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76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76
“아까 그랬잖아? 원흉은 현령과 태양장이라고. 그럼 일단 현령부터 만나봐야지.”
“아..안 됩니다. 그러다간 우리 모두 죽습니다.”
천기주는 현령이란 말에 벌벌 떤다.
“니가 보기에 내가 쉽게 죽을 놈으로 보이냐?”
“그..그건 아니지만...”
“그럼 안내해라. 니 혼자 죽게 하진 않을 테니까.”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천기주가 머뭇거리자 제중이 나선다. 그는 벌써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주...중아! 안 된다.”
“괜찮습니다. 전 죽더라도 문희 누님을 봐야겠습니다.”
“에이, 씨발! 그래. 까짓것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냐? 가자!”
천기주는 씩씩거리며 걸어간다. 그걸 지켜보는 일초와 형제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현청.
이곳은 운정의 최고 권력 기관인 현청이다. 오후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수십 대의 마차가 한꺼번에 현청으로 들어왔고, 다른 하나는 현령이 화가 많이 났기 때문이다.
마차가 몰려든 것은 가끔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걸 전담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현령이 화를 내면 현청 전체가 들썩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극도로 긴장한다.
“대체 대인이 왜 화가 난 거야?”
“이 사람아, 하루 이틀 생긴 일도 아닌데 뭘 신경 쓰나?”
“하기야 우린 현령이 들락거리지만 않으면 상관이 없지.”
“자네들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우리야 막 교대했으니까 모르지.”
지금 현청 입구에선 네 명의 병사가 근무를 서고 있다. 그들은 교대를 할 때마다 중요사항을 인수인계한다. 지금이 그 시간이다.
“뭔데? 누가 현령의 비위를 건드린 거야?”
“당연히 여자겠지?”
“자네 다리 밑에 자릴 깔아야겠다. 어떻게 알았어?”
“현령이 화를 내는 건 거의 대부분 두 가지 때문이야.”
“두 가지?”
“그래. 하나는 실적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 때문이지.”
“근데 왜 실적이 아니라 여자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자네 방금 들어간 마차의 마부들 표정 봤지?”
“당연히 봤지.”
“근데도 못 느꼈어?”
“뭘?”
“이 사람아, 마부들 표정이 모두 밝았잖아?”
“그랬지. 근데 그게 왜... 아! 실적이 안 좋으면 표정이 밝을 수 없단 거군.”
“그렇지.”
“좋아. 그럼 여자 때문이라고 치자. 그게 어쨌다는 거야?”
“현령이 젊고 예쁜 것들이라고 하면 환장을 하잖아?”
“그건 다들 아는 얘기고, 이번에는 결혼식장에 있는 계집을 끌고 왔어.”
“에잉? 아예 납치를 했단 거야?”
“그렇지.”
“대체 얼마나 예쁘기에 결혼할 여자를 끌고 왔어?”
“나도 보진 못했는데, 소문에 의하면 대부인보다 훨씬 더 예쁘데.”
“그 정도야?”
“대부인도 한 때는 북경제일미란 소릴 들었다던데, 그래서 어떻게 됐어?”
“납치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계집이 자결을 시도했어.”
“뭐? 자결?”
“잘 하면 평생 호강할 수 있는데?”
“그러게. 우리 현령님은 절대 이런 시골에서 오랫동안 계실 분이 아닌데 말이야.”
“이놈들아, 그럼 니들 마누라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냐?”
“그건 안 되지. 암, 절대 안 되고말고.”
“지랄한다. 까불지 말고 경비나 잘 서. 오늘은 물건들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위에서 특별 지시가 내려왔다.”
“씨발! 많이 들어오면 뭐해? 우리한테는 떡고물도 안 떨어지는데.”
“호야! 너 그렇게 입을 함부로 놀리다간 골로 가는 수가 있다. 주둥이 조심해라.”
“미..미안해. 조심할 게.”
