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24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24
“근데 전하, 황세손께선 무사하십니다. 살해 용의자란 말은 좀....”
“아..알았어. 그럼 암살 용의자라고 하지 뭐. 그럼 됐지?”
“예. 정확하진 않지만 그런대로.”
“야, 씨발! 대체 뭐가 그렇게 복잡해? 나 오늘 이것들을 완전히 골로 보내버릴 거야.”
“아니, 대체 누가 우리 전하를 화나게 만든 거야? 전하, 그래도 이들은 세외오천의 지도자들이에요. 너무 거칠게 다루진 마세요.”
“뭐야? 너 또 날 가르치려는 거지? 씨발, 너 그 꼰대 정신을 버려라. 세상에 지 주인을 가르치려는 부하가 어딨냐?”
“죄..죄송합니다. 버릇이 돼서...”
무진은 완전히 횡설수설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세외오천의 대표자들을 유심히 살핀다.
“잠깐! 잠깐!”
갑자기 무진이 손을 들자 방안의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아까 무슨 말을 하다가 삼천포로 빠졌지? 그래. 천년신궁과 대뢰음사가 화해를 했느냐 하는 문제에서 말이 꼬였지. 대답도 신통찮았고 말이야. 뭐라? 화해는 했는데 깔끔하진 않다고? 야, 부궁주!”
무진은 시선을 천년신궁의 부궁주에게로 향한다.
“예, 전하.”
“요즘 물총새는 뭐해? 대체 뭐하기에 저딴 대뢰음사 하나도 처리 못하는 거야? 내가 만든 비급은 익힌 거야 안 익힌 거야? 아니면 못 익힌 거야?”
“아, 예. 안 그래도 궁주께서 대협을 만나면 백 배 사죄 말씀을 드리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지랄하네. 큰 소리 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백 배 사죄한다고? 하여튼 요즘 것들을 깡다구도 없고, 배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뢰라곤 눈곱만큼도 없어요. 가서 물총새한테 전해라. 올 해 안으로 대뢰음사를 못 조지면 내 손에 죽는다고. 알았냐?”
“예. 예! 알겠사옵니다.”
“북해빙궁도 마찬가지야.”
“예에?”
부궁주의 눈빛은 무슨 말이냐고 되묻고 있다.
“후후후, 할망구. 잔대가리 굴리지 마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니들이 지금 빙정을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가서 전해라. 고작 그 딴 거 믿고 설치다간 골로 가는 수가 있다고. 빙정 같은 건 열 개, 백 개가 있어도 세외오천은 통일시키지 못한다고. 당연히 이유가 궁금하겠지?”
“예. 전하. 하명해 주십시오.”
“하명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너도 지난 번 빙궁대제전 회합에서 세외오천 통일과 중원 무림 정복을 외쳤다며?”
“예에? 저..전하! 그 말씀은 좀...”
“미친 년! 네 년이 숨긴다고 여기 있는 놈들이 모를 줄 아니? 니들이 말해봐. 빙궁이 야욕을 숨기고 있단 걸 정말 몰라? 모르면 멍청한 것들이지.”
“흠! 흠!”
“저..정말 알고 있었소?”
북해빙궁의 부궁주 천려는 세외오천의 대표자들이 자기 눈을 외면하자 기겁한다. 자신들이 특급비밀이라며 조직의 명운을 걸고 지켜온 비밀을 적들이 모두 알고 있으니 얼마나 허탈하고 무서울까?
“이제 알겠니? 빙정이란 놈도 이젠 그다지 신비롭지도 않지만, 빙궁이 세외오천 통일을 결정하는 순간 니들은 나머지 사세의 연합세력에 의해서 초토화가 된다. 그건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 통일을 했다고 치자 그럼 중원 무림이 가만 둘 것 같니? 설사 중원무림은 봐주고 싶어도 황실에서 니들을 치기 위해서 수십만 대군을 보낼 거다. 세상에 자기 집 주위에 독사를 키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래도 못 알아듣겠냐?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뭐. 하긴 그러니까 수백 년 전부터 계속해서 엉뚱한 놈에게 이용당하고만 있지.”
