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91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91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태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뒷산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줄을 타고 내린다. 모두 절정의 고수들이다.
“대형! 놈들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냥 두면 개방이 위험해집니다.”
그들은 입구를 지키는 개방의 거지 세 명을 간단히 해치운 뒤 안으로 들어간다. 천하제일장의 사람들이 사라지자 개방의 문이 열린 상태였다. 순식간에 오백 명이 넘는 고수들이 안으로 사라진다. 근데 그들이 모두 들어가자 두 개의 돌문이 저절로 닫히며 건물을 폐쇄해버린다.
“대형!”
그걸 보고 태민이 무진을 찾는다.
“이제 알겠니?”
“예. 개방의 저력을 보는 것 같습니다.”
“후후후!”
한 동안 정적의 시간이 흐른다. 무진 일행은 숲에서 명상과 운기조식을 하고 있다. 한 시진 정도 지났을까?
“문이 열렸습니다.”
호법을 서던 태운의 목소리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래서 개방, 개방 하는 군요.”
호란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태민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사부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개방의 본부는 복마전이며, 기관이 발동하면 아무도 살아나오지 못한다고.”
“사형!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저기 봐요. 숨은 붙어 있습니다. 하하하!”
태운이 농을 한다. 개방 본부의 건물에서 여러 개의 석문이 열리면서 한꺼번에 열 대의 수레가 몰려나왔다. 그 위에는 태양장의 무사들이 널브러져 있다. 태운이 그걸 보며 한 말이다.
“가자!”
그걸 보곤 무진이 발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가시게요?”
“여기까지 왔는데 막내는 보고 가야지.”
“근데 왜 다른 곳으로 가세요?”
“막내는 벌써 빠져나간 모양이다.”
“아! 하긴 저런 곳에 비밀통로가 한, 두 개는 아니겠지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태운은 무진이 어딜 가려는지 아는 모양이다.
“대형! 오늘은 제대로 수련도 못했는데 신법을 한 번 펼쳐볼까요?”
“좋지. 대신 내기다.”
“그런 게 어딨어요? 정랑과 우리가 붙으면 보나마난데.”
“조건을 같이 만들면 되지.”
“어떻게 요?”
“난 자연무예를 펼치지 않고, 당신이나 애들은 사용하고. 어때?”
무진은 태민 사형제의 승부욕을 살짝 자극한다.
“우린 이제 막 자연무예를 배웠는데.....”
“좋아. 오늘은 자연무예 대신 내력을 사용해봐.”
“정말이죠?”
“호오! 어째 이길 자신이 있는 모양이오.”
“죽기 살기로 해보는 거죠 뭐.”
“대신 오늘은 상품을 좀 색다른 걸로 합시다.”
“어떤 걸로요?”
호란이 약간 불안해한다. 무진이 생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 사람 중 한 명만 날 이겨도 최근에 만든 무공을 가르쳐 주겠소.”
“정말요?”
“대형!”
태민 사형제는 깜짝 놀란다. 무진의 무공이라면 보나마나 고금제일의 무공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방 실망한다.
“그 동안 배운 것도 다 소화시키지 못하는데....”
“전 채 일 할도 못 익혔습니다.”
“쯧쯧, 그건 준비가 안 돼서 결혼을 못한다는 말과 같다. 하나가 됐든 열이 됐든 시간에 쫓기지 말고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그럼 결과물은 저절로 따라오는 법이지.”
“그럼... 좋습니다.”
“당연히 찬성이죠.”
태민 사형제는 무진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금방 얼굴이 밝아진다. 하지만 이번에는 호란이 냉랭하게 말한다.
“난 또 특별한 건 줄 알았더니 별 것도 아니네요.”
다소 실망한 표정이다.
“그럼 당신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시오.”
“호호호! 좋아요. 대신 어떤 걸 요구해도 들어줘야 해요. 알았죠?”
그녀는 생각한 것이 있는지 다짐을 받는다.
