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46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46
“솔직하게 그렇습니다. 적마대군과 달리 저흰 팔십 년이 넘도록 흑도로 살아 왔습니다. 근데 갑자기 착한 일만 한다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고민입니다.”
“괜찮다. 그건 내가 해결해줄 테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네놈들에게 그런 낌새라도 보이면 이렇게 하지 뭐.”
부스스스스....!
무진이 탁자에 왼손을 올리자 적마대군이 메고 있던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와 천천히 날아온다. 근데 검은 날아오면서 소리도 없이 모두 가루로 변해버린다. 놀랍게도 가루는 검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그 모습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어..어떻게 저럴 수가?”
“허억! 마..말도 안 돼!”
“무..무슨 무공입니까? 어엇!”
세 사람은 깜짝 놀라 말을 제대로 잇질 못한다. 특히 적마대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으로 검을 만지려다 황급히 뒤로 물러난다. 검을 만지려는 순간 수많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작 놀라운 일은 그 뒤에 벌어진다. 무진이 그냥 손을 탁자에서 내리자 검이 저절로 방향을 바꾸더니 원래의 자리로 날아간다. 여전히 가루인 채로. 근데 검집에 가까워질수록 가루는 점점 검의 형태를 만들어가더니 들어가는 순간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마..마술인가요?”
“궁금하면 직접 확인을 해보세요.”
태운의 말에도 적마대군은 감히 검을 만지지 못한다. 조금 전에 경험한 통증 때문이다. 대신 옆에 앉은 흑마가 검을 뽑는다.
찌이이이잉!
내력을 주입해도 멀쩡하고 오히려 검신에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기운이 뻗어 나온다.
“선배, 어서 대답하시오. 어서!”
적마대군은 멍하니 서 있는 쌍마를 향해 소리친다.
“어? 으응! 그래.”
“대형! 흑마가 인사를 올립니다.”
“백마가 대형을 뵙습니다.”
“조훈이 대형께 인사 올립니다.”
“잘 왔다. 자세한 인사는 나중에 하고 너희가 처리해줘야 할 일이 생겼다.”
“저희가요?”
“그래. 지금 이곳은 태양장과 세심각에 의해서 완전히 포위되었다.”
“우리를 쫓아온 것이군요.”
“죄송합니다.”
쌍마는 태양장과 세심각이 자신들을 추격해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니다. 예상했던 일이고, 우리가 원하는 바다.”
“유인을 했단 말씀인가요?”
“그래. 현재 우리는 태양장과 세심각은 물론이고, 황실 실세들과도 싸움을 벌이고 있다. 놈들은 무림은 물론이고, 황실까지도 전복하려 하고 있다.”
“역모란 말씀입니까?”
“무림과 황실을 동시에 장악하려는 거지.”
“중원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가능하지도 않고요.”
“그럴만한 힘을 가진 자들이라면?”
“설마요?”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우리는 두 가지 전술을 쓰고 있다. 하나는 우리 전력을 최대한 숨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놈들의 세력을 최대한 줄이는 거다.”
“태양장과 세심각을 지워버릴 생각이시군요.”
“지운다기보다 무력화시킨다고 해야겠지.”
“알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일단 여기로 유인만 하면 된다. 그 뒤엔 우리가 처리할 테니까.”
무진은 흑마에게 작은 지도를 하나 건넨다.
“가까운 곳이군요.”
“가능하면 싸우지 말고 모두 유인해라.”
“숫자가 얼마나 될까요?”
“지금 상황으로 봐선 적어도 태양장만 삼백 명은 될 것 같다. 세심각의 초능력자들은 다섯 명이다.”
“알겠습니다. 싸우는 거라면 몰라도 유인하는 거야 가능할 겁니다.”
“대형! 제1로군의 관병들도 도착했습니다.”
“얼마나 되더냐?”
“오백 명이 넘을 것 같습니다.”
“오백 명?”
“예.”
“싸우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겠군요.”
“동창도 도착했습니다. 오십 명 정도입니다.”
바깥 상황에 대한 보고는 곤일이 한다.
“예상보다 훨씬 많구나. 아무래도 작전을 변경해야겠다. 너희 세 명으론 어려운 일이다.”
무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지만 쌍마의 의지는 확고하다.
“도망치는 거라면 몇 배가 더 와도 문제가 없습니다.”
“대형과 한 가족이 된 기념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넌 빠져도 좋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십니까? 제 전공이 원래 공격보다 수비고, 수비보단 도망치기입니다.”
백마가 빠지라고 말하자 적마대군이 발끈한다.
“하하하! 그럴 줄 알았다. 저희는 먼저 나가겠습니다.”
“수고해라.”
한편 세 사람이 문을 열고 나서자 바깥에서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쌍마는 들어라! 네놈들이 도망갈 곳은 없다. 비무대회를 망친 대가를 받아라! 다섯을 셀 동안 나오지 않으면 객잔은 불바다가 될 것이다. 하나! 두울! 세엣! 네엣! 다서...”
상대방은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바로 숫자를 센다. 하지만 그는 숫자를 다 세지 못한다.
“쌍마가 도주한다!”
“놈들을 쫓아라!”
쌍마가 객잔의 지붕을 넘어 다른 건물로 도주하자 수백 명의 무사와 관병들이 두 사람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 뒤를 하나의 그림자가 따라간다.
잠시 후, 객잔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나온다. 무진 일행이다.
“저희들이 먼저 가겠습니다.”
태민을 선두로 태운과 곤일, 그리고 자미가 달려간다.
“이제 우리도 가볼까?“
동생들이 모두 시야에서 사라지자 무진은 반대 방향을 몸을 돌린다.
“어딜 가시려고요?”
“제1로군의 본부에 갈 생각이오.”
