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75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75
“호오! 그러니까 네놈이 그 말썽쟁이 놈이로군.”
흑의인은 어느새 바닥에 내려서서 제중을 노려본다.
“당신이 누군데 사람을 해치는 겁니까?”
제중은 무림 고수를 보고도 전혀 기죽지 않는다. 오히려 큰소리로 말한다.
“당신? 어린놈이 겁대가리를 상실했군. 죽고 싶냐?”
“내가 왜 당신한테 죽습니까?”
“그건 내가 결정한다.”
“당신이 뭔데?”
“후후후, 궁금하면 가르쳐 줘야지.”
“크악!”
제중이 재빨리 바닥을 뒹굴지만, 왼쪽 허벅지에 암기가 꽂힌다.
“어떠냐? 그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냐?”
“당신 사부가 누군지 모르지만, 제자를 잘못 가르쳤군.”
“뭐라고?”
“무공을 가르치면서 인간의 도리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으니 하는 말이오.”
“인간의 도리?”
“그렇소. 당신처럼 내키는 대로 사람을 죽이면 그게 인간이요? 살인마지.”
“살인마? 크하하하하! 내가 아직까지 삼천 명은 채우지 못했지만 살인마인 건 사실이지.”
“삼..삼천마다!”
누군가가 삼천마를 알아보고 소리치자 사람들은 기겁하며 뒷걸음질 치며 도망갈 궁리를 한다. 하지만 흑의인의 한 마디에 모두 발이 얼어붙는다.
“도망치는 놈은 그 즉시 저승사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삼천마(三千魔).
정확한 신상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십 년 전 ‘삼천 명을 죽여서 무공의 끝을 볼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무림에 등장한 인물이다. 근데 오 년 전 천 명을 죽였다는 선언과 함께 무림에서 사라졌다. 근데 갑자기 이곳 운정에 나타난 것이다.
“하하하! 그것 보시오. 내 말이 맞잖소?”
제중은 삼천마란 말을 듣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뭐가 맞단 말이냐?”
“사부가 제대로 가르쳤다면 천 명을 죽이고도 또 죽일 생각을 못할 테니까요.”
“으음! 그러니까 니가 말하고자 하는 뜻이 뭐냐?”
“뭐긴 뭐요? 당신은 살인마에 개새끼란 거지. 으악!”
두 번째 암기가 왼쪽 어깨에 꽂힌다.
“흐흐흐, 원래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 놈은 주둥이로 망하는 법이지.”
“크크크, 자아비판을 하는 걸 보니 인성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군요.”
“뭐라고? 이 새끼가!”
“우욱!”
이번에는 오른쪽 어깨다. 그나마 암기가 꽂힌 상태라 출혈이 심하진 않다.
“후후, 고작 열 걸음 앞에서도 급소를 못 맞추는 걸 보니 사부가 무공도 제대로 못 가르쳤나 보군.”
“정말 죽고 싶은 거냐?”
“넌 죽고 싶은지 몰라도 난 아니다. 살아서 내 마누라랑 평생 행복하고 살고 싶다. 근데 네놈들이 그걸 망쳤다. 시간 끌지 말고 깨끗하게 죽여라. 크흑!”
다시 암기가 옆구리에 꽂힌다.
“네놈이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내 특기는 살인이지만 취미는 최대한 천천히 죽이는 거다.”
“그래서 행복하냐?”
“당연하지. 네놈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 순간 죽음이 찾아갈 것이다.”
“네놈이 그런 기쁨을 누리도록 내가 가만있을 것 같니?”
“크크크, 네놈이 자결하는 순간 여기 있는 놈들은 모두 너와 저승길 동무가 될 텐데? 그래도 좋다면 혀를 깨물어라.”
“추잡한 놈, 네놈은 삼천 명이 아니라 삼만 명을 죽여도 마(魔의) 본질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뭐냐? 아니, 그 전에 하나만 더 맞자.”
“우욱!”
암기가 제중의 복부에 꽂힌다. 이번 것은 이전보다 통증이 더 심한지 크게 인상을 찌푸린다. 그런데도 눈빛은 오히려 더 강해진다. 독기로 가득하다.
