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70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70
두 사람이 나란히 길을 가고 있다.
“룡아.”
“응.”
“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게 뭐니?”
“음, 글쎄? 여러 가지가 있지.”
“그 중에서 세 가지만 얘기해봐.”
“세 가지?”
“응.”
“음! 첫 번째는 가려와 정이, 두 번째는 무공, 세 번째는 너.”
“하하하! 그래도 내가 세 번째는 되네.”
“일이 넌?”
황룡과 초일.
두 사람은 친한 친구다. 그것도 그냥 친구가 아닌 운명 공동체처럼 지내온 사이다. 특히 초일은 사십이 넘어 오십이 다 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황룡을 보좌하고 있다.
“나?”
“응.”
“으음! 그건.... 날 잡으면 가르쳐 주지.”
초일은 그 말을 하고는 달리기 시작한다.
“야! 그런 게 어딨어? 난 말했잖아?”
“그러니까 날 잡으라니까.”
“좋다. 잡으면 엉덩이를 걷어찰 거야.”
“하하하하! 마음대로 하셔. 쉽진 않을 거야.”
“흥! 요즘 내가 신법 연구하는 거 모르지?”
“나도 하고 있답니다. 간다!”
초일은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하다.
“어쭈! 제법인데? 제운종을 변형시켰군. 좋다. 나도 간다!”
이렇게 두 사람은 멀리 보이는 언덕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뭐야? 왜 이렇게 멀어? 분명히 조금 전에 지난 것 같은데.”
“쯧쯧, 고금제일인의 신법이 뭐 그래?”
“아니야, 분명히 저 나무는 조금 전에 본 건데... 이상하지 않아?”
“그러게 누가 진식을 설치했나? 근데 저건 처음 보는 거다.”
초일은 왼쪽편의 낭떠러지를 가리킨다.
“그러게 누가 장난친 거야, 너지?”
“후후후, 널 놀려주려고 했는데, 들켰네.”
“가보자.”
두 사람은 낭떠러지를 향해 걸어간다.
“우와! 이렇게 깊은 계곡이 있었나?”
“나도 몰랐어. 며칠 전에 산책 왔다가 처음 봤어.”
“여기 떨어지면 국물도 없겠다.”
“국물이 뭐야? 떨어지면서 가루가 되는 거지.”
“무서운 곳이네. ... 잡았다!”
무진은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초일의 왼쪽 어깨를 잡는다.
“뭐야? 이건 반칙이야.”
“무슨 말씀? 분명히 여기까지라고 했어. 어서 말해.”
“뭘?”
“니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 세 가지.”
“후후, 난 그런 거 없어.”
“뭐야? 장난하는 거야? 난 말했는데. 지어내서라도 말해.”
“난 그런 거 없어.”
“뭔 소리야? 넌 결혼도 안 했으니까 당연히 내가 첫 번째라고 말해야지.”
“미친 놈, 내가 왜 널 제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해?”
“야, 초일. 너 정말 배신 때릴 거야?”
“배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왜 널 여기에 데려왔는지 알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 혹시 삐졌니?”
“그래. 삐졌다. 그래서 널 죽이려고 데려온 거야.”
푸우욱!
“커어억!”
“이..일아. 이게 무슨 짓이냐? 일아!”
“궁금하냐? 내가 왜 이런 일을 꾸몄는지?”
“일아! 우린 친구잖아? 유일한 친구.”
“그렇지. 우린 유일한 친구지. 그런데 난 이제 친구 그만두려고.”
“왜?”
“지겨워서. 네놈은 항상 대장질 하고, 난 쫄따구만 하니까 재미가 없더라고. 그래서 때려치우려고.”
“이런다고 내가 죽을 것 같니?”
“쉽진 않겠지. 그래서 내가 몇 가지를 준비했다.”
“몇 가지?”
“그래. 우선 단검에 무형지독을 묻혔어.”
“무형지독? 그래서 내공이 모이지 않았구나. 그리고?”
“두 번째는 이거다.”
