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전
수도 겔트와 20km 정도 떨어진 평원에서 대회전이 벌어졌다.
겔트 측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파종해야 할 시기가 코앞인데 2천 명 규모의 군대를 그냥 놔둘 순 없다. 영지민과 노예를 밭으로 내몰려면 바칸의 군대를 빨리 치워야 한다.
"공왕, 전술 같은 건 없는 건가?"
"없어. 우리 군대는 전술을 구사할 정도로 훈련되지 않았거든. 그냥 닥치고 돌격해서 지휘부를 박살 낸 다음 최대한 많이 죽이는 게 답이야."
드레이크는 워해머보다 훨씬 가냘픈 금속 망치 두 개를 손에 들었다. 배에서 싸울 일이 많은 드레이크는 긴 무기보단 짧은 무기가 손에 익었다.
"간단해서 좋군. 그래도 합치면 9천이 넘는 대규모 전투라니. 브릭섬에선 상상도 못 해봤어."
브릭섬 병력 다 합쳐봤자 6천도 안 된다.
"저자는 왜 앞으로 나서는 거지?"
성직자 복장을 한 노인이 종이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부르크 교단의 성직자로 전투 전에 선언문을 읽으려는 것이다.
"제국식 명분 쌓기라고 할까. 저놈들은 아직 정신 못 차린 거 같군."
전투에 앞서 이 전쟁에서 자신들이 정의의 편에 있다는 걸 강조하는 절차였다. 평화 시기에야 싸움이 끝난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니 명분이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두 국가가 명운을 걸고 싸우는 전쟁이다. 이 전투에서 진 자는 속옷까지 잃을 소지가 다분하다. 그런데도 저런 절차에 집착하는 건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는 자만심의 발로가 틀림없다.
"톰슨. 저격해."
톰슨과 바칸은 특별히 믿는 신이 없고 존은 신을 증오하기까지 한다. 미클은 게르크 신의 신자였지만, 바칸이 게르크의 집행관들에게 당한 이후로 마음이 돌아섰다.
설사 상대가 부르크의 성직자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사람은 죽이기를 망설이겠지만, 바칸 일행에는 그런 일로 주저할 사람은 없었다.
우와아.
부르크에서 보내온 천 명 규모의 병사들이 앞으로 돌진했다. 톰슨의 석궁은 정확히 부르크 성직자의 이마 중심을 맞춰 즉사시켰다.
성직자가 피 흘리며 쓰러지자 부르크 제국의 병사들은 명령이 없는데도 마구 앞으로 뛰쳐나갔다.
천천히 전진 시켜 아틀란티스의 방패병을 끌어낸 다음 병력 우위를 바탕으로 상대를 포위 섬멸하려던 작전은 그대로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사령관, 어떻게 하는 게 좋지?"
"남은 병사들도 전진해야지. 단, 대열을 맞춰서."
부르크 병사들이 제멋대로 돌격한 것이기에 사상자가 많아도 겔트 왕국엔 책임이 없다. 사령관의 명령을 전달받은 각 부대는 대열을 맞춰 천천히 전진했다. 부르크 병사들이 앞장서서 목숨을 던져주는데 사양할 멍청이는 없었다.
"드레이크. 목표는 지휘부 몰살이다."
대열이고 뭐고 없이 마구 달리는 부르크 군과 겔트 군 사이에는 꽤 큰 틈이 있었다. 바칸과 드레이크는 그 틈으로 달려갔다.
일부 부르크 병사들이 돌격을 멈추고 둘을 막아보려 했지만, 이들의 공격은 갑옷에 묻은 먼지를 닦아주는 역할밖에 안 됐다.
"예상대로 우릴 노리는군. 그런데 둘이서 뭘 하겠다고."
"앞에 선 자가 아틀린티스 공왕이다. 뒤에 따라오는 자가 망치로 두꺼운 나무 대문 부쉈던 자고. 제국 기사만큼 강하다."
"제국 기사는 우리가 여럿 잡아봤지. 걱정 안 해도 된다."
바칸과 드레이크의 것보다는 얄팍한 금속 갑옷을 착용한 부르크 교단의 집행관들이 나섰다. 사실 겔트 왕실이 부르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천 명의 병사가 아니라 집행관 때문이었다.
하나하나는 제국 기사보다 약하지만, 아티팩트를 이용해 제국 기사도 여럿 죽인 자들이어서 매우 든든한 힘이다.
"전황은?"
"부르크 병사들이 화살에 맞아 2백 정도 쓰러졌다."
부르크 병사들은 태반이 광신도다. 전문 병사보단 못하고 일반 병사보단 강하다. 일반 병사보다 잘 싸우는 게 아니라 목숨 아까운 줄 모르기 때문이다.