“.....”
무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섯 사람은 그를 노려본다.
“왜? 내 말이 틀렸어? 아니면 엉뚱한 놈이라는 말 때문이냐? 그 놈이 무서워서 찍소리도 못하는 것들이 꼬나보면 어쩔 건데? 한 번 해보자는 거야?”
콰콰콰콰쾅!
무진이 단지 일어났을 뿐인데 밀실 전체가 터지듯이 흔들린다. 세외오천의 대표자들이 뒤로 날아가 바닥을 뒹군 건 당연한 일이다.
“에라이, 썩을 놈들!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 건방 떨었어? 그것까진 좋다 이거야. 실력이 없으면 자존심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니냐고!”
우르르르... 콰콰쾅쾅!
이번엔 화가 나서 손을 들었을 뿐인데, 밀실의 기운이 따라 움직인 것이다.
“정랑! 그만 하세요.”
만약 호란이 말리지 않았으면 다섯 사람은 모두 중상을 입었을 거다.
“저러고도 지 동네에 가면 두목 노릇하겠지. 뒷골목 깡패새끼들처럼. 퇫!”
무진은 노골적으로 대표자들을 모욕한다. 다분히 의도적이다. 문제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느냐 하는 것이다. 한편 세외오천의 대표자들은 얼마나 놀랐던지 사내들은 내상을 돌볼 생각도 않고, 여인들은 흩어진 옷매무새를 만질 생각도 못하고 있다.
‘부궁주, 대체 저 자는 누구야?’
북해빙궁의 부궁주 천려는 천년신궁의 부궁주 우화선에게 전음을 보낸다. 아까 아는 척을 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궁주님과 인연이 있었던 것 밖에는...’
‘나이는 겨우 이십대 중, 후반인 것 같은데 세상에 어떻게 저런 무공을 지닐 수가 있지? 대체 무슨 무공이야?’
‘부궁주님이 모르는 걸 제가 어찌 알겠어요?’
두 사람이 얘기하는 사이 사내들도 서로 전음을 보내기에 여념이 없다.
‘서생처럼 생겼는데 어디서 저렇게 무시무시한 기운이 나오지?’
‘그러게 말이오. 그렇다고 제대로 무공을 펼친 것도 아니잖소?’
‘그냥 일어서거나 팔을 흔들었을 뿐이오.’
‘저런 자가 있는 한 세외오천이 중원을 넘보는 건 어려울 것 같소.’
‘으음!’
“이제 다 떠들었냐?”
무진은 마치 이들의 얘기를 다 들은 것처럼 말한다. 순간 세외오천의 대표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대꾸도 못한다. 이 정도면 이들은 무진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무진이 의도적으로 무공을 펼친 이유다.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겠다. 세외오천은 더 이상 중원의 일에 끼어들지 마라. 만약!”
콰아아아앙!
단지 목소를 약간 높였을 뿐인데도 다섯 명의 대표자들의 몸이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
그들은 말도 못하고 눈만 멀뚱거리고 있다.
“만약 한 번만 더 중원의 일에 끼어들면 그땐 니들 다섯 가문은 영원히 지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돌아가서 똑바로 전해라. 알았어?”
“예!”
다섯 사람은 마치 한 명처럼 대답한다.
“그리고 이건 내가 준비한 거다. 5년만 봉문하고 익히면 절대 중원무림에게 쪽팔리진 않을 거야.”
무진이 말하는 사이 호란이 봇짐에서 다섯 권의 책자를 꺼내 한 권씩 나눠준다. 모두 같은 내용으로 표지엔 무진일기(無眞日記)라고 적혀 있다. 두껍진 않지만 워낙 글이 작고 촘촘하게 적혀 있어 상당히 많은 내용이다.
“이걸 모두 전하께서 직접 창안하신 겁니까?”
“내가 썼으니까 내 이름이 적혀 있지.”
“자..잠깐만 요.”
갑자기 혈곡의 부곡주인 허충이 소리친다.
“부곡주 무슨 일이오?”