초일이 손을 들자 황룡이 바로 신음소릴 낸다.
“크으윽! 니..니들이...”
황룡의 뒤에는 다섯 사람이 서 있다. 그들은 모두 단검을 쥐고 있다. 그건 모두 황룡의 몸에 박혀 있다.
“죄...죄송합니다.”
“대..대형! 죄는 저승에서 갚겠습니다.”
크으으으윽!
전신에 다섯 개의 검이 꽂힌다. 황룡은 마치 작살에 찍힌 고기처럼 퍼덕거린다.
“네..네놈이, 동생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후후후! 궁금하면 저승사자에게 물어봐라.”
“크크크큭! 좋다. 그럼 세 번째는 무엇이냐?”
“세 번째? 그건 바로 이거다.”
초일이 검들에 꽂혀 퍼덕거리는 황룡의 몸을 발로 찬다. 그러자 황룡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다.
“으아아아아...악!”
그것도 모자라 수십 개의 화살이 그를 향해 날아간다. 이 정도면 설사 신이라고 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제 고금제일인은 바로 나 초일이다. 초일! 으하하하하하!”
초일의 웃음소리가 산울림이 되어 온 산을 울러 퍼진다.
“허어억!”
무진은 잠에서 깨어난다.
“저..정랑!”
호란이 침상으로 달려가 그의 손을 잡는다.
“무슨 꿈을 꿨어요? 어머 이 땀 좀 봐.”
“아무 것도 아니요. 매일 꾸는 건데 오늘이 좀 길었나 보오.”
오늘 꿈은 평소 명상을 할 때와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거의 비슷하다.
“당신이 언제 잠을 잤다고 꿈이에요?”
“하하하! 그런가? 아무튼 별거 아니오.”
“또 그 일이에요?”
“이젠 잊을 만도 한데, 내가 성격이 소심해서 그런가 보오.”
“대범하면 그런 게 잊어진답니까?”
월미공주다.
“전 그 일만 생각하면 치가 떨려요.”
가려도 나온다.
“전 추측만 했을 뿐 구체적인 건 잘 몰랐어요. 현장에 제가 없었다는 게 한(恨)이에요.”
세 여인은 무진의 영과 연결돼 있어서 그에게 문제가 생기면 모두 들여다 볼 수 있다.
“있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야.”
“오라버닌 정말 초일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했어요?”
“몰랐다면 거짓말이지. 초일이 어떤 움직임이 있단 건 알고 있었다. 사람들과 비밀회동을 하고, 태양장과 무림맹을 움직였단 소리도 들었으니까. 하지만 모두 날 위해 뭔가를 하는 줄 알았지. 이전에도 그랬으니까.”
“으음!”
세 여인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무진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현장에 있었다 하더라도 막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려와 월미에게 부탁할 게 있는데... 들어주겠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섭섭하게.”
“그러게 말이야. 이제 우리는 뒷방 늙은이 취급하는 거예요?”
무진은 미안해서 말을 잘 못하자 오히려 두 사람이 뭐라고 한다.
“내가 두 사람에게 해준 일도 없이 부탁을 하려니까 미안해서 그렇지.”
“정랑,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한텐 그러면 안 되는 거랍니다.”
“그래요. 우린 이미 한 몸이에요.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더 이상해요.”
“고맙소. 그럼 직설적으로 말하리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지금 우리가 가장 큰 고민은 초일 그 놈을 찾지 못하는 거요.”
“짐작 가는 자도 없나요?”
“몇몇은 있소. 하지만 자칫 잘못 건드리면 역효과가 날까봐 조심하고 있소.”
“그 말씀은 우리더러 놈을 유인해달라는 건가요?”
“아니오. 놈은 누가 유인한다고 나올 정도로 어리숙하진 않소.”
“그럼 스스로 나오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바로 그거요. 놈이 방심을 하도록 만들어야 하오.”
“그게 어렵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소. 동생들에겐 단단히 일러뒀소. 실력을 십분 감추라고. 문제는 내 자신이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오라버니의 능력을 빼앗으면 되는 건가요? 빼앗는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그래. 놈이 나타날 때까지 만이라도 그렇게 좀 해주라.”
