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 발발
"보나르와 비나크가 싸운다고?"
바칸은 예상 밖의 전개에 짜증이 치밀었다.
"비나크 공작은?"
"아무 움직임도 없다."
정보부 관리의 대답에 바칸의 두통이 세졌다.
"전략부의 분석 결과는?"
"정보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추측이 사실에 근접하는지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다."
"최악의 상황은 무엇인가? 어느 정도는 대비해야겠다."
"비나크 공작이 바하를 차지하는 것이다."
왕실 지원을 받는 비나크 공작이 바하를 차지하면 아틀란티스의 강력한 경쟁자가 된다. 바칸이 지금 골드를 풀어 상단을 불러들이는 것처럼 비나크 공작도 골드와 쌓아둔 물건을 풀어 상단을 유혹할 수 있다.
양쪽 자금력이 비슷하다는 전제하에 바하의 압승이다. 바하는 위치가 너무 좋고 수십 년 동안 겔트 왕국의 교역 중심지로서 지위를 굳혀왔다.
'바하의 물길을 틀어막으면 다미앙을 돕기도 어려워져.'
다미앙은 헤크 지역에 대영지를 만들고 있다. 다양한 효과를 기대하고 시작한 일로, 대규모 농지를 조성해 아틀란티스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목적이 꽤 큰 부분을 차지했다.
방해받기 쉬운 일이어서 대부분 사람한테 비밀에 부쳤다.
"겔트 왕실은 제국 황태자랑 친한가?"
"그렇다. 황태자는 부르크 교단에 매우 적대적이다. 겔트 왕국 역시 게르크 교단과 사이가 좋지 않기에 둘이 친하다."
다른 신을 모시지만, 부르크와 게르크 두 교단은 사이가 좋다. 겔트 왕실이 게르크 교단을 함부로 갈아치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기도 하다.
공통의 적을 둔 겔트 왕실과 황태자는 같은 편이 되었다.
"이번 일은 겔트 왕실과 게르크 교단의 힘 싸움일 가능성이 크다. 수도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빨리 취합해라."
교단에 가장 힘이 되는 지역은 비나크와 헤크다. 특히 비나크는 강으로 수도까지 빠르게 갈 수 있다.
"제국 황실의 예언가는 잘 맞추는 편인가?"
바칸의 질문에 제국에서 온 관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얼개가 대충 맞아떨어지긴 하는데. 확실치 않으니 대책을 세우기 어렵구나."
바칸은 조금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보나르는 가뭄에 약하다."
보나르는 비나크와 마찬가지로 식량을 사들이는 지역이다.
"보나르는 양털과 양가죽을 팔아서 식량을 산다. 가뭄으로 식량이 귀해지면 큰 타격을 받는다."
비나크 지역은 산이 많아 면적보다 농지가 적고 길도 잘 닦이지 않았다. 베르크와 바하가 주도해서 길을 닦아야 하는데, 명분이 강한 베르크와 자금이 넉넉한 바하는 사이가 나쁘다.
"전쟁이 가뭄 전에 끝나지 않는다면, 보나르의 세 귀족은 망한다."
길이 안 좋은 비나크와 전쟁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말을 달릴 수 없고 수레도 물건을 많이 싣지 못한다. 전쟁 끝내고 돌아가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강을 통해 바하를 공격하면?"
"세 귀족이 바하를 점령한 다음 비나크 공작이 바하를 빼앗아 버리면 비나크 지역으로 간 군대는 퇴로를 잃는다. 식량 공급도 끊기고. 세 영주가 동시에 멍청이일 가능성은 없으니 바하를 먼저 공격하진 않는다."
셋은 보나르와 인접한 마을부터 하나하나 점령하며 북상해야 한다. 왕실이나 비나크 공작과 밀약이 있을 게 분명하지만, 대부분 계약은 어겼을 때 더 큰 이익을 보장한다.
"가뭄이 오면 세 영주는 급하게 돌아가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쟁이 흐지부지 끝날 수 있다. 비나크의 평민 영주들은 전쟁을 벌이느라고 약해질 것이고 보나르의 세 귀족 역시 마찬가지겠지. 왕실만 이득을 본다."
"공왕, 아까 공왕이 했던 말을 생각해라. 세 영주가 동시에 멍청이일 가능성은 없다."
"지금은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는 거니까. 우리에게 최악의 상황은 바하가 비나크 공작 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건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사정이 어떠하건, 바하가 우리 걸림돌이 안 되도록 대책을 세워라."
