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가의 수호자
언데드는 커다란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질긴 텅쿨과 잘 만든 가죽 허리띠는 쉽게 버텨냈다.
"피해. 다들 피해."
톰슨의 다급한 외침에 바칸과 존을 제외하고 모두 멀리 물러났다. 언데드는 주둥이가 하늘을 향할 정도로 머리를 크게 젖힌 후 입으로 검푸른 연기를 꾸역꾸역 토해냈다.
바칸은 황급히 허리띠의 매듭을 풀고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냄새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것 같은 맹독이었다.
앞발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겨우 피한 바칸은 뒷다리 쪽으로 달렸다. 존 가까이 접근한 바칸은 밧줄을 던져 발목을 감았다. 살짝 채서 쉬이 안 벗겨지게 조인 후 빠르게 외곽으로 달렸다. 묶인 발목을 신경 안 쓰고 언데드 발가락만 부수던 존은 벌러덩 넘어져서 바닥을 질질 끌렸다.
괴물이 뿜어낸 독은 흩어지지 않고 뭉쳤다. 충분한 양의 독을 살포한 괴물은 벌러덩 몸을 뒤집었다.
도끼로 내리쳐도 잘 안 끊어지던 질긴 넝쿨로 짠 밧줄이 순식간에 썩어 사라졌다. 순도는 낮아도 드워프가 단조한 덕분에 균형이 잘 잡힌 금속 화살들도 조금씩 부식했다.
"대장, 계획했던 게 다 물거품 됐어."
톰슨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언데드를 묶어놓고 핵 하나씩 파괴하려던 계획은 끝이다. 그물도 준비했고 여차하면 연료를 언데드 몸에 바른 다음 불을 붙일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금속도 녹이는 맹독 앞에선 모두 무용지물이다.
"뒷다리 발가락 모두 부수고 뒤꿈치까지 부숴서 제대로 못 달리게 한다. 날개는 한쪽만 처리해도 되니까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그렇게 했다고 쳐도 핵은 어떻게 부술 건데?"
"빠르게 못 움직이게 만드는 게 우선이야. 남은 건 그때 생각하자."
존 발목을 묶은 밧줄을 푼 바칸은 큰소리로 외쳤다. 버서커 상태에 들어가면 웬만한 외부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다.
"존. 얌전히 있다가 내가 신호 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 알았지?"
"그 정돈 나도 알아."
양쪽 합치면 백 개 넘은 자그마한 갈색 눈알을 굴리며 존이 웃었다. 바칸이 아는 버서커와는 너무나도 다른 반응이다.
"미클. 엑타르 넉넉하지?"
"지금 저기 들어가려고?"
"태양의 눈물 먹을 땐 주변을 신경 안 쓰는 거 같아."
"잠깐. 가지 마."
타이밍을 재는 중에 톰슨이 갑자기 외쳤다.
"뭔데?"
"언데드가 변했어."
평범한 성체 드레이크의 20배 정도 크기를 자랑하던 괴물의 몸이 조금씩 작아졌다. 몸이 작아지며 잘린 꼬리가 천천히 자랐고 머리에도 뿔이 하나둘 생겼다.
칙칙하던 검푸른 비늘에 광택이 조금씩 서렸다.
"핵이 합쳐졌어."
바칸에게도 은은히 느껴졌다. 수십 개 핵이 둘 혹은 셋씩 합쳐졌다.
'핵은 슬라임 비슷하구나. 덩치에 따라 분열하고 결합할 수 있어.'
언데드가 뿜어냈던 독도 서서히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칸은 이마를 한껏 찌푸리고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유용한 정보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대장. 후퇴야 전투야?"
"전투다. 다리와 날개 하나씩만 부러뜨리면 된다. 덩치가 작아졌으니 핵 부수는 게 오히려 쉽다."
그때 존이 훌쩍 뛰쳐나갔다. 바칸도 언데드 주변의 독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바로 달려 나갔다.
"드레이크는 존을 돕고 본드는 긴 창으로 핵을 노려. 꼭 성공시킬 필욘 없고 언데드 정신을 흩어지게 해주면 돼."
바칸의 생각을 읽은 톰슨이 드레이크와 본드에게 지시했다.
"미클은 쇠뇌로 도울 방법을 생각해. 세 발 남은 걸 유용하게 써보자."
언데드 꼬리가 부드럽게 휘더니 가장 먼저 접근한 존을 때렸다. 수비는 거의 염두에 두지 않는 버서커 상태여서 존은 꼬리를 순순히 맞아줬다.
뒤로 튕긴 존은 드레이크가 받아줬다. 존은 고마움의 표시로 드레이크 어깨를 살짝 두드린 후 다시 언데드를 향해 뛰었다.
