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
"폐하. 아틀란티스에서 드워프 장신구 30점을 보내왔습니다."
펠릭 황제의 잘 다듬은 손톱이 손바닥 살을 아프게 찔렀다.
"이번엔 뭘 요구했지?"
"식량과 철광석 그리고 천입니다."
"알았다."
부르크와 고딕 두 제국의 연합군 17만과 대회전을 벌인 후, 아틀란티스는 침략 전쟁을 벌인 적 없었다. 그런데도 아틀란티스 제국의 영토는 사흘이 멀다 하게 늘었다.
드워프들이 길을 잘 닦은 덕분에 아틀란티스가 부쩍 살기 좋아지면서 주변 왕국과 공국들이 너나없이 아틀란티스의 일원이 되고 싶어 했다.
"우리한테도 드워프가 있잖아. 그런데 왜 장신구도 못 만들고 길도 못 닦는 거지?"
"첩자를 보내는 족족 잡히는 바람에 알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도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정령의 돌을 율족이 공급하는 것 같다는 추측입니다. 허나 아틀란티스가 해상을 봉쇄하는 바람에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습니다."
제국을 선포한 후 아틀란티스는 해군을 확충했다. 증기 기관 덕분에 적은 숫자로 배를 움직일 수 있어 함대 규모가 꽤 컸다.
지금 제국 남쪽 섬도시 몇 개 점령해 기지로 삼아 바다를 봉쇄했다. 모든 배를 막을 정도로 봉쇄선이 촘촘한 건 아니지만, 큰 배나 대규모 선단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
"고딕은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멍청이. 아틀란티스가 중앙집권제로 하면 이쪽은 통제를 푸는 쪽으로 나가야지."
입헌군주제라는 임시 명칭을 단 펠릭 황제의 방식은 황실의 역할을 외교를 비롯한 일부 영역으로 한정했다. 제국 학자들이 고심해서 만든, 황실로 모든 자원이 모이는 불합리한 구조를 깨는 방식이었다.
대신 황실도 지켜야 하는 헌법을 제정하여 반포한다. 제국에 속하는 모든 왕국과 공국 그리고 영지의 법은 헌법과 상충하여서는 안 된다.
"폐하 밑으로 들어오기 싫어서가 아닐까요."
"뭔가 숨기는 게 있는지도 모르니 첩자들에게 유의하라고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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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티스가 제국이 되고 3년이 흘렀다. 고딕 제국의 황궁은 점점 황폐해졌다.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황궁 창고를 거덜 냈고 이젠 식기마저 팔아치웠다.
"이번에도 허탕을 쳤는가?"
"그렇습니다."
이마와 눈가에 주름이 부쩍 는 고딕 황제와 마찬가지로 케루치 역시 얼굴이 형편없이 야위었다.
"우리가 오판했구나."
"모두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아틀란티스를 오판하여 제국과 폐하를 욕보인 죄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3년 동안 제국은 아틀란티스를 향해 7번의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매번 아틀란티스 군대와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아틀란티스는 땅을 내주면서도 제국군의 진격을 느리게 했다. 그리고 보급을 귀신같이 차단하여 결국엔 퇴각을 강요했다.
억지로 싸워서 양패구상하면 펠릭에게 이득이 될 게 뻔하기에 제국군은 제대로 된 전투도 못 하고 퇴각해야만 했고, 그런 일이 반복되며 군의 사기는 물론 민심도 점점 멀어졌다.
"아틀란티스가 3년 동안 농사를 망쳤는데도 버티는 이유는 알아냈느냐?"
"어렵게 알아냈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아라."
"아틀란티스는 남대륙에 도시를 세웠습니다."
제국을 선포한 아틀란티스는 바로 군대를 보내 남대륙에 도시를 건설했다. 여전히 넘쳐나는 노예들을 남대륙으로 보내 카쿠를 비롯해 온갖 과일을 수확했다.
아틀란티스 동쪽을 영역으로 삼았던 늑대 인간들도 바칸의 권유로 남대륙으로 갔다. 거기에 바르바리얀 부족까지 보내 도시 주변의 몬스터를 소탕했다.
큰 무리의 몬스터들이 위협을 느끼고 도시를 공격했지만, 투석기와 쇠뇌 그리고 높은 성벽을 넘지 못했다.
아틀란티스는 도시를 점차 늘여서 충분한 양의 카쿠를 얻었다. 덕분에 고딕 제국의 거듭된 도발로 농사를 망치면서도 잘 버텨냈다.
