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꿍꿍이
"귀족 남성입니다. 이름이 로즈앙이군요. 제국 남부 출신의 귀족으로 겔트 왕국에 아무 연고도 없습니다."
말투를 회복한 성직자는 로즈앙과 발디의 혼인 등록서를 만들고 기존 양피지의 부친 이름을 쓰는 자리에 로즈앙을 적어넣었다.
"당신에겐 다행입니다. 몇 달 전에 그 마을이 불타서 사라졌습니다. 베르크 교구의 기록이 유일하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계승권을 의심할만한 어떤 기록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직자의 펜이 빠르게 움직이며 바칸의 계승권을 합법적으로 만들 증거 문서를 만들었다. 만약 바칸의 아버지가 평민이라면 계승권은 사라진다. 그래서 아무 연고도 없고 실종으로 종적이 묘연한 귀족 남성을 바칸의 아버지로 둔갑했다.
문서를 위조한 사실이 들켜도 바칸으로선 딱히 문제 될 건 없다. 들킬 염려가 거의 없고 들키더라도 성직자가 모든 벌을 받는다.
바칸이 지시했다는 증거도 없거니와, 설사 증거가 있다고 쳐도 바칸은 벌금형으로 끝났다. 비리에 성직자가 연관되었을 때 대부분 죄는 성직자가 가져간다.
이번 일로 가장 기대되는 건 모든 게 순조로워 계승권을 획득했을 때 따라오는 재산이다. 계승권자가 7명이라고 1/7의 영지를 가져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마을의 농지나 건물 등은 귀족 가문이 아닌 영지 소유다. 영지가 아닌 가문의 재산만 나눌 수 있는데, 웬만해선 대부분 재물을 영지 소유로 돌리고 가문의 재산은 얼마 남기지 않는다.
그 얼마 안 되는 재물이 바칸에겐 큰돈이다. 드워프를 보유했기에 바칸은 어느 정도 재물만 있으면 마을을 만들어 크게 키울 자신이 있다. 마을을 관리하는 일이 쉬워 보이지 않지만, 미클과 톰슨한테 도움받으면 어려운 것도 없다.
"네이치, 교단에서 금식 기도를 칠일 정도 올리는 걸 제안합니다. 영주성으로 돌아가면 뮬리치가 당신을 죽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당신이 몸을 숨겨야 바칸이 당신 대신 독립할 수 있습니다."
경계해야 할 건 뮬리치뿐이 아니다. 네이치가 죽으면 바칸의 계승권이 훨씬 소중해진다. 네이치가 죽고 바칸이 독립하면 뮬리치의 계승권은 흔들림 없다. 바칸이 자기 몸값 올리려고 네이치를 해코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네이치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이 없는 뮬리치만 죽으면 자신이 영주가 된다. 갓 세운 마을 하나에 재물만 받고 떠나는 것보다 직간접으로 지배하는 마을이 열 넘은 대영주가 훨씬 탐난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자연적으로 발생했으면 하는 생각뿐이지 본인이 나서서 뭔가 꾸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형과 바칸이 작당해서 문서를 위조하고 뮬리치의 지시를 거스르는 행동을 하니 제대로 겁먹었다.
"네이치.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생각도 하지 말고 걱정도 하지 말고 그냥 시키는 것만 하면 됩니다.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게요."
"알았어, 형. 고마워."
바칸의 귀족 신분을 증명할 문서를 전부 작성하고 영주 신청도 처리했다. 영주가 네이치 대신 바칸인 걸 제외하면 뮬리치가 원하던 것과 같았다.
성직자는 태연한 얼굴로 바칸의 이름이 적힌 문서에 필요한 사인과 도장을 전부 얻어냈다. 주교가 미리 당부한 일이었기에 깐깐히 살피는 사람이 없어서 정말 쉬웠다.
"자. 이제 네이치는 기도의 방에서 문 열어줄 때까지 신께 진실한 기도를 올리기 바랍니다. 바칸은 영주성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면 됩니다. 담판은 내가 뮬리치와 직접 하겠습니다."
바칸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베르크 영지 계승권을 갖춘 귀족 신분이 되었기에 영주성이 가장 안전하다.
오히려 더러운 수작을 마음껏 부릴 수 있는 바깥이 바칸에겐 훨씬 위험하다. 바칸이 영주성에서 죽으면 비나크의 공작이 심증만으로도 뮬리치를 영주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귀족 작위까지 박탈할 수 있다.
