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71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71
“뭐라고?”
“아..아닙니다. 제가 잠시 실성을 했나 봅니다.”
“됐으니까 장난은 그만하고. 우린 한 시진 뒤에 떠날 생각이다.”
“그 몸으로요?”
“난 괜찮다.”
“안 됩니다. 대형을 이렇게 보냈다는 게 알려지면 전 형제들에게 맞아죽습니다. 또 수련 고년 등쌀을 어떻게 견디라고요?”
“몸이 좀 약해졌을 뿐이지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만 따로 떠날 테니 애들한텐 말하지 마라.”
“예에? 몸이 안 좋으면 동생들이랑 같이 다녀야죠. 그러다 잘못되면 어쩌시려고요?”
“어째 그러길 바라는 것 같다.”
“하하하! 대형의 농담 실력은 갈수록 느는 것 같습니다.”
“까불지 말고, 그렇게 알고 있어라.”
“어딜 가시게요?”
“그걸 말할 거면 몰래 가겠니?”
“그렇긴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일초 그 놈이 못 찾을 것 같습니까?”
“찾을 때 찾더라도 며칠이라도 좀 편하게 지내보고 싶어서 그런다.”
“하하하! 그놈의 성질이 더럽긴 하지요. 근데 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니가?”
“예. 안 될 거 없잖아요?”
“그럴 바엔 차라리 일초랑 같이 가겠다.”
“야, 정말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아가씨도 같은 생각이세요?”
진천왕은 무진에게 안 먹히자 목표를 호란으로 바꾼다. 하지만 단칼에 정리된다.
“전 이번 여행길에 왕야의 짝을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이러시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예에?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 짝이라고 요? 그건 제가 장가를 한 번 더 간다는 말씀이죠?”
“그럼요. 사실 오래 전부터 마음에 둔 분이 있는데 이번에 만나볼 생각이에요.”
“그럼 당연히 제가 협조를 해야죠. 집에서 조용히 근신하고 있겠습니다요. 조심해서 무사히 잘 다녀오십시오. 이건 제가 준비한 노잣돈입니다. 요긴하게 쓰시기 바랍니다. 대형의 건강도 안 좋으신데 노숙 같은 거 하지 마시고, 항상 따듯한 곳에서 좋은 음식 드시기 바랍니다.”
진천왕은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더니 호란의 소매주머니에 넣어준다.
“알겠어요. 정랑이 건강을 되찾고 제가 아기를 가지게 되면 왕야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게요.”
“제가 뭐 한 일이 있다고....대신 한 가지는 꼭 지켜주십시오.”
“뭘요?”
“우리 수련이는 당분간 모르는 걸로 해주세요. 사위 놈도 마찬가지고요. 둘 다 워낙 개코라서 조금만 냄새를 흘려도 금방 알아채거든요.”
“알았어요. 있다가 주머니를 확인해보고 판단할 게요.”
“아이고, 아가씨. 진즉 그렇게 말씀하시지. 안 그래도 혹시나 해서 하나 더 준비했습니다. 이 번 건 가벼운 놈입니다. 아무리 금덩이가 좋아도 전표보단 못하거든요.”
진천왕은 다시 품속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호란의 소매주머니에 넣는다.
“호호호! 알았어요. 왕야의 정성을 받들어 조만간 연락을 드릴 게요. 너무 기대하시면 혹 마음의 병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편안하게 마음먹고 계세요. 모든 건 제가 책임지고 처리할 테니까요.”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그럼 전 물러가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기다리겠습니다.”
“근데 말이에요.”
“예, 아가씨.”
“제가 알기론 왕야 오라버니께선 얼마 전에 새 장가를 가신 걸로 아는데, 아닌가요?”
“예에? 제가 새 장가를 갔다고요?”
“아마 그럴 걸요? 어제만 해도 언니를 다섯 번이나 봤으니까요. 제가 잘못 봤나요?”
