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30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30
“대형! 위험합니다.”
태운은 양손으로 무진과 호란을 잡더니 거목의 뒤로 피하고, 곤일은 미홍의 허리를 안고 오히려 앞으로 몸을 날린다.
“타핫!”
건물 잔해들이 하나 둘씩 바닥에 떨어지자 그걸 딛고 공중으로 뛰어오른다. 연이에 날아오는 나무와 흙더미 위로 몸을 날려서 순식간에 거목의 꼭대기로 올라간다.
우두두두둑!
세심각의 초능력자들도 무시무시하다. 이십여 명이 한꺼번에 염력을 모아 집중하자 높이가 십여 장에 가까운 거목이 뿌리 채 흔들린다. 이 상태라면 금방 거목이 뽑혀 날아갈 것이다. 이후 태양장의 무사들이 화살을 쏜다면 방패막이 사라진 무진 일행은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삐이이이익!
거목의 꼭대기에서 호각소리가 들려온다. 곤일의 작품이다. 그러자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온다. 태양장의 무사들이 쏜 것보다 배는 더 많아 보인다.
“크아악!”
“꺄악!”
“내..내 다리!”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세심각의 초능력자들도 더 이상 염력을 사용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느라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여긴 황제폐하가 계신 황실이다! 감히 어떤 놈들이 폐하의 허락도 없이 무력을 사용한단 말이냐? 단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처단하라!”
목소리가 들리자 처음보다 더 많은 화살이 날아온다.
“무..물러나라!”
어쩔 수 없이 태양장과 세심각 쪽에서 후퇴 명령을 내린다.
“우리도 물러난다.”
그들이 사라지는 걸 보면서 무진이 내린 명령이다.
“오라버니! 민이가 오지 않았어요. 오..오라버니!”
미홍이 태민 문제로 무진을 찾다가 기겁한다. 그가 바닥에 쓰러져 인사불성이기 때문이다.
“걱정 마세요. 민이는 심부름을 보냈어요.”
호란이 대신 설명한다.
“아..아가씨!”
“괜찮아요. 팔을 잃으면서 몸이 균형이 무너져 기운이 뒤틀린 것뿐이에요. 운아! 빨리 움직여야겠다.”
“예, 누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일아, 네가 대형을 모셔라.”
“예.”
곤일이 무진을 업자 일행은 신속하게 현장을 빠져나간다.
잠시 후. 양쪽이 모두 사라지자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무진 일행이 무사히 빠져나가는 걸 보고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그 선두에 세 사람이 있다. 대양왕과 천의왕, 그리고 태민이다.
“다행일세.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네.”
“왕야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큰 낭패를 볼 뻔 했습니다. 대형을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태민이 두 왕야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한다.
“우리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니 다행일세. 그보다 전하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겠네.”
대양왕이다. 그는 태민의 연락을 받고 천의왕과 함께 달려왔다.
“근데 스스로 팔을 잘랐다는 게 무슨 말인가?”
천의왕의 물음에 대양왕도 귀를 쫑긋 세운다.
“얘기가 길지만 간단히 설명하면 대형을 배신한 동생분들이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대형께선 직접 그분들을 편안하게 모셨습니다. 그분들의 뜻이었습니다. 그 죄책감에 스스로 팔을 자르신 겁니다.”
“으음!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그 깊은 슬픔이 내 가슴을 울리는 듯하네.”
“당연히 현 정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겠지?”
“그렇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들어보시죠?”
“전하께?”
“예. 두 분을 보시면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군.”
“어서 가보시죠.”
“그럼세.”
두 왕야가 발걸음을 재촉하자 뒤따르는 태민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 ..그냥 누워계십시오.”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대양왕과 천의왕은 황급히 달려가서 무진을 부축한다.
“괜찮소. 이것 보시오. 멀쩡하잖소?”
무진은 침대에서 내려와 팔과 다리를 움직여본다. 다만 오른팔이 들어 있어야 할 곳에 옷자락만 펄럭일 뿐이다. 두 왕야는 그걸 보곤 눈물을 글썽인다.
“저희들이 무능하여 전하를 이렇게 밖에 모시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두 사람은 무진을 상전 대하듯이 한다. 아마 태민으로부터 무진의 신세내력에 대해서 들은 모양이다.
“쯧쯧, 민이가 쓸데없는 소릴 한 모양이구나.”
“당연히 저희들이 알아야죠. 부황께선 생전에 제게 전설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선황이?”
“예. 제가 황위를 물려주자 안타까워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말씀을 하셨소?”
선황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천의왕이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황실에는 황실수호대인 주작단이란 조직이 있으며, 그 단주의 가장 큰 역할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라고. 제게 그 말씀만 하셨네.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 근데 요즘은 그 말씀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어.”
천의왕의 물음에 대양왕이 설명한다.
“그 누군가가 바로 전하란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제가 폐하께 명을 받았고, 오라버니가 바로 그 분 이십니다.”
미홍이 솔직하게 고백한다.
“허허허허! 내 예상이 맞았구나.”
“홍이가 주작단주란 걸 형님은 아셨소? 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잘 생각해봐라. 홍이는 부황께서 붕어하실 때도 옆을 지켰다. 일개 나인일 뿐인데 말이다. 그뿐이냐? 부황께서 우리에게 내린 열 가지 유언 중에 마지막이 무엇이냐?”
“으음! ‘홍이가 황실에서 생을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하라.’ 였지요.”