"완전히 놀아난 셈이구나."
"첩자가 쉽게 들키는 문제도 있고, 정보를 얻어도 제국까지 전달하는 게 어렵습니다."
동서남북으로 교통이 발달한 제국과 달리 아틀란티스는 산이 많은 지형이어서 출입 통제가 쉽다. 흰머리수리와 그리핀이 비둘기를 보는 족족 생포하여 어렵게 얻어낸 정보도 결국 제국으로 보내지지 않았다.
"어찌하면 좋을까?"
케루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고딕 황제는 펠릭과 달리 다른 사람과 상의하는 걸 즐기지 않는다. 자기 생각을 먼저 말한 다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편이다.
그런데 3년의 시달림에 단단하던 성정이 닳아 없어졌다.
"폐하. 마법사가 접견을 요청했습니다."
고딕은 황좌에서 벌떡 일어섰다. 수십 년 전에 사라진 마법사들은 황실과 부르크 교단이 백방으로 노력해도 찾아낼 수 없었다. 지지층이 없어 세력을 이루긴 힘들지만, 파괴력 하나만큼은 누구도 얕볼 수 없는 자들이다.
"허락한다."
활기를 조금 되찾은 고딕 황제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손바닥으로 턱을 괴었다. 깊은 생각에 빠졌는지 눈동자가 대중없이 마구 굴러다녔다.
"오랜만이오. 고딕 폐하."
"마법사들은 정말 영생하는가? 지난 만남에서 나한테 백 살이 넘었다고 했던 거 같은데. 여전히 활력이 넘치는군."
"영생은 어림도 없는 소리요. 나도 이제 십 년이나 더 살는지 모르겠소."
케루치는 오돌오돌 떨리는 몸을 억지로 다잡았다. 고딕은 3단계에 이른 기사에 정신을 보호하는 장신구를 여럿 착용했다. 그러나 케루치는 겨우 2단계인 데다가 주술사이기도 하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의 몸에서 세차게 흐르는 마나를 느끼고 본능에서 나오는 공포를 이기지 못했다.
"내게 좋은 제안을 갖고 찾아온 거겠지?"
"통일을 돕겠소."
고딕은 저도 모르게 양손을 맞잡았다.
"왜 나지? 편하고 빠르게 하려면 아틀란티스가 낫고 말은 펠릭이 훨씬 잘 통하는데."
"바칸은 세상을 위해 희생해야 할 운명이오. 그리고 펠릭은 성격이 물러서 곧 다가올 혼란에 대처하지 못할 거요."
"내가 모르는 뭔가가 벌어지고 있는 건가?"
"드래곤이 부활하고 샌가가 돌아올 것이오."
고딕은 천년 제국의 비밀을 접할 수 있는 황제다. 책보단 검을 가까이하기에 많은 지식을 갖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의 비밀에 관한 정보는 모두 공부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마법사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오."
"무엇이 이 세상을 위협하길래?"
마법사는 케루치를 힐끗 쳐다봤다. 마법사의 눈길을 잠깐 받은 케루치는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샌가의 전설을 압니다."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엔 커다란 모순이 있소. 거인족의 후손들은 신을 거울이라고 부르오. 다른 세상을 비춰서 이 세상에 정령이 생기게 하는 거울. 그래서 신을 없애는 거로 정령을 추방하거나 이 세상의 일원으로 만드는 걸 숙명으로 삼고 있소."
"그러나 샌가의 추종자들은 다른 주장을 하지. 정령이 신이 되거나 이계신의 그림자가 신이 되어 이 세상의 창조주를 위협한다고 하오. 거인은 창조주가 다른 신을 없애려고 만들었다고 주장하오."
"황실 기록은 샌가의 추종자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샌가의 추종자의 주장은 신의 속삭임이라는 책에서 나왔소. 현재 널리 알려진 신의 속삭임은 이해가 어렵거나 교단들에 불리한 내용을 지웠기에 샌가에 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소. 고대 제국 언어로 된 기도문도 신의 속삭임이라는 책에서 나왔고 주술사들이 타고나는 문신을 형상화한 것도 신의 속삭임이라는 책의 지식에 기반했소. 심지어 우리 마법사들의 힘 역시 신의 속삭임에서 단서를 얻은 것이오."
"샌가의 탐구자라고 신을 찾아내는 자들이 있고, 샌가의 수호자라고 샌가를 지키는 자들이 있고, 샌가의 감시자도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 마법사가 바로 샌가의 감시자요. 샌가가 세상을 창조한 진짜 신인지 아니면 진짜 신을 위협하는 이계의 신인지 알아내는 게 마법사들의 임무요. 그러나 우린 그 임무에 실패했소."