“좋소.”
“그럼 당신이 이기면 뭘 요구하실 거예요?”
“난 당신에게 요구할 생각이오.”
“저에게요?”
“그렇소. 그리고 당신도 내가 어떤 걸 요구해도 들어줘야 하오.”
“그래요. 그건 걱정 마세요. 근데 뭘 요구할 생각이세요?”
“당신 닮은 딸이 필요하오.”
“예에?”
“대..대형!”
“대형!”
호란이 놀란 것은 물론이고, 태민 사형제는 주위를 살피다 화들짝 놀라며 무진을 쳐다본다.
“왜? 내가 못할 말을 했소?”
“그..그건 아니지만..”
“대형! 누님이 놀라신 것 같습니다.”
“누님이 왜 놀라신 줄 아세요?”
“글쎄?”
“요즘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안 읽으시나 봐요.”
“필요할 때만 하려고 노력 중이다.”
“할 수 없이 제가 설명을 드려야겠네요.”
“뭔 말이냐?”
“누님은 두 가지 이유로 놀라신 겁니다.”
“두 가지?”
“예, 하나는 누님은 대형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오셨어요. 근데 그런 말씀하시니 놀란 겁니다.”
“으음!”
태운의 설명에 무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는 눈치다. 사실 말로는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했지만, 막상 아이를 갖는 데는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건 순전히 제 추측이지만 크게 틀리진 않을 겁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태민은 태운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눈치다.
“누님의 요구사항도 형님의 것과 같을 겁니다. 그래서 놀라신 거구요.”
“정말이오?”
“예...”
호란은 간신히 대답한다.
“미안하오. 그 동안 맘고생이 많았겠구려.”
“아니에요. 정랑의 말씀을 듣는 순간 봄 눈 녹듯이 다 사라졌어요.”
“다행이오.”
“근데 운이가 말한 것 중에 틀린 것도 있어요.”
“에잉? 운아, 니 누나가 다르단다.”
“그게 아니고요. 전 당신 닮은 아들이 필요해요.”
“그건 양보 못하오. 난 당신하고 똑 같이 생긴 딸을 원하오.”
“저도 안 돼요. 전 아들이 필요해요.”
“할 수 없군. 냉정하게 승부를 냅시다.”
두 사람은 승부욕에 불탄다. 동생들이 그걸 보며 놀려댄다.
“사형! 저런 땐 대형도 참 바보 같지?”
“그러게 말이다. 둘 다 낳으면 되지 선택은 왜 해?”
“으잉? 그런 수가 있었네.”
“나도 둘 정도는 충분히 낳을 수 있는데.”
호란은 말을 하면서 목덜미가 붉어진다.
“한 가지 문제가 있긴 해요.”
“문제?”
“예.”
“그게 뭔데?”
“대형 나이가 올해로 몇인 줄 아세요?”
“글쎄 그건 계산을 좀 해봐야 하는데... 대충 삼백에서 몇 살 정도 빠질 거야. 그게 왜?”
“아니에요. 사실 나이가 무슨 문제겠습니까? 오히려 남들은 부러워할 겁니다.”
“그럼 더 이상 문제는 없는 거지?”
“딱 한 가지 남긴 했는데...”
“또 있어?”
“예. 사실 조금 골치가 아픈 문제입니다.”
태운이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일초 놈만 아니면 된다. 가..가만. 일초 놈이 이 사실을 알면 가만 안 있을 텐데?”
“바로 그 문제입니다.”
“아이고! 일 년은 씹어댈 텐데, 어떡하지?”
“이젠 걱정을 안 하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걱정을 안 한다고? 그..그렇지. 흐흐흐, 그걸 알고 있는 한 놈은 내 손아귀에 놀아날 수밖에 없다.”
“뭔 비밀인데 일초 형님이 꼼짝을 못하는 겁니까?”
“그건 절대 비밀이다. 이 비밀은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드러나는 순간 내가 범인이 되는 거야. 절대 여자 문제라고 말 못한다.”
