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 수련법
날이 밝자마자 눈을 뜬 일행은 산꼭대기로 향했다. 다시 숲으로 돌아가면 보나비치가 떡하니 기다릴 것 같아서 선택 여지가 없었다.
산을 오르는 일행은 말이 없었다. 두 드워프는 원래 먼저 말하는 일이 드물었고 존은 마나를 폭주한 후 보나비치가 보여준 무시무시한 모습에 주눅이 들었다. 지금까지 싸우면서 막막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 없었는데 어제 보나비치를 상대하며 처음 기가 죽었다.
톰슨은 고민에 잠겼다. 지금까지는 바칸이 알아서 해주려니 하고 본인 능력을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바칸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어제 보나비치를 상대하면서 겨우 깨달았다.
본인 능력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활용해야 일행에게 도움이 될지 거듭 생각했다.
바칸 역시 풀이 죽었다. 어제 일을 겪고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절실하게 느꼈다.
비나크의 공작은 왕실 지원을 받아 가며 전문 병사 1천을 거느린다. 그 정도로도 비나크 지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바칸은 마을을 만들어 규모를 키운 다음 수백 명 정도 군대를 보유할 생각이었다. 비나크 공작이 조금만 삐끗하면 치고 들어가 비나크 지역을 먹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어.'
간단하다고 여긴 적은 없지만,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보나비치라는 변수를 확인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보나비치가 어제 보여준 실력이면 혼자 힘으로 전세를 뒤집을 정도다. 마나를 폭주한 사실을 알았다면 보나비치를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을 테지만, 바칸 역시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평소 실력으로 오해했다.
"호수다."
산꼭대기에 오르니 호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일행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동북쪽에서 5km 정도 거리였고 꽤 컸다.
"저기 강도 있어."
동쪽으로 20km 정도로 가늠되는 거리에 강이 흘렀다. 먼 거리에서도 잘 보이는 걸 보니 무척이나 큰 강 같았다.
"저기 말 맞지? 말 같은데?"
동쪽에 작은 평야가 있었다. 그리고 평야 남쪽은 울창한 숲이었다. 평야에서 숲과 가까운 쪽에 말로 추정하는 동물이 뛰어다녔다.
"저기 작은 산도 있어."
일행이 있는 산 아래에 높이가 약 200m에서 300m 사이로 추정하는 작은 산도 보였다. 산과 멀지 않은 곳에 숲이 하나 있었다. 주변이 황량하여 숲이 좀 더 도드라져 보였다.
"흰머리수리는 저기 살겠지?"
일행이 있는 산 서북쪽에 가파른 봉우리 하나 있었다. 경사가 심해 원숭이나 산양 아니면 올라가기 힘들 것 같은 바위 봉우리였다.
"호수도 있고 강도 있고 숲도 있는데 왜 사람이 안 살지?"
"흰머리수리 때문이 아닐까?"
"아니야. 흰머리수리는 사람 함부로 공격하지 않아. 지금은 알을 낳았거나 새끼가 태어나서 예민한 거야. 그리고 말이 뛰어다니는 걸 보면 저기까지 신경 안 쓰는 거 같아."
"호수부터 해서 빙 둘러보자."
산을 빠르게 내린 일행이 가장 먼저 만난 건 작은 바위산이었다. 높이는 예상보다 낮은 160m 정도였다. 경사가 완만한 바위산은 높이보다 꽤 넓은 면적을 차지했다.
그리고 산 가까이 있는 숲은 커다란 대나무가 가득했다. 대부분 지름이 1m 넘었고 키도 20m가 작은 편이었다.
일행은 반쯤 달리다시피 하여 호수에 도착했다.
"제길. 이게 왜 바다냐고!"
멀리서 호수라고 오해했는데 정작 도착해보니 바다였다. 어떻게 이런 지형이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바다가 침습해 들어온 거였다.
"낙심하긴 일러. 강이 있잖아."
"예감이 안 좋아. 강변이 너무 깨끗해."
강물은 딱 봐도 마셔서는 안 될 것 같은 시뻘건 색이었다. 강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용도 중 하나인 식수 제공은 이미 가망이 없다.
"바칸. 철광석이다. 순도가 높아."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링이 돌멩이 하나 들고 말했다.
"여기 다 철광석이야?"
"절반 이상이 철광석이야. 철 외에 다른 금속이 별로 안 섞여서 제련하기 아주 편해."
링은 황홀한 표정으로 철광석을 만졌다. 락은 오크 부락이었던 마을에 영주성 지을 때 원 없이 바위를 만졌다. 그러나 링은 지금까지 금속 장신구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 일하는 걸 즐거움으로 아는 드워프로선 정말 큰 고통이었다.
