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티스
바칸과 올리바아를 실은 배가 아틀란티스 항구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자 수많은 영지민이 환호로 맞이했다.
제국에선 황족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항상 사람을 치웠다. 올리비아로선 이렇게 많은 평민을 한꺼번에 본 건 처음이다.
규정된 색과 양식을 지키는 제국민과 달리 영지민들은 알록달록 개성이 강한 옷을 입었다. 그리고 국왕을 보았는데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다.
'신기해.'
그때 여덟 살 남짓한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가드를 비롯한 호위들은 아이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꽃이야. 우리가 직접 땄어."
아이들이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을 마구잡이로 섞어서 내밀었다. 미클에게 꽃을 주는 아이가 가장 많았고 존이 두 번째로 인기가 많았다.
드레이크가 3위이고 본드가 4위였다. 바칸은 올리비아에게 밀려 6위를 차지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구나.'
누가 시켰다면 당연히 국왕인 바칸과 왕비인 올리비아에게 줘야 한다. 그리고 작은 꽃을 조잡하게 섞는 대신 크고 아름답고 기품이 넘치는 꽃으로 준비했을 것이다.
올리비아는 아이가 건네는 꽃을 받아 향기를 맡았다. 제국에서 품종 개량을 거듭해 향이 진한 꽃과 달리 풀 내음이 더 강했다. 그런데 싱그러운 풀 내음이 향긋한 꽃 냄새보다 훨씬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저녁에 분수 광장에서 축제를 연다. 일손에 여유 있는 사람은 오후부터 축제 준비를 도와라."
바칸의 말에 아이고 어른이고 모두 환호했다.
조금 지나서 말 여덟 필이 끄는 마차가 도착했다. 마차에는 유리 창문이 두 개나 있어 밖이 다 보였다.
"이대로 떠나요?"
마차에 올라 바로 떠나자 올리비아는 당황했다. 책에서 본 바로는 영지민들에게 연설도 해야 하고 중요한 사람들과 인사도 나눠야 한다.
"구경하고 싶은 겁니까? 그럼 중간중간 내려서 둘러보시죠."
바칸의 오해가 싫지는 않았다. 올리비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마차가 어서 멈추기를 기다렸다.
"잡시장입니다. 주로 영지민이 이용하는 곳이죠."
국왕이 나타났는데도 사람들은 손을 흔들기만 했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무례한 평민들의 태도보다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에 정신이 팔렸다.
황궁이라면 없는 게 없을 것 같지만, 엄선한 물건만 황궁에 들인다. 품위가 부족한 물건은 아무리 비싸고 귀해도 황실 창고로 들어갈 수 없다.
사고 싶은 물건이 많았지만, 올리비아는 꾹 참았다.
"조금 더 걸어도 괜찮겠습니까? 돌아가서 마차 타는 것보단 걸어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요."
"네. 그러시죠."
올리비아는 바칸을 따라 두 번째 시장으로 갔다.
"여긴 상인이 주로 이용합니다. 물건을 대량으로 사고파는 곳이죠."
가판대는 작았고 내놓은 물건도 몇 없었다. 대신 가판대 뒤에는 꽤 큰 창고가 예외 없이 하나씩 있었다. 물건은 주로 가죽으로 만든 옷이나 모자와 신발 그리고 가방 등이 있었다.
"다음 시장은 마차를 타고 구경해도 됩니다."
시장이라고 부르기엔 집도 호화롭고 바닥도 전부 돌로 깔았다. 정복을 입은 병사들이 가게를 지켰고 밖에 나와서 하는 호객 행위도 없었다.
"저기가 영지 장인들이 만든 장신구를 파는 곳입니다. 잠깐 구경하실래요?"
"네."
시장 중심에 위치한 가장 큰 건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건물 안에 또 건물이 있었다.
"장신구 하나당 집 하나 배정합니다."
바칸의 이끌림에 따라가니 목걸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무지개 목걸이입니다. 정면으로 빛을 받으면 저렇게 무지개가 생깁니다."
일곱 가지 색의 재료를 교묘하게 배정한 목걸이는 정면으로 오는 빛을 받아 무지개를 여럿 피웠다.
"드워프 솜씨 아닌가요?"
"미클의 솜씨입니다. 해적섬과 야만족 거주지 그리고 브릭섬과 얼음섬에서 얻은 진귀한 재료들로 만들었죠."
"드워프보다 뛰어난 거 같아요."