“대형, 제가 새장가를 갔나요? 그렇지. 분명히 갔지. 내가 왜 이러지?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이 기운이 많이 떨어진 모양이네.”
“니가 기운이 떨어진 걸 보니까 확실하게 장가를 가긴 갔나 보다. 그치?”
“그러게 말입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안 그래도 조금 있다가 언니를 만나기로 했거든요. 왕야랑 같이 확인을 해보면 되겠죠.”
“아..아닙니다. 대형, 다음에 뵐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가끔씩 제 생각도 하시고요.”
그렇게 말하곤 진천왕은 황급히 방을 나선다. 문을 여는 그의 눈가엔 이슬이 맺힌다. 이것은 그들만의 이별 방식이다. 진천왕과 무진 부부는 헤어지기 싫어서 괜히 새 장가 얘길 한 것이다.
“정이 많은 분이군요.”
“너무 많아서 문제지. 그러니까 이놈 저놈 다 집적대고, 만만하게 보지만 황실에서 저놈을 이길 자가 없소.”
“그 정도예요?”
“우리에겐 천군만마지. 대양왕 하고도 친하니까 황실은 큰 문제가 없을 거요.”
“다행이군요. 근데 어디로 가실 거예요?”
“쉽진 않겠지만, 당분간은 잠수를 타야겠소.”
“그럼 우리까리 오붓하게 보낼 수 있겠네요.”
“그래서 좋소?”
“당연하죠. 언니들이랑 재미나게 놀고 싶어요. 잠깐뿐이겠지만.”
“일이 끝나면 조용한 곳에서 행복하게 삽시다.”
“전 정랑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요. 지금도 행복하고요.”
“고맙소.”
무진은 호란에게 다가가 포근하게 안아준다.
“정랑, 이 상태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렇소. 빨리 하루 종일 그럴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하오.”
“멀지 않아 그런 날이 올 거예요.”
두 사람은 가볍게 입맞춤을 하며 더욱 강하게 끌어안는다.
“동생, 모처럼 분위기도 좋은데 거시기는 어때? 아기를 갖기엔 좋은 날인데.”
가려가 끼어든다.
“언니! 이럴 땐 가만히 지켜보는 거야.”
“그..그런가? 내가 실수를 했네.”
“실수라기 보단 방해를 한 거지.”
월미까지 나선다.
“에고, 오늘도 틀렸다. 우리 언니들이 조금만 도와주면 서로 좋을 텐데...”
“어떻게?”
“생각을 해봐요. 우리가 한 몸인데, 몸이 즐거우면 저만 느끼겠어요?”
“뭐야, 그럼 막내가 정랑이랑 잠자리를 하면 우리도 느낄 수 있다는 거야?”
“그거 말 되네. 영혼까지 하나가 됐는데 몸이라고 따로 놀겠어? 야, 이렇게 되면 난 죽어서 소원을 이루게 되는 건가?”
두 사람은 지금까지 무진부부과 관계를 맺을 땐 애써 무시해왔다. 그러다 보니 육체적인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호란의 눈치를 보느라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전 죽어서도 정랑을 가질 수 있게 됐어요.”
“그러니까 제발 좀 도와주세요. 그리고 제가 아기를 가져보세요. 저 혼자만의 아기겠어요? 입덧을 하면 언니들도 할 테고, 언니들의 행동과 성격은 물론이고, 능력까지도 닮게 될 거예요. 명실상부한 언니들의 아이라고요. 아시겠어요?”
“마..막내야, 너 그 말 정말이지?”
“제가 언제 언니들에게 거짓말 하는 거 봤어요? 전 정랑을 혼자 독차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저도 여자라 그런 욕심이 없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젠 어쩔 수가 없잖아요? 앞으론 언니들이랑 운명공동체라고 생각하고 살기로 했어요.”
“막내야!”
“란아!”
가려와 월미의 영혼이 몸 밖으로 나와 호란의 몸을 감싼다.
“그러니까 앞으론 방해하지 마세요. 알았죠?”
“알았어.”