호수와 강에 실망한 일행은 숲을 살폈다. 숲이 꽤 울창하고 땅도 비옥해 보였다. 그러나 식수로 쓸만한 냇물이나 샘은 보이지 않았다.
"날도 저물었으니 일단 쉬자. 내일은 숲을 깊게 들어가 보자."
하루 내내 실망의 연속이어서 정신적으로 많이 피로했다. 배를 대충 채운 일행은 모닥불로 덥힌 땅에 누워 빠르게 잠들었다.
톰슨은 몸을 흠칫 떨며 잠에서 깼다. 뭔가 묵직한 것이 가슴을 꾹 누르는 느낌이었다.
'대장, 누가 접근해. 들려?'
그때 바칸이 손을 슬그머니 내밀어 검지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톰슨은 정신을 집중해 바칸 마음을 읽었다.
'존은 깨우지 말라고?'
검지가 또 바닥을 두드렸다.
'우리 둘이 하자고? 어떻게?'
바칸의 마음을 읽은 톰슨은 아주 은밀하게 가죽 장갑을 착용했다. 갑옷 상의와 신발은 고래 가죽으로 만든 좋은 거로 바꿨지만, 바지와 장갑은 여전히 도적 우두머리 톰슨이 쓰던 물건이었다.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는 기운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두 드워프는 여전히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이미 알아채고 기습을 준비한 바칸과 톰슨에겐 오히려 다행인 일이었다.
"존!"
바칸이 소리를 지르며 몸을 높이 날렸다. 누운 자세에서 나올 수 있는 점프력이 아니었다. 브레이크 메탈로 바닥을 두드리며 반탄력을 얻었기에 가능했다.
절묘한 타이밍과 예상을 벗어난 점프력 때문에 상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바칸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제발. 우리 목숨이 전부 달렸다.'
브레이크 커널. 기운이 강하게 모인 요해를 파괴하는 기술이라고 바칸은 알고 있었다. 요해 위치는 배꼽 근처다. 펼치는 데 딱히 어려움은 없으나 다른 기술에 비해 효과가 미미했다.
'마나 익힌 놈에겐 먹히는 기술이길.'
어차피 상대가 보나비치라면 어정쩡한 대응으론 죽는 길밖에 없다. 바칸은 모든 가능성을 브레이크 커널에 걸었다.
브레이크 메탈과 섞은 브레이크 커널이 갑옷을 어느 정도 무시하고 상대 명치 근처의 '요해'를 두드렸다. 바칸은 성공 여부도 살피지 않고 브레이크 하트를 펼쳤다. 주먹이 상대 심장에 닿는 동시에 차가운 칼날이 바칸 다리를 손가락 한 마디 깊이로 베었다.
'같이 죽자.'
바칸은 모든 걸 공격에 쏟아부었다. 브레이크 브레스로 상대 횡격막을 연거푸 때렸다. 그때 톰슨이 싸움에 끼어들었다.
톰슨은 장갑 낀 손으로 빨간 숯을 집어 들고 보나비치 얼굴에 문질렀다.
"끄아악."
보나비치가 제국검을 버리고 몸을 돌려 도망쳤다. 바칸의 부름을 듣고 잠에서 깼으나 겨우 상황을 파악한 존이 링의 손에서 철광석을 빼앗았다.
"다리 맞춰. 머리에 투구 있어."
턱, 뺨, 코 모두 보호한 투구지만, 눈과 입 부위는 보호하지 않았다. 브레이크 커널에 당해 마나가 움직이지 않았고 브레이크 하트와 브레이크 브레스 때문에 반응이 느려진 보나비치는 숯에 눈과 입 모두 큰 화상을 입었다.
존이 던진 철광석이 정확히 보나비치의 왼쪽 발목을 맞췄다. 원래부터 비틀비틀 똑바로 뛰지 못했는데 왼쪽 발목이 다치자 속도가 더 느려졌다.
바칸은 보나비치가 떨군 제국검을 들고 뒤를 쫓았다. 존과 톰슨 역시 돌멩이 하나씩 들고 바칸을 바싹 따랐다.
바칸이 제국검을 휘두르자 보나비치가 선 자리에서 풀쩍 뛰었다. 바칸은 휘두른 검을 억지로 멈추지 않고 몸도 함께 한 바퀴 돌렸다. 몸의 회전까지 실린 두 번째 베기는 훨씬 부드럽고 기척도 작았다.
"벴다."
흥분한 나머지 바칸은 큰소리로 외쳤다. 첫 공격은 소리만 듣고 피한 보나비치건만, 두 번째 공격은 늦게 알아채고 장딴지를 검에 베이었다.