“크크크, 진짜로 모르냐? 알면서 모른 척 하는 거냐?”
“.....?”
삼천마는 답을 못한다.
“후후후, 잘 들어라. 듣고 나서 놀라지도 말고. 우웃!”
이번에는 암기가 제중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애송이, 한 번만 더 질질 끌면 목구멍을 통과하게 될 거다.”
“그럼 나야 좋지. 지금 상당히 힘들거든. 으음!”
삼천마의 말대로 암기는 정말 목을 향해 날아온다. 제중은 아예 눈을 감고 기다린다.
파앗!
암기는 중간에 방향을 약간 틀어 목을 스치고 지나간다.
“쯧쯧, 이것으로 내 대답은 끝났다.”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
“크크크, 네놈이 무공은 뛰어난지 모르지만 머리가 빈 게 분명해.”
“크악!”
이번에는 제중이 아니라 철웅이 비명을 지른다. 오른쪽 가슴에 암기가 박혀 있다.
“지금부터 네놈이 말장난을 할 때마다 한 놈씩 죽는다.”
“머리는 비었지만 멍청하진 않네. 내가 친구들에게 약하거든. 아..알았다. 설명하지. 잘 들어라. 넌 절대 날 못 죽인다. 왜냐고? 현령으로부터 날 산 채로 끌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지. 틀렸어?”
“그게 무공의 극을 찾을 수 없는 것과 무슨 관계냐?”
“아이고, 또 머리의 한계를 느끼는 모양이군. 아..알았어. 넌 현령, 정확하게 말하면 태양장의 셋째 어른의 부하지?”
“그렇다고 치자.”
“그 정도면 솔직한 답변이군. 근데 말이야. 태양장의 높은 놈들 중에서 무공의 극을 봤다는 소릴 들어봤어?”
“.....”
“근데 고작 서열 삼위의 졸개 노릇을 하면서 무공의 본질을 깨닫는다고? 지나가는 똥개가 웃겠다. 이 정도면 설명이 되고, 이해가 돼?”
“......”
삼천마는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말을 잃는다.
“이유를 알고 있으니 해결책도 알겠군.”
“당연하지.”
“뭐냐?”
“요구를 한다는 건 내 조건을 받겠다는 뜻이겠지?”
“원하는 게 뭐냐?”
“내 친구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라.”
“흐흐흐, 나더러 먹잇감을 포기하라고?”
“싫으면 할 수 없지. 끄아아아악!”
삼천마는 다가와 쓰러져 있는 제중의 가슴에 꽂힌 암기를 발로 짓누른다.
“한 번만 더 까불면 니 친구들 대가리는 모조리 빠개진다.”
“그러시든지. 하지만 내 친구 중 단 한 명이라도 다치면 내 입은 열리지 않다는 것만 알아라. 크으윽!”
이번에는 허벅지에 꽂힌 암기를 짓밟는다.
“좆만 한 새끼가 어디서 개지랄이야? 조금만 기다려라. 죽어서도 기억 날만큼 처참하게 죽여줄 테니까.”
“흐흐흐, 난 주둥이로 큰소리치는 놈은 안 믿는다. 헉! 헉! 자신 있으면 지금 죽여라. 헉! 헉! 당장!”
제중은 전신에 피를 흘리며 숨을 헐떡거리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또렷하다. 그 기에 눌려 삼천마가 꼬리를 내린다.
“좋다. 모두 꺼져라!”
“진작에 그럴 것이지.”
“대신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면 모두 찾아내서 죽인다. 명심해라!”
삼천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문회의 식구들을 모두 도망친다.
“중아, 꼭 살아남아라!”
철웅은 달려가면서도 소리친다. 그의 가슴에선 계속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고마워.”
“자, 이제 말해라.”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삼천마가 재촉한다. 이제 마당에는 일문회의 회주인 전기주와 제중, 그리고 삼천마만 남아 있다.
“간단하다.”
“간단해?”