바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달리 올리비아의 말을 부정했다.
"드워프들이 동대륙으로 이주하면서 그렇게 됐습니다. 서대륙에 남은 드워프는 소규모 부족이 대부분이어서 창작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저 예전부터 만들던 걸 똑같이 만들 뿐이거든요."
구경을 마치고 그대로 나가자 올리비아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장신구는 아니어도 무지개 목걸이는 정말로 탐이 났다.
"사실 여기 전시한 장신구는 겨우 일등급입니다. 특급 장신구는 영주성에 있습니다. 보석 왕관과 색상도 다 맞춰놨습니다."
"그랬군요."
얼굴이 빨개진 올리비아는 발끝만 보며 걸었다. 마차는 영주성이 아닌 분수 광장으로 향했다.
"여긴 도서관입니다. 책을 계속 사들이고 왕국 소속 학자들도 자기 작품을 쓰고 있습니다. 십 년 정도면 저 도서관이 꽉 차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저기 올라가서 말하면 이 커다란 분수 광장 구석구석 목소리가 전해집니다. 축제 때 보시죠. 그리고 바위 조각상이 있는 곳은 전부 분수입니다."
분수 광장을 거쳐 남부 거주 지역을 관통해 목장에 도착했다.
"저긴 제국 품종의 소를 키우는 목장입니다. 아마 5년 정도면 10만 마리 규모의 대목장이 될 겁니다."
"여긴 양을 키우는 목장입니다. 품종을 개량하는 중인데 몇 세대만 지나면 털이 길고 젖이 많이 나오는 품종이 주를 차지할 겁니다."
얼굴이 동그란 양을 본 올리비아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소리가 나가는 걸 겨우 참아낼 정도로 귀여웠다.
"여긴 말과 쥐 그리고 슬라임을 키우는 목장입니다."
올리비아는 바칸의 부축을 받아 사다리를 타고 5미터 높이의 목책에 올라갔다. 수천 필의 말이 즐겁게 뛰놀고 있었다.
"저긴 제국에서 공왕 책봉 때 하사한 가륵말입니다. 저건 처음부터 영지에서 살던 야생마인데 힘이 세고 식탐이 강한 게 특징입니다. 저긴 제국에서 길들은 전투마 품종입니다. 저쪽은 야만족 중 롱가바르가 키우는 말인데 힘이 약하고 덩치가 작아도 지구력은 으뜸입니다. 그리고 저건 브릭섬에서 나는 말인데 충성심이 강해 평생 한 명의 주인만 태웁니다."
대나무 숲을 끝으로 마차는 영주성으로 향했다. 황궁처럼 장대하진 않지만, 구조가 합리적이고 미관도 무척 뛰어난 건물들이 올리비아를 반겼다.
"드워프가 짠 양탄자입니다. 더 다양한 지식을 알아내고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서 드워프들이 가끔 다른 분야에 도전합니다."
'도전하는 드워프라니. 제국 학자들이 들었으면 입에 거품을 물겠어.'
올리비아가 본 책에서 드워프는 고루하고 전통만 고집하는 종족이었다.
"며칠 쉬고 여행을 떠날 겁니다. 괜찮겠지요?"
"물론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때 강부리가 핀핀과 슴슴을 데리고 뒤뚱뒤뚱 달려왔다. 황급히 바칸 등 뒤에 숨었던 올리비아는 톰슨과 바칸 그리고 호위들 몸에 머리를 비비며 순하게 구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냈다.
"괜찮다. 우리 앤 안 물어."
톰슨의 말에 올리비아는 과감히 흰머리수리의 부리부터 만졌다.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에 손을 움츠리는 올리비아에게 강부리가 접근했다.
"깍!"
강부리가 머리를 옆구리에 대고 비비자 올리비아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기절한 유모 때문에 하녀들도 발을 구르며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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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같아요."
바칸과 올리비아는 배를 타고 아틀란티스를 떠났다. 드레이크 등은 남았고 갭릴과 호위들만 따라나섰다.
바칸과 올리비아는 팔짱을 끼고 고기를 손질하는 가드를 지켜봤다. 슴슴이가 잡아 온 고기는 뼈가 굵었다.
대부분 슴새는 덩치가 작아 작은 고기를 먹는다. 그런 고기의 뼈는 가늘어서 통째로 삼켜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슴슴이는 덩치에 어울리게 큰 고기도 먹는다. 가끔 너무 큰 고기를 잡으면 뼈를 발라줘야 한다.
