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5 장 타천(他天)으로…….
블랙이 선택을 종용한다. 진월은 이미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무력시위를 해서라도 갈 생각이다. 하지만 되도록 충돌은 피하고 싶다. 문제는 블랙을 과연 믿을 수 있느냐는 문제만 남아 있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것도…….”
“…….”
“난 많은 것을 놓아두고 왔다. 네가 말하는 그 회장이란 자, 현재의 내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더군. 머릿수로 누를 수 있는 자가 아니야.”
“잘 아시네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를 잡아넣어야만 한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돕겠다는 것인가?”
“당신은 저곳에서 힘을 얻기를 원하고 저는 석판을 찾기를 원하고, 둘 다 저곳을 가야하잖아요. 당신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도울 테니, 당신은 제가 석판을 얻을 수 있도록 도우면 되는 것이 제 조건이랍니다.”
“국가도 아닌 일개 개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그가 중요한 사람인가?”
“그도 중요하지만 제 기억을 찾기 위한 길이기도 하니까요. 정말 언약이 지켜지는지 알 수 있는 길은 그것밖에 없잖아요. 저도 이런 제 삶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것 정도만 말씀드리지요.”
“사람은 제각기 걸어가는 길이 다르니 뭐라 할 수도 없군.”
“그러면 이제 저와 한 팀이 될 각오가 되셨나요?”
“운에 맡겨 보지.”
“저 또한 그 운에 절 맡기는 거랍니다.”
블랙이 부하에게 시선을 보낸다. 부하는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균열을 막고 있는 철문을 개방한다. 진월이 철문이 개방되자 무작정 그쪽 방향을 향해 걸어간다. 블랙은 그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다.
“그렇게 그냥 가시려고요?”
“준비할 것이 있나?”
“저 말고 당신 말입니다.”
“기본적인 것은 다 있는데.”
탁탁! 진월의 그의 권총과 단검 집을 치며 보여준다. 점퍼 안에 잘 감추어져 있다.
“중무장을 하고 투입된 팀도 연락이 끊겼거든요. 더구나 당신들이 몇 번 부딪친 하이브리드 육체를 지닌 자들이 강화복까지 입고 갔지만요.”
“몇 명이나 투입되었지.”
“1차 4명, 2차 8명, 3차 16명, 4차 일개 소대 병력이 갔지요. 소대 병력 투입된 지 3일째예요. 여기가 텅텅 비어있는 이유지요.”
이제야 이 정도 시설에 경비 병력이 없는 이유가 명확히 밝혀진다.
“꽤 많이 보냈군. 연락은?”
“가자마자 연락이 두절되니 제가 가려고 하겠지요?”
“이상하군. 전파를 방해하는 뭔가가 있나?”
“아니요. 저희가 방출한 신호가 반사되어 돌아오기도 하니 문제는 전혀 없어요. 오히려 문제는 도착 잘해서 문제없다는 연락까지 오고 난 이후에 그들의 생체신호가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생체 신호는 무엇으로 파악하는 거지?”
“이걸로요.”
블랙의 손에는 얇은 내복 같은 옷이 들려 있다.
“뭐지?”
“강화복이에요.”
“신형인가?”
“네. 방탄 성능은 조금 떨어지지만 더 가볍고 활동이 훨씬 더 편하게 개조됐어요. 그것도 다 당신 때문이기도 하네요. 얇지만 특히 칼에 대한 방호력이 더 향상되었답니다. 특수 금속 섬유를 이용했기 때문이에요. 섬유의 결에는 자체적으로 개발한 힘을 전달하는 근섬유가 들어 있어요. 이렇게 얇은 근섬유 한 가닥이 1kg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으니 강화복을 입었을 때 발휘할 수 있는 힘의 증가는 상당히 고민해보셔야 할 겁니다.”
“교육을 하는 것을 보니 나보고 입으라는 뜻인가 보군.”
“이해력 빠르시네요. 아까의 바보 같은 모습과는 사뭇 다르시네.”
“…….”
진월은 대꾸도 하지 않는다. 이미 그는 블랙의 곁으로 다가와 있다. 두 번 묻지도 않고 블랙의 손에서 강화복을 뺏어들더니 옷부터 훌렁훌렁 벗기 시작한다.