바칸이 영주성 대문을 들어설 즈음, 네이치는 굶어 죽지만 않으면 절대적으로 안전한 금식 기도실에 들어갔다. 성직자는 네이치를 넣은 금식 기도실 열쇠를 얇은 가죽으로 감싸서 삼켰다.
"주교, 독립 절차 관련하여 뮬리치 자작과 상의할 부분이 있습니다."
뮬리치는 과일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얘기는 일 끝내고 마저 하겠다."
작별 인사를 나누고 주교의 방에서 나온 뮬리치는 성직자를 따라 문서방으로 걸었다.
"네비치. 여긴 여전히 마음에 드는가?"
"삭막한 영주성보다 훨씬 낫습니다."
"나는 늘 네가 네이치처럼 멍청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럼 영주성에서 함께 살 수 있었다."
"당신 아버지가 왜 자결했는지 명심하십시오. 네이치를 건드리면 당신도 같은 꼴 날 겁니다."
"네 아버지기도 하다. 좀 더 존경심을 갖추는 게 좋지 않은가?"
날 선 대화는 문서방에 들어가면서 끝났다. 네비치는 문서방의 문을 안으로 잠갔다. 뮬리치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으나 당황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네이치가 독립할 때 조금이라도 쓸모있는 재산을 얻어가게 하려고 협상하려는 것으로 추측했다.
"뮬리치, 바칸이라는 남자 말이야. 네가 보기엔 어때?"
"귀족 예절에 밝고 나이에 비해 능력도 출중하다. 일정 기간 네이치를 도와 마을을 운영하도록 의뢰할 생각이다. 이만하면 내가 형 노릇 충분히 한 거 아닌가?"
뮬리치는 굳이 네이치를 언급함으로써 네비치를 흔들려 했다.
"차라리 바칸이라는 자에게 영주 자리를 주지 그래."
"내 목적은 영지민 숫자를 줄이는 거다. '합법적'인 방식으로."
독립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바칸을 영주로 하고 간접 지배하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다.
"바칸이라는 자가 며칠 전에 1골드 헌금한 거 알아?"
"마을 설립과 영주 자격 신청 때문에 헌금했다고 주교한테 들었다."
마침 교단에 있던 보나비치가 바칸을 알아보고 뮬리치에게 알린 덕분에 바로 사람을 보내 생포할 수 있었다. 1골드 헌금 사실도 다른 경로로 뮬리치에게 보고되었다.
붉은 보석 관련한 진실을 알아내고, 상대가 멍청하다면 잘 구슬려 네이치를 엮으려 했다. 그러나 바칸이 보여준 모습에 바로 포기했다. 괜히 꼬투리 잡히면 두고두고 괴롭힘당할 것 같았다.
"그때 바칸이라는 자가 주교보다 더 능숙한 존대를 사용했다고 한다."
문법과 수사법에 모두 능통하지 않으면 존대를 사용할 수 없다. 평소에 전혀 안 쓰는 단어나 보조사를 사용해야 하고 문장 구조와 순서도 엄격했다. 그리고 악마와 관련한 단어는 전부 금지되기에 대충 공부해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최소 성직자가 되고 10년은 지나야 주교가 될 자격을 얻는다. 성인이 된 지 몇 년 안 된 것 같은 바칸이 존대를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건 정말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바칸의 정보다."
"지난번에 요청했을 땐 없다고 했었다."
"미안. 작은 심술이었어."
뮬리치는 이가 부드득 갈렸다. 양피지를 받아 살피니 출생 마을은 특별한 게 없었다.
"로즈앙? 제국 남부 출신인가?"
"귀족이기도 하다."
양피지로 작성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추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바칸이 귀족이다? 이번 일에 뭔가 음모가 있을 거라는 경고인가?"
"어머니 이름이 발디다."
"문제가 있는가?"
"후레자식이군. 고모 이름도 잊다니."
귀족가 영애의 이름은 일부 가족에게도 비밀이다. 네비치의 비난처럼 뮬리치가 후레자식인 건 아니다. 이름은 몰라도 얼굴을 보면 당연히 기억할 것이다.
"예전에 사라진 고모?"
"자세한 건 돌아가서 집사한테 묻거라."
뮬리치는 양피지를 네비치한테 돌려줬다.
"네비치, 무슨 수작인가? 섣부른 각오로 날 자극하지 말도록."