'더 작아지게 해야 한다.'
꽤 줄었다곤 하지만, 언데드는 여전히 일반 드레이크의 몇 배는 되었다.
핵으로 움직이는 언데드는 굳이 따지자면 생물에 속한다. 생존에 부합한 쪽으로 진화하는 게 생명체의 본능이다.
산양도 그렇고 지금 언데드 드레이크도 그렇고. 작아지는 방향으로 변화한다는 건 몸체가 작을수록 생존에 유리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바칸이 핵을 부수기에도 유리하다. 세븐 브레이크로 웬만한 방어는 무시하다시피 하는 바칸이기에 언데드가 위기를 느끼고 몸을 더 줄이게 해야 한다.
존을 걷어낸 꼬리가 다시 움직였다. 뒷다리는 몸을 지탱해야 하고 앞다리로 공격하려면 상체도 비틀어야 한다. 지금 드레이크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꼬리다.
바칸은 꼬리가 몸을 타격하기 직전에 속도를 높였다. 꼬리 끝이 아니라 조금 안에 맞은 바칸은 허공을 날았다.
"톰슨."
바칸의 외침과 동시에 미클이 쇠뇌를 쐈다. 커다란 금속 화살의 공격에 정령 갑옷이 몸 밖으로 드러났다. 화살에 맞은 바칸은 언데드의 이빨과 앞다리 발톱을 피해 등에 안착했다.
언데드는 등에 오른 바칸을 떨쳐내려고 몸을 거세게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꼬리로 존을 공격하는 걸 잊지 않았다.
"흐압!"
드레이크가 이상한 기합을 외치며 방패로 꼬리를 막았다. 금속 방패는 무기와 달리 합금이 아니기에 살짝 구부러졌다.
방패에 주입한 마나 덕분에 몸에 충격을 받진 않았지만, 강한 타격에 드레이크는 방패를 잡은 채 바닥을 길게 쓸었다.
"드레이크 이 나쁜 새끼야. 내 창을 받아라."
야비하게 동료들이 꼬리에 얻어맞는 틈을 노려 언데드 정면으로 접근한 본드가 창을 휘두르며 도발했다.
"내가 정면으로 온 걸 다행으로 알아. 뒤로 접근했다면 네 밑구멍에 창을 쑤셔 넣었을 거야. 그리고 네 생식기에 구멍 백 개 뚫었을 거다. 드레이크 이 고자 놈아."
드레이크는 찌그러진 방패를 버리고 워해머만 들었다. 존처럼 언데드에게 밟혀도 살 자신이 없기에 꼬리를 노리기로 했다.
꼬리는 공격이 빠르고 정확한 대신 타격은 별로였다. 밀어내는 힘은 강하지만, 충격은 드레이크도 견딜 만했다.
드레이크가 뒤를 잡고 꼬리를 유인하고 존은 언데드 발에 밟히면서도 공격에만 몰두했다. 본드는 핵이 있는 위치를 살살 노리며 언데드의 화를 돋웠다.
바칸은 언데드의 날개 죽지를 두드렸다. 한 손으로 안 떨어지게 몸 전체를 지탱하느라 주먹질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
'브레이크 하트는 물체 변형을 일으킨다.'
강한 타격으로 혈액 역류를 막는 판을 깨고 심장을 찌그러지게 만드는 기술이다. 그러나 마나를 응용한 브레이크 하트의 핵심은 물체의 변형을 유도하는 것이다.
'브레이크 브레스는 타격으로 물체 작동을 멈춘다.'
횡격막에 타격을 주어 호흡을 멈추게 하는 건 부수적인 효과다. 핵심은 타격 대상이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제한하는 것이다.
'브레이크 센스는 침투다.'
생물을 상대로는 신경 계통에 침투하여 마비시키는 것이다. 마나가 없을 땐 특정 부위만 노려야 하지만, 마나가 충만한 지금은 대충 때려도 효과를 본다.
'브레이크 본은 물체의 취약 부위를 노리는 방식이다.'
주로 관절을 노리고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브레이크 본의 본질은, 작은 힘으로 큰 이득을 보기 위해 상대의 취약한 부위를 노리는 것이다.
'브레이크 메탈은 결합 구조를 깨는 것이다.'
마나를 얻기 전에는 기술로 깼지만, 마나의 도움을 받은 지금은 공격 기술보다 마나의 운용에 더 신경 써야 한다.
'다섯을 합친다.'
정신이 하나로 모였다. 다리와 허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고도로 집중한 머리는 언데드의 몸부림과 바칸의 흔들림이 정확히 일치하는 시점을 잡아냈다.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그 순간에 언데드와 바칸은 상대적으로 정지한 상태다.