그때 경제부 장관이 입을 열었다.
"차라리 바하를 세 영주한테 주는 건 어떤가?"
경제부 장관을 맡은 자는 자신이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상대에게 뭘 줄지부터 고민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미처 떠올리지 못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지금까지 나온 말을 종합하면, 보나르의 세 귀족이 왕실과 밀약을 맺고 비나크 지역을 점령하는 협약을 맺었을 것이다. 왕실로선 적대적인 평민 영주를 제거하고 교단의 힘도 깎아 먹으며 보나르 지역이 교단과 확실한 적대 관계가 될 수 있는 훌륭한 결정이다."
확실히 왕실 입장에선 손도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다.
"교단은 왕실이 막아주기로 약속했을 것이다. 보나르의 세 귀족에겐 땅을 넓히고 세력을 강화할 절호의 기회다. 더구나 바하는 가죽 수출이 주력이어서 보나르와 경쟁 관계다. 바하의 가죽까지 보나르가 장악하면 가격을 높여 더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다."
보나르 지역이나 비나크 지역의 가죽 생산량은 아틀란티스의 목장이 어떻게 비벼볼 규모가 아니다. 삼각 무역이 제대로 활성화되어 마르카다와 블라우크의 물량까지 합치면 어떻게 좀 해볼 수 있다.
"왕실도 보나르도 꿍꿍이가 확실하구나."
바칸은 경제부 장관을 재상 후보자 1순위로 올렸다. 재상은 모든 관리를 아우르는 자리기에 급하게 정할 생각은 없다. 재능만 뛰어나다고 되는 게 아니라 정치 감각도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 명망이 쌓여야 한다.
"왕실은 보나르와 비나크를 싸움만 붙이면 된다는 생각일 것이다. 둘 사이가 나빠져서 왕실에 불리한 점은 없으니까. 그리고 내년에 가뭄이 온다는 걸 미리 알고 있다면 둘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는지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전쟁에 왕실이나 비나크 공작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지는 적다는 뜻이구나."
"보나르의 세 귀족이 멍청이가 아니니 당연히 뮬리치와 손잡을 것이다."
뮬리치가 병사를 조금만 움직여도 비나크의 평민 영주들은 둘로 갈라질 수밖에 없다. 한 무리는 뮬리치를 경계해야 하고 한 무리는 보나르의 세 귀족을 막아야 한다.
"보나르의 세 귀족은 천천히 마을을 점령하며 눈치를 볼 것으로 예상한다. 가뭄을 모른다면 왕실의 제안은 이해가 힘든 부분이 있으니까."
"그게 어떤 부분이지?"
"세 귀족이 바하를 우선 점령하는 건 비나크 공작 때문에 어려운 일이다. 바하를 먼저 점령할 경우 평민 영주와 비나크 공작의 공격을 동시에 방어해야 하니까. 그러나 비나크 지역을 대부분 차지한 다음 바하를 점령하면 왕실은 비나크 지역을 통째로 잃는 셈이다."
비나크 지역을 점령한 다음 바하를 차지하면 왕실은 비나크 지역의 4/5 정도를 잃는다. 바하 서쪽에 있는 지역 중 비나크 마을과 가까운 곳들에만 지배력을 발휘할 수 있다.
"저간의 사정이 어떠하든, 우리는 보나르의 세 귀족을 설득해서 바하를 점령하게 하면 되겠구나. 그런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렇게 되면 양쪽의 협공으로 세 귀족은 어려움에 처한다."
"그건 세 귀족이 비나크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려는 욕심을 부렸을 때다. 바하'만' 점령하면 문제 될 것 없다."
"그걸 제어할 수 있을까? 저들이 바하를 점령한 다음 욕심을 부리다가 비나크 공작에게 틈을 주면 최악의 상황이 된다."
"확실한 굴레를 씌우면 된다. 우리 공국은 돈이 넘쳐나니까."
경제부 장관답게 돈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보나르의 양털과 가죽을 우리가 사들이면 된다. 대금은 금화로 할지 식량으로 할지 보나르 측에서 정하게 하고. 해마다 최소 얼만큼의 물량을 사들인다는 걸 계약서에 명시하면 된다."
###
"공왕, 이건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
바칸은 경제부 장관과 가드 그리고 자이르까지 넷이서 아틀란티스를 떠났다. 경제부 장관은 당연히 싸울 줄 모르고 가드는 열두 살에 자이르는 열 살이다.