“근데 요즘은 해가 왜 이렇게 일찍 떨어지는 거야? 저게 뭐지? 여기로 오는 사람들인가?”
병사 중 한 명이 전방을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그러네. 여러 명이 한 명을 끌고 오고 있어.”
“끌려오는 사람의 체형은 낯이 익은데.”
“그러게 말이야. 총관님 같기도 하고...”
“같은 게 아니라 총관님이다!”
삼천마는 이곳 현청의 제2인자인 총관이다.
“이 새끼들이 미쳤나? 총관님이 어떤 분인데... 허억! 저..정말이다.”
“마..말도 안 돼!”
병사들은 놀란 나머지 옆으로 물러난다. 그래서 일초 일행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간다.
“근무 똑바로 서라. 농땡이 치다 걸리는 놈은 이 새끼처럼 된다.”
“허억!”
삼천마를 끌고 가는 태운의 말에 병사들은 움찔거린다. 그들은 누구보다 삼천마의 실력을 잘 안다. 그런 그가 개목걸이에 걸려 끌려오는 모습을 보고 놀라는 건 당연하다.
“마..막아야 하지 않을까?”
“그럼 니가 해보든가.”
“그..그건 아니지만... 현령어른이 아시면 우린 죽음이다.”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
“그건 맞다. 근데 운정제일고수를 개 잡듯이 끌고 가는 저놈들이 누구지?”
“자..잠깐! 저기 맨 뒤에 따라가는 놈은 일문회의 회주가 맞지?”
“맨 뒤에? 그래. 맞아. 그 앞엔 금혼회의 행동대장 놈이고.”
“큰일 났네. 큰일 났어.”
“왜?”
“내가 말했잖아? 계집을 납치해왔다고.”
“근데?”
“저 행동대장 놈이 바로 계집이랑 결혼할 신랑이야.”
“정말?”
“근데 총관은 왜 저기에 있는 거야?”
“그야 저놈들을 잡으러 갔다가 당했겠지.”
“그 말은 저놈들이 현령이랑 맞장 뜨러 왔단 거잖아?”
“말이 되냐? 관병들이 몇 명이야? 천 명이야. 천 명. 지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현령님 말 한 마디면 개구락지 되는 거야.”
“그렇겠지?”
“당연하지만.... 총관님이 당한 걸 보면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나도 그래.”
병사들은 일초 일행의 뒷모습을 보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한편 이곳은 현령 유석의 집무실 앞.
그는 지금 마차 행렬을 점검하고 있다.
“마차는 모두 몇 대냐?”
“총 삼십 대입니다.”
사복을 입은 중년인이 힘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물건은?”
“마차마다 열 상자씩 총 삼백 상자입니다.”
“이번에는 금광과 곡물시장의 비율이 어떻게 되느냐?”
“곡물시장이 조금 더 많습니다. 여러 곳이 홍수 피해로 출하량이 줄었고, 그 덕분에 이문이 많이 남았습니다.”
“잘했다. 행선지는?”
“태양장과 영춘왕부, 그리고 중원대장군부입니다.”
“똑 바로 해라. 상자 하나만 잃어버려도 네 십대 조상까지 다 팔아도 해결이 안 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좋다. 출발해라!”
“예, 대인!”
중년인은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오른손을 들어올린다. 그러자 마부들도 모두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낸다. 근데 신호만 보낼 뿐 마차는 움직이지 않는다.
“뭐해, 출발하지 않고?”
“그러게 말입니다.”
“출발하라!”
중년인은 다시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도 마차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대신 엉뚱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날도 어두운 데 어딜 급히 가시나?”
일초다. 그는 삼천마를 앞세우고 천천히 걸어온다. 마차는 동생들이 막고 있다.
“뭐하는 놈이냐? 여봐라!”
현령 유석은 부하들을 향해 소리친다. 하지만 대답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총관! 총관은 어디 간 거야?”
“대인, 총관은 심부름을 보내셨습니다.”