"나다."
존이 돌멩이를 잡은 손으로 보나비치 머리를 때렸다. 투구 덕분에 타격은 주지 못했다. 보나비치는 도망치는 게 어렵다는 걸 깨달았는지 몸을 돌려 싸우려 했다.
바칸은 지체하지 않고 검으로 보나비치 얼굴을 찔렀다. 보나비치는 피하는 것보다 두 팔을 얼굴 앞에 교차하여 막는 것을 선택했다.
그때, 존이 보나비치 뒤로 돌아가서 겨드랑이로 손을 넣었다. 그대로 보나비치를 번쩍 들어 올린 후 뒤로 누워 땅에 꽂아버렸다.
바칸은 바닥에 쓰러진 보나비치에게 다가가서 제국검으로 다리를 마구 찔렀다. 보나비치는 여러 타격이 누적하여 반항 능력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난도질당했다.
"제기랄, 깔끔하게 죽여라."
보나비치가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 바칸은 영웅서사시의 용사처럼 긴 대사를 뽑지 않고 그냥 보나비치 얼굴에 검을 꽂아버렸다. 보나비치가 짧은 경련을 끝으로 숨을 멈췄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바칸이 몸을 덜덜 떨었다. 집중하여 모든 걸 쏟은 바람에 경련이 멈추지 않았다. 그건 톰슨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칸처럼 쓰러지진 않았으나, 다리를 부들부들 심하게 떨었다.
뒤늦게 달려온 두 드워프는 바칸과 톰슨을 업고 모닥불 곁으로 돌아갔다. 존 역시 보나비치의 시체와 검을 들고 모닥불 근처로 갔다.
"갑옷 벗기고 쓸만한 거 챙긴 다음 강물에 던져."
바칸은 모닥불의 온기에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톰슨 역시 바칸 영향을 받아 마음이 든든해지며 떨림을 멈췄다.
존은 보나비치의 투구를 벗기고 팔에 찬 완갑 등도 벗겼다.
"대장,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옆구리 쪽 보면 손이 닿을만한 곳에 매듭이 있을 거야. 매듭을 풀고 가죽끈을 느슨하게 하면 벗길 수 있어."
존은 바칸 말대로 매듭을 찾아 푼 다음 끈을 느슨하게 했다. 갑옷을 벗긴 다음 품과 소매를 뒤져 돈 따위를 챙겼다.
옷은 피에 너무 젖었고 바지는 바칸의 검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좋아 보이는 신발만 챙기고 남은 건 버리기로 했다.
"이 새낀 우리랑 뭔 원수라고 여기까지 쫓아왔을까?"
숯에 타고 검에 찔려 엉망이 된 보나비치 얼굴을 보며 톰슨이 구시렁댔다.
"자작이 돈 많이 준다고 했겠지."
존이 톰슨의 말에 대답하며 보나비치 시체를 질질 끌고 갔다.
"잠도 안 오는데 갑옷이나 닦아야겠다."
톰슨은 모닥불에서 재를 긁어모아 물에 풀어 갑옷에 묻은 피를 닦았다. 바칸은 바닥에 편하게 누워 세븐 브레이크의 기술을 고민했다.
브레이크 커널을 성공한 후 각 기술의 타격 수법이 왜 다르고 어떻게 다른지 조금 감을 잡았다.
'그러니까 깊이가 달라. 타격의 깊이가.'
브레이크 하트든 브레이크 브레스든 브레이크 센스든 다 타격을 일정 깊이까지 전달한다. 지금까지는 그저 힘껏 때리는 게 최선인 줄 알았는데, 상대에 따라 깊이를 달리해야 한다.
좀 더 깊이 생각하려는데 톰슨이 방해했다.
"대장, 갑옷 안에 글씨 있어. 아냐, 그림 같아."
바칸은 머리를 치는 생각에 몸을 벌떡 일으켜서 톰슨의 손에서 갑옷을 빼앗다시피 당겼다. 가죽끈을 아예 풀어버린 다음 갑옷을 앞뒤로 분리해서 모닥불에 비췄다.
"야, 장작 더 주워 와. 이거 마나 수련법 같은데?"
톰슨이 미처 바칸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존이 숲으로 달려갔다. 톰슨이 이해를 마치고 숲으로 향할 때 존이 벌써 장작 두 묶음을 양팔에 끼고 나는 듯이 달려왔다.
- 작가의말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제국 기사 죽이고 제국 검술 교본 얻는 그런 뻔한 전개는 절대 없습니다. 저 그런 뻔한 전개로 분량 우려먹을 뻔뻔한 사람 못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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