“거긴 왜요? 기습하시려는 거예요?”
“정확하게 말하면 암살이지요.”
아미파 장문인인 자혜의 물음에 호란이 설명한다.
‘으음! 파격적이고 거침이 없다. 추적당하는 입장에서 역습이라니? 누구도 이런 생각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성공 가능성이 높다.’
자혜는 무진의 판단력에 혀를 내두른다.
묵사회의 금곡 분타.
정문에 붙어 있는 현판에는 ‘금곡산장’이라고 적혀 있다. 말이 산장이지 엄청나게 큰 장원이다. 담벼락 둘레만 해도 십 리는 족히 됨직하다.
우르르르르.....!
“이게 무슨 소리지?”
“글쎄? 소떼가 지나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정문을 지키는 두 명의 위사는 멀리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한밤중에 무슨 소떼야?”
“그럼 사람 발자국 소리겠니? 어..어라! 사...사람이다.”
“뭐..뭐야? 설마 여기로 오는 건 아니겠지?”
“빠..빨리 안에 연락해라. 아니, 마..막아라!”
정말로 어둠 속에서 움직임은 사람이 분명하다. 그것도 수백 명, 아니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미쳤냐? 저걸 어떻게 막아? 들어와. 어서!”
위사들은 황급히 장원 안으로 몸을 숨기고 문을 꽁꽁 닫는다.
“누군가가 쫓기는 것 같은데.... 우..우아! 대체 무슨 일인데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쫓아오는 거야? 분타주께 보고는 했니?”
“예. 근데 알고 있다고 신경 끊으라고 했다는 데요?”
“뭐라고? 그러다가 저들이 쳐들어오면 어쩌려고? 으잉? 여기가 아니었나?”
정면으로 달려오던 자들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옆으로 지나간다.
“씨발! 괜히 걱정했잖아?”
“조장! 그게 아닌 것 같은 데요?”
“뭐가?”
“저기로 가면 뭐가 나오는지 모르세요?”
“저기가 어딘데? 흐이! 크..큰일이다. 어서 분타주께 연락하라니까! 아니, 당장 모시고 와. 어서!”
조장이 뒤늦게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소리친다. 하지만 뒤쪽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랄하네. 내가 말했지. 호들갑 떨지 말라고.”
“부..분타주! 큰일 났습니다. 수백 명, 아니 천 명이 넘는 자들이 저기로 갔습니다. 저기.... 흑마정이 있는 곳으로... 아악!”
분타주의 주먹이 조장의 턱을 날려버린다.
“이 새끼야!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내가 말했지? 흑마정(黑魔井)의 흑자도 꺼내지 말라고.”
“하지만 잘못되면 묵사회는 물론이고, 무림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말란 말이다. 너 아까 내가 상황 설명할 때 어디서 뭐했어?”
“그 땐 뒷간에 가느라고... 크악!”
조장은 이번에는 거시기에 발로 맞고 그대로 주저앉는다.
“야! 나중에 일이 마무리 되면 이 새끼도 흑마정에 던져버려라. 에이!”
분타주는 짜증을 내며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하지만 그는 안으로 들어가는 척하더니 옆으로 빠져나와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라진 곳으로 달려간다. 뒤이어 위사들도 장원 안으로 모습을 감춘다.
이곳은 묵사회의 분타에서 약 십 리 정도 떨어진 거대한 폐 사찰. 금곡지역 사람들도 금기시 하는 곳이다. 그래서 일 년이 지나도 찾는 사람이 없다. 관병들이 안전상의 문제로 조사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동네 개들도 보이지 않는다. 근데 지금은 천 명이 넘는 무림 고수들이 이곳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다.
“분명히 여기로 들어갔는데 어떻게 된 거야?”
“대주! 느낌이 안 좋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어서 처리하고 빠지자.”
태양장의 무사들은 신속하게 움직인다. 근데 그들이 한 발 더 안쪽으로 이동하는 순간 안쪽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온다.
콰콰콰쾅쾅!
밤중이라 더욱 크게 울리는 데다 지진처럼 바닥까지 흔들린다.
“대주, 세심각입니다. 뭔가 발견한 것 같습니다.”
아마 세심각의 무사들이 먼저 들어간 모양이다.
“좋다. 신속하게 움직이자.”
“예!”
태양장의 무사들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달려간다. 이들뿐만 아니라 제1로군의 관병들과 동창의 무사들도 같은 방향으로 진입한다.
한편 여긴 장원 뒤쪽의 작은 야산과 인접한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세심각의 무사를 위시한 제1로군의 관병들까지 다 모였다. 그들은 손에 횃불을 하나씩 들고 있다. 전면에는 거대한 석벽이 있고, 그 앞에 집채 만 한 바위들이 흩어져 있다. 바위들로 석벽을 때린 모양이다.
“엄청납니다. 이 정도면 황실비고(皇室祕庫)도 열렸을 겁니다.”
“대체 저 안에 뭐가 숨겨져 있기에 입구를 이렇게 막은 걸까?”
“그보다 놈들이 저기로 들어간 건 분명하냐?”
“그건 여러 사람이 봤다니까 사실일 겁니다.”
“좋다. 계속 공략해라.”
“예!”
명령이 떨어지자 세심각의 초능력자들은 석벽 앞에 횡으로 한 줄로 서서 정신을 집중한다.
우르르르릉!
이번에는 바위를 사용하지 않는다. 염력을 석벽에 집중해서 벽체를 흔드는 것이다.
끄끄끄끄끄! 끼이이익...!
“균열이 생겼다!”
“금이 갔다. 금이!”
“야호! 조금만 더 하면 되겠다. 힘을 쓰라! 힘을!”
석벽이 흔들리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석벽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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