“참, 그렇지. 근데 그깟 깡패 새끼 한 놈 잡아오는 데 뭐가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그때 태운이 삼천마의 머리를 잡고 유석을 향해 던진다.
“이놈을 찾니?”
휘이이이이익!
삼천마의 몸은 회전을 하면서 유석을 향해 날아간다.
퍼억!
유석은 흉기가 날아오는 줄 알고 검을 휘두른다.
“으악!”
중년인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난다. 삼천마의 몸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그와 유석의 몸을 피로 물들였기 때문이다.
“에이 씨발! 이게 뭐야?”
“대..대인, 총관이었습니다.”
“뭔 소릴 하는 거야? 총관이 왜.....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저길 보십시오.”
중년인이 가리키는 곳에 삼천마의 목이 굴러다닌다.
“어떻게 된 거야? 운정 땅에서 총관을 저렇게 만들 놈이 어딨다고? .... 네놈이냐?”
그제야 유석은 일초에게 시선을 돌린다.
“눈치 한 번 빠르네. 그러니까 태양장에서 일찌감치 밀려서 여기까지 흘러왔겠지. 남 똥구멍이나 핥으면서 말이야.”
일초는 처음부터 유석을 자극한다.
“네놈이 정말 총관을 제압했느냐?”
“총관은 무슨? 삼천마 주제에. 안 그래도 내가 묻고 싶었다. 태양장이 언제부터 저런 악마새끼를 데리고 있었느냐? 태양장이 원래 그런 곳이었어? 그렇다고 개과천선 한 것도 아닌데.”
“뭐..뭐라고? 누..누가 삼천마란 말이냐?”
유석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만큼 삼천마의 악명이 높다는 걸 의미한다.
“왜, 니가 죽였다고 자랑하고 다니려고?”
“흐흐흐흐, 그런 건 관계없다. 네놈이 뭘 믿고 행패를 부리는 진 모르지만, 이곳에 들어온 이상 살아나갈 순 없다.”
“하긴 현령이란 놈이 역모를 꾸밀 정도면 여러 가질 준비하고 있겠지. 가능하면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
“그건 어려울 것 같다.”
현령은 역모란 말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왜?”
“호기심을 가지기도 전에 저승 구경을 할 테니까.”
삐이익!
현령 유석은 품속에서 피리를 꺼내더니 힘차게 분다.
콰아앙!
삼십 대의 마차에서 일제히 문이 열리며 한 사람씩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들은 나오는 즉시 일초의 동생들을 공격한다.
“크으윽!”
태민 사형제와 곤일은 모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바닥을 구른다. 이렇게 시작된 일방적인 공격은 한 동안 계속된다. 일초의 동생들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당한다.
“멍청한 놈, 저런 것들을 데리고 감히 호랑이 굴로 쳐들어 와?”
“글쎄? 길고 짧은 건 재 봐야 하지 않을까?”
일초는 동생들이 당하는 데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후후후, 하긴 저런 머저리들이 죽는 게 무슨 대순가? 근데 옆에 있는 멍청이들은 뭐냐?”
유석은 그제야 일초의 뒤에 서 있는 천기주와 제중을 본 모양이다.
“유석! 이 개자식아! 내 신부를 내놔라. 그러고도 네놈이 감히 법을 집행하는 현령이라고 할 수 있느냐?”
제중이 먼저 나선다.
“오라! 그러니까 네놈이 제중이란 멍청이구나.”
“날 욕하는 건 좋다. 하지만 만약 문희 누님에게 해를 입혔다면 네놈은 살아 있는 걸 후회하게 될 거다.”
“호오! 고놈 욕을 상당히 고급지게 하네. 근데 어쩌나? 계집은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는데. 참, 오해는 마라. 난 손도 까닥 안 했는데 혀를 깨물더군.”
“야, 이 개자식아! 같이 죽자!”
제중은 어디서 주었는지 손에 검을 쥐고 있다. 그걸 들고서 유석을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그는 몇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기다려라. 아직은 니 차례가 아니다.”
일초가 막아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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