“당연하지.”
“제가 편해야 언니들도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단 것도 잊지 마세요.”
“당연하지. 앞으로 거시기 하는데 방해하는 놈들은 내가 다 처리할 게.”
“난 최대한 분위기를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할 거야.”
“호호호! 고마워요. 언니들만 도와주시면 조만간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예요. 우리들의 아이를 요.”
“우리들의 아이!”
“호호호호! 오라버니, 방금 들었죠? 막내가 우리들의 아이라고 했어요.”
“그래. 들었다. 이제야 우리가 모두 한 가족이 된 것 같구나.”
“정랑, 고마워요.”
“가려, 당신에겐 항상 미안하고, 고맙소.”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당신이랑 이렇게 같이 지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
“저도 행복해요. 착한 막내를 만나서 고맙기도 하고요.”
“정랑,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일초 오라버니가 오면 도망치기도 어려워요.”
“알았소. 분위기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잡아 봅시다.”
“엉큼하시긴.”
“원래 약간은 엉큼한 사람이 거시기도 잘 하는 법이란다.”
“월미 언닌 시집도 안 가보고 그런 걸 어떻게 아세요?”
“원래 황산은 안 가본 사람이 가본 사람보다 더 잘 아는 법이거든.”
“호호호호!”
“하하하하!”
이렇게 무진 부부는 즐거운 마음으로 방을 나선다.
무진부부가 떠난 지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일초와 형제들은 그들이 갈만한 곳을 다 찾아봤지만, 모두 헛걸음을 했다. 북경은 물론이고, 장안과 개봉까지 다 뒤졌지만, 두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중간에 왕명도 만나고, 묵사회의 금곡분타에 들러서 분타주인 금종과 흑백쌍마, 그리고 적마대군도 만났다.
얼마나 열심히 수련을 했는지 네 사람 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쌍마는 무진의 명령대로 반쯤 정파인이 되었고, 금종과 적마대군도 이제 자연무예의 초입에 들 정도로 발전했다. 그들은 일초 일행을 따라나서려고 했으나 낭인촌으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무진의 지시였다. 당분간 그곳에서 수련하며 촌장 곽정과 총사 청사를 도우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낭인촌은 다시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된다.
일초 일행은 지금 황금상단으로 향하고 있다. 수련을 도와주라는 진천왕의 부탁도 있었지만, 황금상단이 언제 공격받을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일행이 운정이란 마을을 지날 때이다. 현청(縣廳)이 있을 정도로 제법 큰 도시의 서민들이 사는 주택가이다.
“저게 뭐냐?”
일초는 물론이고, 일행의 시선이 모두 한 곳에 집중된다. 그곳에서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뒷골목 깡패들이 강짜를 부리는 모양입니다.”
“가서 확인해봐라. 음! 저기 개방도가 있네.”
일초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태민이 근처에서 상황을 유심히 살피는 거지를 부른다.
“안녕하세요. 전 운정 분타의 번개라고 합니다. 분타주님을 모셔올까요?”
거지는 태민이 작은 패를 보여주자 허리가 직각으로 꺾으며 정중하게 인사한다.
“아니오. 우린 지나가는 길이라오.”
“아, 그러셨군요. 근데 무슨 일로.... 혹시 저것 때문인가요?”
“그렇소. 사정을 알 수 있겠소?”
“예. 하도 어이가 없어서 우리도 지켜보는 중입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이곳 운정엔 두 개의 깡패조직이 있습니다. 그들이 구역 싸움을 하면서 생긴 일입니다.”
“구역 싸움을 하는데 왜 저곳이 문제가 된 겁니까?”
“그게 웃기는 거죠. 저 집에 딸이 있는데, 오늘이 결혼식이 있는 날입니다. 근데 신랑이 한쪽의 조직원인 모양입니다.”
“그런데요?”
“근데 반대쪽 조직에서 신부 측 집이 자기네 구역에 있기 때문에 인정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결혼식장이 난장판이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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