"실패? 믿을 수 없군. 드워프가 망치로 손가락 때렸다는 말처럼."
황제의 말에 늙은 마법사는 흐릿한 웃음을 지었다.
"십여 년 전에 시도했고 실패했소. 어느 정도 자원이 모이면 또 시도할 순 있지만, 시간이 없소. 드래곤이 곧 깨어날 것이오. 세 번째이자 마지막 드래곤이."
"드래곤 잡는 데 도움을 달라고 찾은 것인가?"
"아니. 드래곤 잡는 건 아틀란티스가 도울 것이오. 성공이든 실패든 바칸 황제는 돌아오지 않소. 혼란에 빠진 서대륙을 안정하는 데 당신이 적임자요. 우리 마법사들도 입헌군주제보단 중앙집권제가 지금 세상에 더 어울린다고 판단했소. 더구나 아틀란티스가 중앙집권제의 기틀을 단단히 잡아놨소. 그 성과를 고딕 제국이 삼키면 되오."
"그렇게 쉽게 될까? 난 지금 군량도 얼마 안 남고 거듭된 실패로 민심도 다 잃었다."
"서대륙의 모든 왕국과 공국 그리고 대영지에 마법사가 방문했소. 말을 안 듣는 왕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마법을 구경하게 될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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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모순이 아닌데?"
바칸은 자신을 찾아온 마법사한테 말했다.
"모든 신이 이계에서 온 건 아니겠지. 이 세상에 신이 하나 생겼다는 건 둘도 셋도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신들끼리 다투거나 하다가 다른 세상과 통로가 생기고 그림자가 건너왔을지도 모르지. 그런 의미에서 거울이라고 한 걸지도."
"진실은 당사자들이나 알겠지. 드래곤 사냥에 관한 요청은 어찌 생각하시오?"
"도와야지. 당연히 도와야지. 하지만, 먼저 대륙 통일부터."
"시간이 없소."
"마법사들이 도우면 되지."
마법사는 손으로 목을 긁었다.
"우리끼리 정한 금제 주문이 있소. 지옥불이란 마법은 바위마저 태울 정도로 끈질기오. 눈보라 마법은 마녀들이 펼치는 기상 마법과 달리 대규모 살상력을 갖췄소. 정신 폭풍이란 마법은 겔트 지역 정도 크기의 영역에 있는 모든 지성체를 광신도로 바꿀 수 있소. 대지진 마법은 산을 무너뜨리고 강줄기를 비틀 정도 위력이 있소."
"너무 강한 힘을 품었기에 함부로 세상에 관여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소. 원칙을 세우고 엄격히 지키지 않으면 마법사는 사라질 것이오. 인간이 신화에나 나오는 몬스터를 전부 멸종시킨 것처럼. 외눈박이 거인이나 머리 셋 달린 드레이크나 꼬리 아홉인 사막 전갈 모두 십만 대군도 쉽게 해치우는 어마어마한 괴물들이오. 그런데 이젠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소. 하물며 지식의 전승이 끊어지면 사라질 마법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
"이번 드래곤이 확실히 마지막이지?"
"그렇소. 첫 드래곤은 대륙을 갈라지게 했고 두 번째 드래곤은 고대 제국을 멸하고 세상을 분열하게 했소. 세 번째 드래곤은 신을 죽이고 드래곤 종족을 부활하는 게 목표요."
바칸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샌가는 보호해야 할 대상인가 죽여야 할 대상인가?"
"우리도 그게 알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한 시도는 전부 실패했소. 그래서 드래곤을 죽이고 샌가를 불러낼 작정이오."
"제단도 없는데? 그리고 샌가가 신의 이름인지 확실치도 않고."
"불러내는 방법은 우리가 알고 있소."
"드래곤을 잡으면 세상일에 다신 관여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소. 당신이 대륙을 통일하는 걸 돕진 않겠지만, 방해도 하지 않을 것이오."
"고딕과 펠릭도 돕는 것인가?"
"그쪽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소. 대신 동대륙의 훔 제국에서 4단계 기사보다 더 강한 존재를 보내줄 것이오."
- 작가의말
두둥.
마법사와 드래곤 그리고 신이 등장할 예정입니다. 그럼 퀴즈 나갑니다. 셋 중 최종 보스는?
1. 마법사
2. 드래곤
3. 신
4. 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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