블랙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다. 무슨 경고라도 했으면 준비라도 할 텐데 무방비로 두 눈이 테러를 당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보기 흉하면 테러인데 남자 몸이 아름답다 표현할 정도니 보는 재미가 있다. 팬티만 남긴 채 모조리 벗은 진월이 강화복을 주워 입는다.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을 보니 볼 만한가 보군.”
“뭐, 그런 대로…….”
뻔뻔하게 묻는 놈이나 답하는 놈이나 대단하다.
진월은 강화복을 착용한 후 몸을 이리저리 틀어본다. 활동하는데 전혀 불편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금속섬유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장갑은 분리형이라 장갑까지 착용해 본다. 팔목 부위에는 장갑과 연결하는 호크도 있다. 호크를 통해 전기 신호가 연결되는 것 같았다.
꽈악! 주먹을 쥐어 본다. 그렇지 않아도 넘치는 힘이 주체할 수 없이 가해진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정도로 강한 조력(助力)이 주어지니 하이브리드 육체를 지닌 자들이 강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전철 부장의 파괴력 또한 강화복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마음에 드시나요?”
“반납할 생각이 없어지는군.”
“살아남을 수 있다면 빼앗지도 못할 테니 가지세요.”
“여기 달린 센서가 생체신호를 보내는 장치인가?”
“네. 가져와봐.”
블랙의 부하가 패드를 건넨다. 진월의 전신 상태 및 심박수와 혈압이 표시되어 있다.
“우리보다 몇 년은 앞서가는 것 같군.”
“더 좋은 것도 많아요. 마음에 드시면 우리 쪽으로 오시던가?”
“쓸데없는 소리 하는군. 생체 신호가 사라졌다는 것은 옷을 벗었던지 죽었던지 둘 중 하나라는 말이군.”
“네. 그렇지요. 벗었다면 좋겠지만…….”
“준비 다 되었으면 가지.”
진월이 강화복 위로 본인의 옷을 다시 입으려 한다.
“자, 잠깐만요.”
“……왜? 더 보고 싶나?”
“…….”
블랙이 황당하다는 눈빛을 보낸다.
“그 위에 입는 방호복 있거든요. 이왕 갖춰 입는 것 확실히 입으시라고요.”
블랙의 말에 부하가 진월에게 맞을만한 방호복을 가져 온다. 상하의로 구분된 옷은 옷 자체로 방탄기능과 탄약 등을 수납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정말 좋은 것 많군. 역시 나라에서 만든 것보다 훨씬 낫군.”
“국가 정책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지요. 빼먹는 놈들이 많아서.”
“…….”
진월은 그저 침묵한다. 그가 입을 벌려봐야 해결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옷을 다 갖춰 입은 진월이 블랙을 본다.
“당신은 그대로 갈 건가?”
“제 옷은 당신 것보다 더 좋은 거니 걱정 마세요.”
“그랬군.”
검은 가죽 옷처럼 보이는 블랙의 옷은 그녀만을 위해 제작된 의상이었다. 바람을 다루고 높은 하늘까지 날 수 있으니 방탄 기능 뿐 아니라 보온 기능까지 갖춰진 특별 제작 의상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낙하산인가? 굳이…….”
“여기가 그다지 높지 않다고 그쪽도 그러란 법은 없어요.”
“그런가? 그렇다면 돌아올 때도 문제가 되지 않나?”
“저 도망갈 때 어떻게 가던가요?”
“날아서 갔군.”
“영리한 것 같으면서 좀…….”
“만약 당신이 저기서 죽게 되면?”
“그러니 되돌아오고 싶으면 절 꼭 지키셔야 한다는 거지요.”
“먼저 간 파견팀은?”
“자체 추력 엔진 하나씩 가지고 갔지요. 남은 것 있니?”
블랙이 들으란 듯이 부하에게 묻는다.
“없습니다.”
“있어도 없다고 하겠지.”
“참 판단하기 묘한 사람이에요. 바보인지 천재인지 말이에요.”
“원래 천재들한테는 약간 바보 같은 면도 있지.”
“뭐든 자기 좋은 쪽으로 해석하는 면이 있네요. 딴소리 그만하시고 이제 가시죠.”
두 사람이 평평한 단 위에 올라서자 엘리베이터처럼 서서히 상승을 시작한다. 균열에 가까이 다가서자 그 넓이를 실감하게 된다. 폭은 3미터가 넘고 길이는 10여 미터 정도는 된다. 오색 창연한 빛을 발하고 있어 계속 지켜보면 현기증이 일 것 같았다.