"축제가 가장 재밌었어요."
분수가 엇갈아 터졌고 분수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이 빛줄기를 쏘아내서 흥을 돋웠다. 노래 잘하는 영지민들이 특별히 분수 광장 중앙의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율족 덕분에 동대륙 노래도 많이 전해졌고 동대륙과 서대륙의 노래를 합치려는 시도도 있었다. 덕분에 황궁에선 전혀 들어보지 못한 특이한 노래가 많았다.
가장 재밌던 건 춤이었다. 온갖 괴이하고 재밌는 춤이 난무했다. 박수와 갈채를 많이 받은 사람에겐 바칸이 1골드씩 포상금을 내렸기에 영지민들은 평소보다 훨씬 열정적으로 춤췄다.
"축구 시합은요?"
"저한테는 안 맞았어요. 심하게 부딪칠 때마다 눈을 감느라고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요."
"그래서 배구라는 종목을 새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물을 쳐서 몸싸움 없이 기술만 겨루는 식으로요. 아마 이번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볼 수 있을 겁니다."
"몸싸움이 없다면 저도 해보고 싶어요."
심약한 유모는 영주성에 남고 젊고 겁 없는 하녀들만 따라왔다. 덕분에 올리비아도 눈치를 덜 보게 되었다. 여전히 품위를 지키려고 애쓰지만, 전처럼 하고 싶은 말을 참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번 목적지는 마르카다입니다. 혹시 들어본 적 있습니까?"
"예전에 인구 30만의 대도시였다고 들었습니다. 제국에서도 있은 적 없는 수준이라고 했어요."
"야만족의 1/5 정도가 그 도시를 통해 제국과 교역했으니깐요. 그땐 제국에 식량이 넘쳐나던 시절이어서 교역이 활발했습니다."
"우리 왕국은 식량이 부족하지 않아요? 겔트 지역이 제국에까지 들릴 정도로 유명한 곡창이라고는 하지만, 플란코와 페코 그리고 지르까지 품으려면 부족할 텐데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맞을까요?"
"헤크 지역을 안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헤크와 보나르는 야만족과 남쪽에 있는 왕국을 막는 역할입니다. 그리고 왕국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갈 곳이고요. 따로 내버려 두는 게 훨씬 이득입니다."
보나르의 세 여우는 현명한 편이다. 그러나 야심 역시 작지 않다. 바칸과 어떻게 해볼 생각은 전혀 없더라도 인재를 모아 힘을 기르는 걸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왕국에 불만을 품은 자들은 보나르의 세 여우한테 몰릴 가능성이 크다.
"그럼 어떻게 할 작정이신가요?"
"달고 가루가 나는 음식 생각납니까?"
"네. 그렇게 단 음식은 몇 번 먹어보지 못했어요."
"남대륙에 나는 카쿠라는 작물입니다. 품종 개량을 거쳐 우리 영지 남쪽에서만 경작할 수 있습니다. 7월과 8월에 한 번씩 심는 건데 같은 면적의 밀보다 30배가량 수확량이 많습니다."
올리비아는 품위 유지도 잊고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한 번만 심는 밀과 달리 두 번이나 심는다니 수확량이 60배인 셈이다.
"플란코와 페코 그리고 지르까지 통합한 후 부르크 제국에 선전포고할 겁니다."
"네?"
"그때가 되면 드레이크는 바다에서 부르크를 저격할 것이고 나는 겔트로 가서 부르크의 침입을 대비할 것입니다. 아틀란티스 영지와 브릭섬 그리고 마르카다와 블라우크는 왕비가 맡아줘야 합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일 년에 한 번씩 얼굴을 비춰줘야 합니다. 큰 문제가 터지면 직접 방문해서 해결해야 하고요. 투치와 갭릴이 도울 것이니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잘 할 수 있어요."
올리비아는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가드가 손질한 물고기에 머리를 처박고 열심히 살을 뜯던 슴슴이가 화들짝 놀라 날개를 퍼덕거렸다.
"진짜예요. 황실에 나만큼 책 많이 읽은 사람도 없어요."
올리비아가 빨개진 얼굴로 소리를 낮춰 말했다. 바칸은 그런 올리비아를 포근하게 안아줬다.
- 작가의말
로맨스 도전은 성공리에 마무리된 것 같습니다. 당분간 로맨스는 멀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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