“이..이걸 보시오.”
허충은 책의 목록을 가리킨다.
“이게 왜요? 회초리로 참새 잡기. 몽둥이로 메뚜기 후리치기. 바람을 따라 잡는 법. 바위와 주먹 싸움. 돌멩이로 고기 잡기. 얼마나 재밌는 이름이오?”
“이것 보시오. 대장로! 지금 장난칠 분위기요? 그 옆에 적혀 있는 설명을 보란 말이오. 설명을!”
부곡주 허충은 버럭 화를 낸다.
“설명이라면.... 태극혜검을 보완해서 만든 검법, 다섯 수면 황룡십팔장을 무너뜨릴 수 있다. 일초살수의 암기술을 극복한 것임. 무당의 제운종보다 두 단계는 더 빠른 신법이다. 아..아니 지금 이걸 믿으란 말입니까?”
“아니면 내가 장난으로 적은 것 같니?”
“그..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에 나와 있는 것들은 모두 중원제일의 무공인데 그걸 뛰어넘는 무공이란 걸 어떻게 믿습니까?”
“이 자식 이거 정말 사람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네. 오냐. ‘바위와 주먹 싸움’을 보여주마. 직접 확인하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보자.”
무진은 그냥 주먹을 들어서 한쪽 벽면을 향해 휘두른다. 준비 과정도 없이 그냥 허공에서 주먹을 앞으로 뻗은 것이다. 근데....
콰콰콰쾅! 우르르르르...!
분명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소리는 물론이고, 기운의 변화도 없었다. 그런데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한쪽 벽면 전체가 완전히 날아가 버린다.
“이..이럴 수가?”
이건 다섯 대표자가 아니라 지금껏 잠자코 있던 미홍의 목소리다.
“벼..벽의 두께가 내 키보다 더 두껍소이다.”
“요즘 대뢰음사에는 거인들만 사는 모양이오.”
벽의 두께는 거짓말 좀 보태서 보통 사람 키의 두 배는 될 것 같다. 아마 밀실이라 그렇게 만든 모양이다.
“이것도 부족하면 다른 놈을 보여주지 뭐.”
“아..아닙니다. 아까도 책자의 내용을 못 믿었다기보다 믿기 어려운 내용이라 그랬던 겁니다. 사죄드립니다.”
대뢰음사의 대장로 간지즈는 허리를 숙여 용서를 구한다.
“그건 됐고.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또 다시 중원의 일에 끼어들면 그 땐....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그게 니들이 원하는 거라면 나 또한 살벌하게 상대해주마.”
“아닙니다. 저희도 염치가 있지 이런 선물을 받고 어떻게 배신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보다 이런 걸 저희한테 주면 전하께서 중원무림으로부터 배신자란 소릴 듣지 않겠습니까?”
“호호호! 부맹주, 감히 어떤 놈이 우리 전하께 그런 망발을 한단 말이오?”
옆에서 지켜보던 미홍이 끼어든다.
“입 달린 동물이니 못 할 것도 없지. 하여튼 그건 내가 해결할 테니까 니들이나 더 이상 힘이 약해서 엉뚱한 놈에게 당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세외오천은 전하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동시에 다시는 중원을 공격하지 않을 것을 세외오세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립니다.”
“그래. 한 번만 더 속는 셈치고 믿어보자.”
무진은 대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한다. 과거 세외오천의 책임자들이 자신에게 ‘다시는 중원을 넘보지 않는다’고 한 맹세를 지키지 못함을 꾸짖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뢰음사와 천년신궁의 구원(舊怨)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마라.”
“전하, 그건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천년신궁의 부궁주가 강하게 반대한다.
“이게 확!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어디서 건방지게 잘라먹고 지랄이야?”
“죄..죄송하옵니다.”
“대신 대뢰음사는 천년신궁이 따뜻한 곳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영지를 제공한다. 이 정도면 되겠느냐?”
“저..정말이옵니까?”
“야, 니들은 속고만 살았니? 사람이 말을 하면 믿어야 할 거 아니냐?”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