부르크 병사들이 아틀란티스 방패병이 세운 방벽에 막힐 때, 바칸과 드레이크도 집행관들에게 막혔다.
집행관들이 뿌린 그물에 바칸이 걸려들었다. 드레이크를 밖으로 밀쳐내느라고 정작 본인은 피하지 못했다.
"난 상관 말고 저놈들이나 죽여."
바칸의 면갑은 눈까지 막는 형태다. 그러면서도 시야를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 통짜 갑옷이어서 찌를 틈도 없으니 집행관들이 그물로 잡아둬도 어떻게 할 수 없다.
깡 소리가 연신 울리며 중병기들이 바칸 몸을 골고루 때렸다. 바칸은 공격을 무시하고 오른손 손가락을 곱게 모은 후 쭉 폈다. 그 상태에서 엄지를 접으니 손날 부위에서 칼날이 나왔다.
매끈하게 다듬은 게 아니라 작은 돌기가 가득해서 톱처럼 쓸 수 있는 칼날이었다.
툭 소리와 함께 그물이 조금 잘렸다. 집행관들은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서더니 가죽 주머니를 꺼내 바칸에게 던졌다.
바칸은 황급히 땅을 때려 옆으로 2미터 정도 물러났다. 그물에 갇힌 후 전혀 발버둥을 안 쳤기에 조여지지 않아 움직임이 방해받지 않았다.
"팔다리 잡아."
기름 뿌린 후 불로 태우려 했는데 바칸이 피해버렸다. 아예 못 움직이게 팔다리를 누른 후 기름을 뿌릴 작정으로 집행관 넷이 다가왔다.
바칸은 짬을 내 드레이크를 살폈다. 빨판이 달린 밧줄을 몸에 여럿 붙이고 있었지만, 빠른 몸놀림으로 묶이진 않았다. 그러나 철사로 꼰 밧줄은 너무 질겨서 망치를 든 드레이크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빨판은 오크 문신을 이용해 만든 거여서 특별한 방법을 알거나 문신에 바른 마나 물감이 사라지기 전에는 절대 안 떨어진다.
"서둘러."
바칸에게 조심조심 접근하던 집행관들이 상급자의 명령에 몸을 날렸다. 바칸은 몸을 움츠렸다가 활짝 폈다. 바칸을 노리던 집행자 중 셋이 즉사했다.
왼쪽 다리로 펼친 브레이크 하트가 빗나가는 바람에 한 놈만 목숨을 건졌다.
툭툭.
그물은 빠른 속도로 찢어졌다. 집행관들도 그물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굳이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물을 째고 나왔을 때 빨판이 달린 밧줄들이 날아와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바칸을 쫓아 갑옷에 들러붙었다.
바칸은 끙 힘주며 드레이크를 향해 달려갔다. 밧줄을 잡고 드레이크의 움직임을 방해하던 집행관 하나가 황급히 피했다. 바칸은 드레이크 가까이 가서 브레이크 메탈을 짧게 여럿 펼쳤다.
철사로 꼰 밧줄들이 썩은 노끈처럼 툭툭 끊어졌다.
자유를 얻은 드레이크는 바칸을 당기는 밧줄을 망치로 내리쳤다.
"소용없어. 가서 밧줄 당기는 놈들이나 죽여."
드레이크의 밧줄은 해결했지만, 정작 바칸 본인은 등에 붙은 빨판과 밧줄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다리로 세븐 브레이크 기술을 펼치는 것도 겨우 해내는 판에 등으로 펼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때 투두둑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부르크 병사들과 방패병이 고착 상태에 처하며 안정적인 전선을 이루자 옆구리 찌르러 기병들이 출발했다. 2백 기의 기병은 오른쪽으로 쭉 돌아 궁수들이 몰린 곳을 노렸다.
"드레이크. 우리 목적 잊지 마."
바칸은 집행관 네 명이 당기는 힘을 버티면서 말했다. 집행관들은 바칸을 어떻게 할 방도를 찾지 못해 그저 잡아두는 것으로 만족했다. 어서 드레이크를 해치우고 나서 바칸에게 모든 힘을 쏟아부을 요량이었다.
그때, 어마어마한 괴성이 터졌다. 몰래 다가온 톰슨이 기마병들이 출발하자마자 피어를 터뜨렸다.
여전히 오우거에는 못 미쳤다. 그러나 그간 노력이 헛되지 않아 브릭섬에서 했던 것보다는 훨씬 굉장했다.
기마병과 전투마는 물론 집행관들 몸도 살짝 굳었다. 지휘부의 평범한 귀족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목적을 이룬 톰슨은 빠르게 자기 진영으로 도망쳤다.
드레이크는 바칸의 말을 잊지 않고 지휘부를 덮쳤다. 바칸은 다리가 풀리면서 휘청이는 집행관들을 빠른 속도로 두드렸다.