“그래. 날 죽이고 태양장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무공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거다. 그 길만이 니가 무공의 끝을 볼 수 있다.”
“그게 다냐?”
“그래. 내 말이 잘못됐니? 넌 태양장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들의 똥개노릇을 해서는 그들을 넘어설 수는 없으니까.”
“으음! 어이가 없는 말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언젠가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생각에 오 년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이제라도 깨달았다니 다행이다. 넌 영원히 내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크크크크, 또라이새끼라고 기억해주마. 잘 가라!”
삼천마는 돌을 들어 올리더니 제중의 머리를 내리친다. 죽이려는 것이다. 근데 그의 손보다 더 빠른 물체가 있다.
“안 돼!”
천기주다. 그는 아까 정신을 차렸지만 기회를 노리다 제중이 위기에 처하자 몸을 날렸다. 가슴에 꽂힌 암기를 뽑아 삼천마의 손등을 찌른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른 게 있었다.
“크악!”
삼천마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나간다. 얼굴에는 선명하게 신발자국이 남아 있다. 누군가가 일문회의 조직원들의 벗겨진 신발을 주워 던진 것이다.
“크아아악!”
그때부터 한 동안 삼천마의 비명소리가 장원에 울러 퍼진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기절한 뒤에도 구타는 계속되고 단전이 파괴된다. 전신 혈도가 완전히 터진 다음에야 조용해진다. 몸이 완전히 걸레가 될 때까지 때린 것이다. 천기주와 제중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 장면을 쳐다보고 있다.
“운이는 이놈을 끌고 가고, 일이와 자미는 두 놈을 치료해줘라.”
“예.”
삼천마를 처리한 건 일초다. 그는 상황을 지켜보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선 것이다.
“이..이게 뭡니까?”
곤일이 무진이 만든 영혼단을 먹이려 하자 천기주는 살짝 겁을 먹는다. 형제들이 영단을 이름을 영혼단으로 정했다. 소영단 및 해독약은 ‘자비(慈悲)’, 독약은 ‘자연(自然)’이라고 부른다.
“호호호! 깡패두목께서 상당히 겁이 많으시군요.”
“그..그게 아니라...”
“걱정 마세요. 깡패 오라버니께선 횡재를 하신 겁니다. 그것도 보통 횡재가 아니라 하늘이 내린 천운입니다.”
자미가 천기주를 놀리는 사이 제중은 곤일이 건네는 영혼단을 꿀꺽 삼켜버린다. 그걸 보고 천기주도 입안으로 털어 넣는다.
“으음!”
‘머리가 상쾌한 것이 전신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마약은 아니다. 으음! 엄청나게 강한 기운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전신을 돌아다닌다. 혹시 이런 게 기운이란 건가? 그렇다면 방금 먹은 게 흔히 말하는 영단일 가능성이 놓다. 근데 이 사람들이 왜 내게 이런 걸 주는 걸까? 흠! 역시 중이 저놈의 재능은 나 같은 사람은 따를 수가 없다.’
천기주의 말대로 제중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곤일이 가르쳐 주는 대로 운기조식을 한다.
“후후, 학운장주가 탐낼 만 한 놈이군. 재능도 탁월하고, 근성은 남다르며, 거기에다 인성까지 갖췄으니 누구나 욕심 낼만 하다. 이제 영혼단까지 먹었으니 기초는 다진 셈이군.”
일초는 흡족한 표정으로 제중을 쳐다본다.
“어엇! 어떻게 된 겁니까?”
천기주는 기겁하며 소리친다.
“호호호! 왜요? 잘못되기라도 했나요?”
자미는 그가 놀라는 걸 이해한다는 듯이 웃는다.
“그게 아니라... 몸이 멀쩡합니다.”
그의 가슴에 난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제중의 몸도 멀쩡하다. 십여 곳의 상처도 사라졌고, 통증도 없어 보인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오라버닌 천운을 타고나셨다고.”
“대체 제가 뭘 먹은 겁니까?”
“야,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안내해라.”
“어딜 요?”
“어디긴 어디야? 현청이지.”
“예에? 거긴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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