그리고 지금은 바하의 한 저택에서 태평스럽게 쉬면서 보나르로 가는 배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편지를 보냈으니 톰슨과 존이 보나르에서 합류할 것이다. 그리고 위험할 일이 뭐 있겠는가. 이번 내전은 우리랑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그래도 비나크 공작이나 바하 영주한테 발각되면 너무 위험하다."
"복수는 해줄 것이다."
바칸의 농담에 경제부 장관은 이마를 짚으며 하늘을 쳐다봤다. 제국에 환멸을 느끼고 조용히 살려다가 친구의 편지를 받고 호기심에 아틀란티스를 찾았다.
그리고 바칸이라는 흥미로운 사람을 알게 되었다.
'이상한 사람이다.'
어떤 분야의 화제든 잘 끼어든다. 일부 분야는 전문가 수준으로 자세히 안다. 형세를 뚫어보는 날카로운 시각도 있다.
그런데 사람 다루는 건 미숙하다. 제국 귀족은 물론이고 황제도 사람 쓸 때 늘 의심하고 경계한다. 그리고 그걸 일부러 티 낸다.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허튼수작을 부리지 말라는 경고다. 그런데 바칸은 과할 정도로 믿음을 줬다.
'분석은 잘하는데 대책 세우는 건 미숙한 면이 있고.'
바칸이 보여준 통찰력이라면 자신이 생각한 대책을 쉽게 떠올려야 한다.
'일부러 말 안 하고 우리 능력을 떠보는 건가?'
"공왕,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자이르가 주먹을 내지르며 질문했다. 바칸은 고개를 저으며 자세를 교정해줬다.
"손목이 버티는 건 마지막 순간이야. 목표에 적중하기 전까진 상대가 어딜 공격할지 모르게 느슨해야 해."
영주성 집사에 13살짜리 아이를 임명했고 호위랍시고 10살에서 12살 사이 아이 일곱을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엔 갭릴이라는 아이는 통계나 분석 면에서 천재적인 감각을 보여줬다.
'호위라는 아이들도 특별한 구석이 있겠지?'
그때 다미앙의 친구 중 하나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배 시간이다. 지금 출발해야 한다."
넷은 마차에 타고 부두까지 갔다. 손님 서른 명 정도 태운 배는 물길을 따라 비나크 마을 쪽으로 가다가 중간에 조금은 작은 강으로 빠졌다.
여름이 되면 눈이나 얼음 녹은 물이 대량으로 유입되며 큰 배도 다닐 수 있게 수량이 많아진다. 그러나 겨울인 지금은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양측의 강바닥이 꽤 드러났다.
"대장, 영지 곁에 있는 호수 말이야. 어째서 물이 안 줄어드는 거지?"
자이르가 바칸에게 질문했다. 경제부 장관 투치도 무척이나 궁금했다. 영지에서 그렇게 물을 뽑아다 쓰는데도 호수는 큰 변화가 없었다.
"상자에 자갈을 꽉 채워. 그럼 자갈이 더 들어갈 틈이 없겠지?"
자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갈이 안 들어가는 상자에 모래를 부으면 어찌 될까?"
"모래가 자갈 틈으로 들어가겠지."
"그래. 모래도 꽉 채워. 그럼 이젠 더 들어갈 틈이 없겠지?"
"그럼. 모래보다 작은 건 없어."
"거기에 물을 부으면?"
자이르는 입을 딱 벌렸다. 자갈이랑 모래 얘기하다가 갑자기 왜 물이 튀어나왔냐는 표정이었다.
"바위산도 마찬가지야. 눈이 오고 비가 오면 그게 바위 속으로 스며들어. 그리고 천천히 가라앉겠지. 그 물이 고여서 생긴 게 호수야."
"그래서 가까운 산 놔두고 먼 산을 깎은 거구나."
자이르가 감탄했다. 왜 가까운 바위산 놔두고 먼 곳의 바위산을 깎아버리나 했는데, 가까운 바위산은 호수에 물을 주는 역할이었다. 바위산을 깎으면 그만큼 호수가 줄어든다.
'제국에서도 저런 거 가르치는 덴 없는데. 설마 마법사 세력인가?'
수십 년 전에 마법사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원래부터 세상과 거리를 둬서 종적을 감춰도 티 나지 않았다.
그러나 제국이나 교단은 마법사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지 무척이나 경계했다.
- 작가의말
이번 편은 유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야 이해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주제를 다뤘습니다. 이해가 어려운 분은 유치원 때 학업을 멀리하고 딱지치기에 정신이 팔렸던 게 아닌지 뉘우치세요.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