“정랑이 스스로 할 순 없는 건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놈을 속일 순 없다.”
“그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당시에도 놈과 비무를 하면 간신히 이겼소. 물론 서로 실력을 감추고 있었지만.”
“그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그런 일을 꾸몄겠지.”
“알았어요. 최선을 다할 게요.”
“남의 기운을 임시로 가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오.”
“알고 있어요. 그래도 정랑이 하시는 일인데 무슨 일인들 못하겠어요?”
“그래요. 언니 말대로 저도 최선을 다할 게요.”
“그럼 전 뭘 하죠?”
가만히 듣기만 하던 호란이 나선다.
“넌 총 감독을 해야지.”
“총감독이라고요?”
“그래. 오라버니가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니 니가 대신 해야지.”
“호호호! 알았어요. 지금부턴 제가 총 대장이란 말이죠?”
“얘가 알고 봤더니 완장체질이네.”
“저도 이전엔 몰랐어요. 근데 요즘 정랑을 따라다니면서 남 앞에 자주 나서다 보니까 자연히 그렇게 되더라고요.”
“호호호! 너 오라버니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니?”
“왜요?”
“고금제일인이란 소릴 듣다가 어떻게 됐니? 최측근들에게 배신당하고 저렇게 된 거야.”
“그럼 전 안 할래요. 그냥 언니들이랑 수다나 떨면서 즐겁게 살래요.”
“호호호! 잘 생각했다. 난 오라버니가 빨리 복수를 끝내고 우리랑 재밌게 놀았으면 좋겠다.”
“곧 그렇게 될 거예요.”
“당연히 그래야지. ... 누가 온다.”
가려의 말대로 누군가가 별원으로 접근하고 있다.
“시녀인 모양이에요.”
월미의 말대로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어린 시녀가 차를 가지고 온다.
“수고가 많구나. 여기 내려놓을래?”
“예, 아가씨! 왕야께서 좋아하시는 용정차예요.”
“그래. 고맙구나. 왕야께도 감사하단 말씀을 전해주겠니?”
“예, 아가씨! 그럼 전 물러갈게요.”
그렇게 시녀는 물러나고 호란이 무진을 일으켜 세워서 차를 먹인다.
“어떠세요?”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소.”
“그래서 용정차 용정차 하는 가 봐요.”
“난 그래도 흑차(黑茶)가 좋소.”
흑차는 중원의 서민들이 주로 먹는 보이차(普洱茶)를 말한다.
“그런데 황족들이나 고관대작들이 용정차를 즐겨 마시는 이유가 뭘까요?”
“그건 그들이... 우욱! 콜록! 콜록!”
“저..정랑!”
무진이 두 번째 잔을 마시다 피를 토한 것이다.
“독인가요?”
콰앙!
그 때 방문이 강하게 열리며 한 사람이 뛰어든다. 그는 막 무진을 만나기 위해 별원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무..무슨 일입니까?”
진천왕이다.
“아..아니, 대형!”
그는 바닥에 떨어진 피를 보고 화들짝 놀란다.
“어서 의원을 불러라. 어서!”
“호들갑 떨지 마라.”
“피를 토하고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까? 어서 해독약을 드세요. 어서!”
“쯧쯧, 괜찮다니까 그런다. 중독이 아니라 혈도에 막혀 있던 죽은피가 빠져나온 거야.”
“에이! 괜찮아요. 대형은 그게 문제예요. 아무리 위대한 인물도 아프기도 하고, 때론 고뿔 때문에 몇날 며칠 고생도 한답니다. 무림인이 중독되는 게 뭐가 부끄럽다고. 보아하니 심한 것도 아닌 것 같으니까 며칠 만 푹 쉬세요.”
진천왕은 혼자서 떠들어댄다.
“지랄을 해라. 야, 너 지금 내가 중독됐다니까 신나지? 그래서 몇 달을 고생했으면 하지?”
“그게 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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