“예에?”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일초 형님은 연애할 시간이 없었잖습니까?”
“우리가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면?”
“정말입니까?”
“그래도 전 안 믿깁니다. 일초 형님이 연애라니요?”
“그건 니들이 잘 몰라서 그렇다. 일초 오라버니 같은 사내가 의외로 순정파란다. 한번 마음을 주면 쉽게 변하지 않지.”
“그럼 현재진행형이란 말씀입니까?”
“후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머지않아 알게 될 거다.”
“근데 대형, 우리 내기는 언제 합니까?”
“내기? 참, 그렇지. 후후후, 지금부터다!”
무진은 씨익! 웃더니 먼저 달리기 시작한다.
“저..정랑! 반칙이에요.”
“내기에 반칙이 어딨소? 무조건 이겨야지.”
“좋아요. 저녁 내기예요. 저녁!”
“대형!”
“누님! 우리도 있답니다.”
이렇게 무진을 선두로 일행은 전력을 다해서 달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밤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서민 동네 두 개와 시장을 하나 지나고, 작은 고개를 하나 넘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커다란 집들이 나타난다. 개봉의 부호들이 사는 동네에 들어선 것이다.
“대형! 불입니다.”
“어느 방향이냐?”
“제가 이쪽 지리를 잘 몰라서 그런데 천하제일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얼른 가보자.”
“예!”
이때부터 사람들이 많아져서 일행은 신법 대신 걸음을 빨리한다.
“예상대로입니다.”
화재가 난 곳은 천하제일장이 맞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었다.
“빨리 가자! 천하제일장엔 먹을 게 사방에 널려 있을 거야.”
“이런 기회는 십 년에 한 번 오기 힘들다. 빨리 와라! 빨리!”
“천하제일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다. 천하제일장이 화재로 인해서 사람들의 출입이 자유로울 테고, 그럼 들어가서 불을 꺼주고 양식을 얻어 오겠다는 심산이다.”
“개방의 작품이겠지요?”
“아닐 수도 있다.”
“그럴 만 한 이유가 있습니까?”
“시간상으로 맞지 않다.”
“하긴 저 정도 불을 내려면 시간이 꽤 필요할 텐데, 그러기엔 개방은 여유가 없었죠. 천하제일장이 올 걸 예상했다면 모를까?”
그때 무진이 멀리 보며 말을 한다.
“영감탱이 작품이야?”
그의 시선이 머문 곳에선 일단의 사람들이 걸어온다. 황금상단 단주 천호상 일행이다. 이번에는 대원장의 장주인 공청과 손녀 공령의 모습도 보인다.
“공자님!”
공령이 가장 먼저 달려온다. 하지만 방금 같이 있던 태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쯧쯧, 섭섭해서 어쩌나?”
“멀리 가셨나요?”
“아닙니다. 조금 전까지 같이 있었는데...”
태민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내가 심부름을 보냈다.”
“아니에요. 당분간은 일을 배우기로 했어요. 그때까진 참을래요.”
“금방 올 텐데?”
“정말이에요?”
순간 모든 시선이 공령에게 집중된다. 그만큼 목소리가 컸다. 그것만으로도 태운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죄...죄송해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녀는 무진과 조부의 뜻에 따라 대원장을 물려받기로 했다. 그래서 요즘 조부를 따라다니면서 일을 배우고 있다. 그걸 보고 천호상이 비꼰다.
“쯧쯧, 넌 참 좋겠다. 멋진 손녀사위를 얻게 돼서.”
“헐헐헐! 이놈아,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라. 늙어가지고 질투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냐?”
“질투?”
“아니면 대협한테 돌아가야 할 화가 나한테 돌아온 거냐?”
“영감탱이! 뭔 소리야?”
“아..아닙니다. 그냥 장난 친 겁니다.”
천호상은 손사래를 치며 극구 부인한다. 하지만 공청이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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