진월이 손을 내밀어 뻗어본다.
출렁! 느낌은 지나온 결계와 비슷했다. 진월이 손을 대자 오색 빛의 파동이 주변으로 퍼진다. 다시 손을 빼본다. 아무런 변화도 없다. 이번엔 머리를 쑥 집어넣어 본다. 그의 시야가 닿는 곳은 모두 빛의 무지개뿐이다. 기다란 원형 통로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블랙이 한마디 한다.
“무서워요?”
“…….”
어이없는 질문이다. 진월이 블랙의 눈을 뚫어져라 본다. 예쁜 눈이다. 참 낯이 익은 눈이기도 하다. 기억이 나지 않을 뿐이다.
진월의 입이 열린다.
“아무래도 날 수 있으니…….”
“네?”
탁! 진월의 우악스러운 손이 블랙의 어깨를 움켜쥔다.
“뭐, 뭐예요?”
휙! 출렁~
블랙의 몸이 균열 속으로 빨려든다. 아니 균열 속으로 던져졌다. 진월도 바로 뒤를 따라 균열 속으로 사라진다.
* * *
“꺄아아~”
블랙이 의도치 않게 던져져 빛의 통로를 통과하며 소리를 지른다. 진월에게 무섭냐고 물어봐 놓고 정작 본인이 더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턱! 뭔가 와서 부딪친 것 같았다. 블랙의 시선이 소리를 지르다가 곁을 본다. 진월이 어느새 따라 붙었다.
“야! 이~”
휙! 다시 던져졌다.
“새끼야아~”
블랙은 소리를 지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녀의 능력도 이 공간 내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는 중 저 멀리 밝게 빛나는 백색의 빛이 보인다. 빠른 속도 때문에 마치 빛이 그들을 잡아먹을 것처럼 느껴졌다.
화악~ 갑자기 밝아지는 빛 때문에 블랙은 잠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후우웅~ 갑자기 뺨을 때리는 바람이 느껴진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균열을 통과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반면 동공을 의지로 조정할 수 있는 진월은 이미 그들이 마주한 새로운 세상을 눈으로 보고 있다.
턱! 진월이 블랙의 어깨를 다시 잡는다. 블랙이 흠칫한다. 벌써 두 번이나 던져짐을 당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나, 나쁜 새끼!”
“언제는 오라버니라면서…….”
“시끄러워요. 지금 보이긴 하는 거예요?”
“높군.”
“얼마나요?”
“떨어지면 죽을 만큼.”
“이 인간이 정말…….”
대화 중 블랙의 시력도 점점 회복되고 있었다. 뿌연 그녀의 시야에 보이는 모습은 까마득히 멀리 있는 마을의 모습이다. 엄청난 바람과 기압이 변하는 상황에서도 둘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눈다. 능력자들이 맞긴 맞나 보다.
“도대체 얼마나 높은 거예요?”
“죽을 걱정 없는 여자가 무슨 걱정은 그리 하는지…….”
“…….”
파앙! 갑자기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난다. 그 압력에 진월의 몸이 옆으로 훅 밀리며 떨어져 내린다. 블랙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진월의 말처럼 하늘에 그냥 떠 있다. 그녀의 몸 주위로는 기의 막처럼 공기의 막이 뿌옇게 형성되어 있다. 떨어져 내리는 진월의 모습을 위에서 지켜보며 블랙이 소리친다.
“그냥, 확 낙하산을 잘라버릴까 보다.”
진월이 떨어져 내리는 중에도 몸을 뒤집는다. 낙하를 한 횟수를 셀 수 없다. 그만큼 베테랑이란 의미다. 목소리가 이미 닿을 수 없는 거리다. 진월의 손이 블랙을 향한다.
‘엿 먹어라’다.
블랙이 그 모습을 보고 부들부들 떤다.
“으악~! 죽여 버릴 거야!”
블랙의 목소리가 진월에게는 잘 들린다. 하지만 진월은 이미 수직으로 자유낙하를 하고 있다. 블랙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진다. 블랙 또한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진월의 뒤를 따른다.
그녀의 시선에 지상의 마을이 들어온다. 묘한 분위기의 마을이다. 현대화된 지구의 도시는 절대 아니다. 그녀의 파견팀이 도착했다면 모두 저 마을을 먼저 방문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때 지상에서는 하늘 위를 보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또 왔군.”
- 작가의말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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