
"나 귀족이야. 약속을 당연히 지키지."
남대륙을 다녀오는 보수보다 더 큰 금액이다. 선장은 다가올 5월이 기대되었다. 지금이 겨우 2월이라는 게 너무 짜증 났다.
"뿌리에 열매 달리는 신기한 나무도 있어. 삶아서 먹으면 정말 맛있어. 난 남대륙에 머물 땐 그것만 먹어."
"그것도 구해올 수 있을까?"
"여기까지 오는 기간에 상할 거야. 흙을 떠나 사흘이면 썩기 시작하거든. 삶으면 더 빨리 상하고."
"열매에 보조개처럼 파여 들어간 부분 있잖아. 칼로 그 부분만 도려내서 나무를 태운 재를 묻혀. 그걸 나한테 가져다주면 10골드 주겠어. 최소 백 개는 가져와야 해."
"어떻게 도려내는데?"
"이만한 크기로 이런 형태로 도려내면 돼. 너무 크게 도려내면 썩을 거고 너무 작으면 쓸모가 없어."
바칸은 뜻밖의 횡재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농지에 뭘 심을지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선장 덕분에 해결됐다.
'귀족들은 이상한 곳에 돈 많이 쓴다더니. 이 젊은 놈도 똑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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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이 물길을 잘 탄 덕분에 이틀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선장은 바칸과 함께 배에서 내려 지형을 살폈다. 처음 오는 곳이어서 조금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이런 곳에 왜 항구가 생기지 않았지?"
물이 깊고 잔잔하여 항구 만들기 딱 좋은 지형이었다.
"마실 물이 적어. 그리고 엄청난 맹수도 살고."
2백 명이 조금 넘은 전쟁 노예들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수십 명에 달하는 제국에서 온 노예들은 선원들과 함께 쌀과 술을 비롯한 짐을 배에서 내렸다.
물건 내리느라 정신이 없는데 갑자기 흰머리수리가 덮쳐왔다. 팔다리를 묶인 전쟁 노예들은 아무 반응도 없이 바라보기만 했고 선원과 일반 노예들은 숲으로 달려갔다. 바칸은 황급히 투구를 벗었다.
얼굴을 확인한 흰머리수리가 부드럽게 착지했다. 바칸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흰머리수리와 포옹했다. 흰머리수리는 부리를 갑옷에 비볐다.
금속 갑옷 때문에 보나비친 줄 알고 덮쳤는데 투구를 벗은 바칸을 알아본 것이었다.
"톰슨한테 내가 돌아왔다고 알려줄래? 저기 있어."
흰머리수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개를 치며 바위산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저기, 좀 일으켜줄 수 있을까?"
바칸은 다리 힘이 풀려 바닥에서 못 일어나는 선장을 일으켰다.
"음, 아는 사이야?"
"응. 친해."
"흰머리수리 봤다고 내가 자랑해도 될까?"
바칸은 선장의 엉뚱한 말에 웃으며 허락했다. 선장은 허풍거리 하나 는 게 그렇게 기쁜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짐을 다 부리고 바칸 소유의 배 중에 4척은 적당한 곳을 찾아 정박했다. 5척을 다 운용할 필요도 없고 부담도 된다.
남은 1척은 선장이 갖고 바하로 출발했다. 배가 멀리 떠난 후 바칸은 비수로 전쟁 노예를 묶은 밧줄을 자르고 입에 묶은 천도 풀어줬다.
"일단 먹자."
바칸은 음식을 담은 상자를 열어 노예들을 먹였다. 밀가루를 구운 떡 두 개에 고기 한 덩이씩 줬다.
"음식 다 먹으면 여기 와서 물을 마셔."
한 사람당 한 잔씩 마시니 배에서 내린 물이 동났다.
"일단 여기서 쉰다. 내가 이름 부르는 사람은 여기 와서 얘기 좀 하고."
바칸은 한 명씩 불러서 노예 문서에 적힌 사항을 확인하고 빠뜨린 게 없는지도 캐물었다. 그리고 전부 평민으로 만들고 영지민으로 받아줄 것을 약속했다.
수십 명 노예와 대화를 마치고 조금 더 있으니 존과 톰슨이 수레 수십 대 끌고 나타났다. 둘은 먼저 미클과 떠버리 베록과 회포를 풀었다.
"상자를 모두 수레에 실어라. 집으로 간다."
일하기 싫어한다고 알려진 전쟁 노예들도 짐 싣는 걸 도왔다. 2월 초의 쌀쌀한 날씨에 바닷바람까지 가세하니 그 추위를 어떻게 견딜 수 없었다.
톰슨은 건초를 담은 상자를 뜯어 수레를 끄는 말과 따라온 양들에게 먹였다.
"꼭 알아둬야 할 걸 하나만 말하겠다. 우리 영지에서 말과 양은 해치지 않는다. 발각하는 즉시 목을 벤다."
싣고 온 물건이 하도 많아 수레에 반의반도 못 실었다. 다시 돌아오기로 하고 일단 수레를 끌고 출발했다.
바위산이 가까워지니 산 위에 있는 집이 보였다.
"저기 돌로 지은 집, 너희가 살 집이다."
존의 말에 가까이 따르던 노예들은 의심 가득한 눈을 했다.
"진짜야."
수레가 멈춘 곳은 노예들이 봤던 어떤 영주성보다 더 큰 3층 창고 앞이었다. 들고 온 상자들은 창고 1층에 차곡차곡 쌓였다. 창고 책임자는 떠버리 베록으로 정했다. 글 쓸 줄 알고 셈에도 밝으며 장부 만들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베록은 종이와 깃털 펜을 받아들고 입고 장부를 빠르게 작성했다.
"종이 울리면 여기 창고로 와서 밥을 먹는다. 식사는 하루에 세 끼 한다."
노예들이 환호했다. 심지어 대부분 일에 무관심하던 전쟁 노예들도 기쁘게 웃었다.
"이제부턴 집을 분배한다.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앞으로 나오도록."
집은 '回' 형태로 지어졌다. 가운데 마당에는 물이 나오는 수도와 공용 창고 그리고 음식 만드는 화덕이 있었다. 그리고 사방은 모두 방이었다. 문은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만들어서 거주 공간을 최대한 넓게 했다.
"자, 집 하나에 방 8개다. 내가 이름 부르면 집에 들어간다. 방 크기는 모두 같으니 안 골라도 된다."
바칸이 이름을 부른 자들이 앞으로 나섰다. 베록은 종이에 집 번호와 8명 이름을 적었다. 집마다 거주자 이름을 적은 명패를 만들어서 대문에 걸어 줄 예정이다.
노예들은 생각보다 넓은 방을 확인하고 환호했다. 천장도 높아서 돌벽인데도 답답한 느낌을 받지 않았다.
- 작가의말
영지물과 모험물이 섞였다고 소개 글에 적었습니다. 둘을 잘 스까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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