브레이크 브레스 혹은 브레이크 하트로 치명타를 줬고 여럿이 몰리면 브레이크 센스로 무력화했다.
지휘부를 보호하던 여러 호위대가 드레이크를 막으려 했지만, 드레이크는 제국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는 3단계 수련자다. 수련이 아니라 음식으로 섭취한 것이지만, 3단계에 이를 자질을 타고났고 수많은 싸움으로 마나를 이용하는 법 역시 어설프게나마 익혀냈다.
"왕세자. 빨리 도망치자."
사령관은 결단이 빨랐다. 혼란에 빠진 왕세자를 부축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빨판이 달린 밧줄이 날아와 왕세자와 사령관을 잡아뒀다.
그 뒤로도 십여 개 밧줄이 날아와 중요한 귀족들을 잡아뒀다. 빨판이 달라붙은 귀족들은 황급히 옷을 벗어 던지려 했지만, 빨판은 옷이 아닌 살가죽을 잡고 있었다.
"투항. 투항한다."
"안 받는다. 드레이크, 빨리 죽여."
바칸은 한 손으로 십여 개 밧줄로 귀족을 잡아뒀고 남은 손으론 몇 안 남은 집행관들과 싸웠다. 브레이크 센스에서 회복하여 하나씩 가세했지만, 바칸에게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았다.
드레이크는 바칸이 잡아둔 귀족은 무시하고 도망가는 귀족부터 죽였다. 꼼짝달싹 못 하고 잡혀 있는 자들에겐 정말 잔혹한 고문이었다.
수십 명 귀족 중에서 셋만 도망가고 모조리 드레이크 손에 죽었다.
"투항하면 살려준다. 무기를 놓고 바닥에 엎드려라. 반항하는 놈은 가족까지 찾아내서 다 죽인다."
아틀란티스 병사들이 일제히 외쳤다. 바칸과 드레이크는 몸을 돌려 절대 투항할 리 없는 부르크 병사들의 뒤를 습격했다.
배를 타고 대륙을 반 바퀴 돌아서 겔트 왕국까지 싸우러 올 정도라면 광신도 중에서도 특별히 미친놈들이다. 설득할 가능성이 아예 없으니 죽여야 한다.
"저놈들은 왜 투항하지 않지?"
"각성제 때문이야. 이성은 잃지 않아 적과 아군 구분은 하는데, 흥분으로 싸우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지."
그나마 몬스터나 다른 영지 상대로 자주 전투했던 자들은 각성제에 적응하여 빨리 깼다. 그런 자들은 슬그머니 대열에서 빠져나와 한쪽으로 가서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그러나 흥분을 이기지 못한 자들은 지휘부 몰살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방패병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때, 톰슨이 각성제에 미쳐 눈이 뒤집어진 겔트 병사들을 향해 피어를 발산했다.
"저 멍청이."
바칸은 부르크 병사들을 학살하던 걸 멈추고 톰슨에게로 달려갔다. 3단계인 드레이크도 이르러 본 적 없는 엄청난 속도였다.
대부분은 피어에 기절하거나 정신을 차렸지만, 아주 일부는 여전히 흥분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런 자들이 피어를 펼친 후 피 토하며 쓰러지는 톰슨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갔다.
팍 소리와 함께 병사 하나가 조각났다. 몸통 부위가 사라지고 팔다리와 머리가 따로따로 땅에 떨어졌다. 너무 비현실적인 모습에 공기마저 얼어붙었다.
팍 소리가 연신 울리며 톰슨을 향해 달려가던 병사들이 전부 쓰러졌다. 바닥에 널린 시체들은 마치 커다란 절구에 넣고 정성 들여 빻은 것처럼 처참했다.
"이 오크 똥보다 못한 새끼들이. 투항하라고! 전부 무기 버리고 바닥에 엎드려!"
바칸 몸에서 아지랑이가 아물거렸다. 오우거의 피어와는 다른, 거스르기보단 지시에 따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기세가 전장에 퍼졌다.
여전히 흥분을 못 이겨 날뛰려는 자들은 주변의 정신 차린 자들에게 무기를 뺏기고 팔다리가 눌려 바닥에서 버둥댔다.
오직 부르크 병사들만 바칸의 기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싸웠다.
돌격병과 검병이 투입되어 부르크 병사들을 빠르게 도살했다. 겔트 왕실과 귀족들의 예상을 깨고 아틀란티스 군이 압승을 거뒀다.
- 작가의말
주인공이 드디어 패왕색을 깨우쳤습니다. 이제부턴 파죽지세로 달려 제국을 통일하고 황제가 되면 이야기가 마무리되겠군요.
그런 의미에서 내일부턴 3연참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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