"발디는 네 고모고 바칸은 고모 아들이다. 약 20년 전에 사라진 영지의 계승권자들 중 한 명이지. 부모 모두 귀족인 바칸은 고모가 죽은 시점부터 계승권을 얻었고."
"무슨 수작이냐고 물었다. 빨리 본론을 말하도록."
"널 도울 테니 네이치를 괴롭히지 말아라."
"본론!"
뮬리치는 엄청난 인내심으로 네비치의 멱살을 흔들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독립은 바칸이 한다. 네이치가 1/6의 재산을 들고 나가는 것보단 바칸이 1/7의 재산을 들고 나가는 게 훨씬 좋지 않아?"
뮬리치는 머리를 복잡하게 굴렸다. 비나크의 공작이 개입했을 가능성, 바하의 영주가 개입했을 가능성, 네비치의 음모일 가능성, 이 모든 게 정말 기막힌 우연일 가능성. 각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손실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최대화할지 고민했다.
"네가 부인을 설득해서 밖에 있는 사생아를 정통 후계자로 등록한다면 내가 네이치를 설득해 재산 일부를 받고 계승권을 포기하게 하겠다. 그리고 골칫덩이들도 직접 치워주지. 내 손에 귀족 정보가 많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계승권 없이 재산 조금만 들고 가도 반길만한 귀족 가문을 찾아줄게."
네비치는 교단에 들어가 성직자가 되는 방식으로 네이치를 지켰다. 교구의 도움 없이는 원활하게 영지를 관리할 수 없기에 뮬리치는 네이치에게 큰 압박을 주지 않았다.
네 명의 여동생은 막내인 네이치를 보호하는 두 번째 장치다. 교구의 문서를 관리하는 네비치는 언제든 여동생을 다른 귀족가로 시집보낼 수 있다. 넷 중에 하나라도 아들을 낳으면 영지가 다른 가문에 홀라당 넘어갈지도 모른다.
보나비치의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여동생들이 네비치의 꼬임에 넘어가 다른 귀족에게 시집가지 않도록 유혹하는 것이었다.
보나비치가 자기 역할에 전혀 충실하지 않았지만, 영주성에만 갇혀 살던 레이디들은 제국 출신의 고귀한 기사에게 푹 빠져서 뮬리치의 마음을 흡족게 했다.
네비치와 누나들의 보호로 네이치가 지금까지 즐겁게 영주성에서 살 수 있었다. 만약 네비치에게 가해졌던 압박을 네이치가 받았다면 벌써 자살을 열 번도 더 했을 것이다.
"난 약속 따윈 믿지 않는다. 설사 네가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더라도."
"실질적인 이득을 줄게. 내가 약속 안 지켜도 넌 손해가 아니야."
"말해보도록."
네비치는 미리 준비한 문서를 뮬리치 앞에 쌓았다.
"그간 네가 빼돌린 영지 재산이다. 지금은 네 개인 재산이지."
영지 재산은 영주가 함부로 쓸 수 없다. 큰 사업을 벌일 때 계승권자 중 절반 이상 반대하면 진행할 수 없다. 뮬리치는 큰 사업을 벌일 때마다 다섯 동생을 설득하고 비위 맞추느라 고생했다.
가문의 재산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가문의 재산에 관해선 뮬리치의 발언권이 더 작다. 뮬리치는 고작 1/6의 권한만 있다.
보통 영주가 되는 자는 가문에서 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기에 가문 재산으로 사업하는 것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뮬리치는 그렇지 않았다.
궁지로 몰린 뮬리치는 영지 재산을 '적법'한 절차를 통해 개인 재산으로 돌렸다. 영지도 가문도 아닌 뮬리치의 개인 재산이어서 어떠한 간섭도 없이 뮬리치가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네비치가 문서를 담당하면서부터 어려워졌다. 뮬리치가 배다른 동생들을 괴롭히거나 하면 네비치가 바로 보복했다. 그때부터 예전엔 헌금으로 쉽게 해결했던 일을 네비치와 협상하면서 어렵게 진행했다.
네비치와 뮬리치는 상대 약점을 꽉 잡고 적절히 타협하면서 지내왔다.
"네게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거야. 신의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 작가의말
뮬리치 : 계승권을 공고히 하겠다.
바칸 : 귀족 신분이랑 계승권 얻고 가문 재산도 얻겠다.
네비치 : 네이치를 곁에 두고 지킨다.
네이치 : 뮬리치 죽은 다음 대영주가 되겠다.
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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