“내가 열 살 즈음 이었을 거야. 부황의 일기를 몰래 본 적이 있었다.”
“나도 본 적이 있소.”
“너도?”
“예.”
“이상한 대목을 못 봤니?”
“두 군데가 이상했습니다. 하나는 ‘황실에 나도 모르는 암운이 흐르고 있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아이가 내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외롭고, 힘들지 않았을 것을... 후회스럽구나.’란 것이었어요.”
“흐..흐흐흑! 폐하!”
천의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홍은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린다.
“험! 험! 내가 자네들이 말하는 그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황실에 암운이 드리운 건 사실일세. 자칫 잘못하면 황실은 물론이고, 중원 전체가 지옥으로 변하게 될 수 있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무진이 끼어든다.
“으음!”
“휴우!”
무진의 말에 두 왕야는 얼굴이 어두워진다.
“자네들은 홍이와 함께 황실을 책임져야 할 걸세.”
“우리 힘만으로 가능할까요?”
“쉽진 않겠지. 그놈은 200년 이상을 준비했으니까. 아니, 어쩌면 훨씬 전부터 계획을 세웠을지도 몰라. 단순한 세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집요함과 인내심, 그리고 철저함이 무서운 거라네. 세력만으로 치면 우리도 그에 못지않네. 하지만 우린 아직 그놈의 존재도 모르고, 그러다 보니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는 실정일세.”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가지 방법밖에 없네.”
“그게 뭡니까?”
“놈들의 외곽조직을 철저히 무너뜨리는 걸세.”
“그렇게 해서 놈을 끌어내려는 것입니까?”
“그렇지. 놈도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진 않을 거야. 대신 우린 철저히 힘을 숨겨야 하네. 그래서 놈이 오판하도록 만들어야 이길 수 있네.”
“그래서 일부러 이번 일을 꾸미신 겁니까?”
무진이 기절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미안하이. 고의는 아니었네.”
“아닙니다. 전하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단 소리가 놈의 귀에 들어가면 좀 더 노골적으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라고 한 건데 잘 될지 모르겠네. 그보다 자네들이 생각하는 황실의 세력분포와 문제점을 듣고 싶네.”
“예! 잘 아시겠지만 황실은 폐하와 승상, 그리고 중원대장군에 의해 굴러가고 있습니다. 폐하는 동창과 금의위로 국정을 장악하고, 행정은 승상이 맡고, 국방은 병부시랑과 중원대장군이 책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창은 이미 놈들의 수중에 떨어졌고, 간신히 금의위만 폐하께서 장악하고 있습니다. 승상은 중도론자로 항상 대세에 편승해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합니다. 마지막으로 군부인데.... 병부시랑은 이미 놈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최근에 태양장과 손을 잡은 걸 확인했습니다.”
“중원대장군부는?”
“아직 명확하진 않지만 그쪽으로 기울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흠! 그럼 놈들은 누굴 내세워 황실을 장악하는가?”
“영춘왕입니다.”
“결국 그 자인가?”
무진도 짐작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영춘왕은 황족이 아니면서도 선황으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부황의 북방정책에 가장 큰 역할을 했으니까요. 그 때문에 중원 영토가 3할이나 커졌으니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황족들도 대부분 이방인인 그를 지지할 정도니까요.”
이때 전서구가 날아든다. 주작단에서 보낸 것이다. 미홍이 내용을 확인하고는 무진에게 건넨다.
< 귀비 자결. 황제, 극비에 부치도록 지시. >
내용은 간단하다. 하지만 그 뜻은 간단하지가 않다.
“놈들은 이미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다.”
“역시 꼬리 자르기군요.”
“우리한테 불리한 건 아니다. 놈들은 당분간 양면작전을 벌일 거야.”
“양면작전? 제법 그럴싸하게 들립니다.”
“겉으론 조심하겠지만 물밑에선 노골적으로 세력을 규합하겠지.”
“가장 큰 걸림돌인 전하의 건강이 나빠졌다고 판단해서겠죠?”
“하지만 오래가진 못할 거야. 그 전에 놈들의 조직을 최대한 밝혀내야 해.”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반격은 언제쯤 하실 생각이십니까?”
“놈들의 실체가 드러나면 해야지. 그건 그렇고 한 가지 은밀하게 해야 할 일이 있네.”
무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말씀하시지요.”
“황제와 주변을 면밀히 조사하게.”
“폐하를 요?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으음! 알겠습니다.”
“저희도 생각한 게 있습니다. 처음부터 세심하게 조사하겠습니다.”
대양왕과 천의왕은 순순히 받아들인다. 반면 미홍은 의아한 눈빛으로 무진을 쳐다본다. 물론 그녀도 금방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미홍이 동의하자 무진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딜 가십니까?”
“여긴 자네들이 있으니까 내 자리로 돌아가야지.”
“오랜만에 오셨는데 그런 모습으로 가시게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
대양왕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무진의 팔이 잘린 것을 말한다.
“하하하! 내가 자초한 일인데 누굴 탓하겠나?”
“세외오천은 시간을 벌었고, 황실은 우리가 맡았으니 무림으로 돌아가시겠군요.”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난 천의왕이 금방 상황판단을 한다.
“동생들에게 맡긴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네.”
“언젠가 아가씨와 형제분들을 다 함께 모실 기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자네들의 후의는 잊지 않겠네.”
“살펴 가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이렇게 무진의 황실행보는 막을 내린다.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