다섯 종류의 마나가 동시에 움직이면서 거대한 힘을 만들었다.
자세가 바르지 않아 타격 기술은 엉망이었지만, 다섯 종류의 마나는 바칸의 기대 이상으로 일을 훌륭히 해냈다.
공격에 성공한 바칸 역시 날개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흐륵. 흐르륵."
날개 한쪽이 통째로 뜯긴 언데드가 입으로 흐륵거렸다.
"모두 철수. 철수해."
톰슨의 외침엔 다급함 그 이상의 감정이 물씬 섞였다.
드레이크가 위험을 무릅쓰고 뒷다리를 때리는 존에게 달려가 목덜미를 잡아챘다. 몸이 작아지면서 발가락을 다 회복한 탓에 존은 아까 때리던 다리를 여전히 때리고 있었다.
본드는 톰슨이 외치기도 전에 몸을 돌려 꽁지 빳빳이 세우고 도망쳤다. 언데드의 핵이 이쁜 마을 처녀를 본 심장처럼 거칠게 뛰는 걸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바칸은 뜯어낸 날개를 질질 끌고 도망쳤다. 겨우 뗀 날개를 언데드가 다시 몸에 붙일까 봐 걱정되었다.
화르르.
언데드 몸이 불탔다.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하늘로 솟았다.
"남은 날개를 버렸어."
왼쪽 날개가 저절로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언데드 몸이 빠르게 줄었다.
"아니. 저게 뭐야. 저래도 돼?"
언데드 꼬리 끝에 뾰족한 돌기 몇 개 자랐다. 보기만 해도 무척 단단할 것 같은 돌기다. 그리고 뒷다리와 앞다리 사이에 다리 두 개가 자랐다.
머리의 뿔은 두 개로 합쳐졌고 아래쪽 송곳니가 날카롭게 삐져나왔다. 눈동자에 있던 긁힌 상처가 사라졌고 언데드인지 피가 흐르는 생물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생기 넘치는 모습이 되었다.
"핵이 일곱 개로 줄었어."
머리에 하나, 목에 하나, 몸통에 셋, 꼬리에 하나. 마지막 하나는 뿔에 있었다.
치직 소리와 함께 언데드의 뿔에서 번개 불꽃이 튀었다. 입가로는 불덩이가 뚝뚝 떨어졌다. 꼬리의 돌기에는 보기만 해도 역겨운 검푸른 액체가 조금씩 배어 나왔다.
"우리가 돕겠다."
바칸은 톰슨을 바라봤다. 톰슨은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접근하는 걸 톰슨도 몰랐다는 의미다.
"바후 부족의 바후퀸이다. 그리고 '샌가의 수호자'다."
"설마?"
"그래. 그리고 '죽음을 노래하는 자'이기도 하다."
"저놈은 실수인가?"
"나는 존재 자체만으로 죽음을 노래한다. 여기 죽음의 시종들은 내가 원해서 일으킨 게 아니다. 그래서 되도록 동물이 적은 가장 궁핍한 곳에서 살면서 밖을 나오지 않았다."
바후퀸은 어떤 부족장보다 현명하고 어느 마르카보다 강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언데드를 일으키기에 외출을 자제했고 비밀의 숲은 더욱더 방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시해라."
바칸의 말에 바후퀸은 고개를 돌렸다. 바후퀸 뒤를 따르는 키 2미터 50센티의 네 명의 여전사가 5미터 길이의 나무창을 잡았다.
도움닫기로 몇 걸음 뛴 후 창 네 개가 동시에 허공을 날았다. 채 '변신'을 끝내지 못한 언데드는 날아오는 창에 꿰뚫렸다.
"5분이다. 놈은 5분 동안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고 주변 상황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남은 건 너한테 맡기겠다."
"존, 다리 부숴. 드레이크는 무기를 도끼로 바꿔서 꼬리를 잘라. 본드는 드레이크를 도와 꼬리를 고정하고."
지시를 마친 바칸은 느릿느릿 주변을 둘러보는 언데드를 향해 달려갔다. 언데드는 바칸이 접근하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연신 기웃거리기만 했다.
바칸은 언데드 머리 위로 뛰어올라 뿔에 난 핵을 때렸다. 날개를 공격할 때 깨달은 세븐 브레이크의 요체 덕분에 핵이 단번에 부서졌다.
파지직 소리와 함께 강한 전류가 바칸을 강습했다. 정령 갑옷이 전부 몸 밖으로 나와 번개 공격을 막아줬다.
- 작가의말
바칸이 다섯 기술을 합쳐 필살기를 만들었습니다. 언데드 드레이크를 잡은 후 흑염룡을 부화하는 알만 얻으면 천하무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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