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 장 나만 없으면…….
민서가 갑자기 충격을 받은 듯 화들짝 놀란다. 처음 진월을 보고 반가운 표정이 나타났지만 지금은 바닥을 보고 있다. 고개가 위 아래로 끄덕거려지는 것이 아직 완전한 지배를 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전철 부장이 중얼거린다.
“역시 정신력이 강한 아이군.”
“크크크!”
전철의 칭찬이 무색하게 여인의 입에서 나온 웃음이라기엔 기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꽤 애를 먹이는 년이군.”
“…….”
걸걸한 목소리가 민서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들려진 민서의 눈을 보라. 흰자위가 없이 온통 검은색이다. 이제껏 빙의한 자들의 모습과는 또 달랐다. 민서가 전철 부장을 돌아본다.
“풀어 줘!”
민서의 본래 목소리다. 그런데 어투는 다르다.
생긴 것만큼이나 목소리도 매력적인 사람이 민서다. 귀천이 빙의 된 현재, 그녀의 목소리는 묘한 떨림이 있다. 정말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을 느끼게 만든다. 마치 꿈속에서 서큐버스가 속삭이는 것 같은 매혹이 느껴진다.
전철이 움찔하더니 두 말 하지 않고 구속하고 있는 수갑을 풀어준다. 민서가 늘씬한 교구를 흔들며 앞으로 걸어 나온다. 그녀는 흰색의 편한 상의와 바지를 입고 있다. 이 시설 내에서 지급한 옷이다. 환자들의 환의와 비슷하지만 좀 더 산뜻하고 타이트한 느낌이 드는 옷이다. 편하게 입는 가벼운 옷이건만 민서의 육감적인 몸매 때문에 오히려 더 선정적으로 느껴진다. 브이자로 파진 목 부위는 민서의 뽀얗고 풍만한 가슴골을 그대로 보여준다. 가만히 걷는 것만으로도 남자들의 방심을 쥐고 흔들 정도다. 귀천이 빙의되자 민서가 본래 표출하지 않았던 매력이 나타나고 있었다.
민서의 뒤에 서 있던 전철 부장이 이마를 잡으며 고개를 흔든다.
“…….”
그는 이미 앞으로 걸어 나간 민서를 보고 의아해 한다. 자신의 손에 들린 수갑을 내려다본다. 풀어준 기억이 없는데 이미 풀어준 것이다. 허탈한 듯 피식 웃고 만다. 귀천이 빙의되면 분명 현재 능력 이상의 잠재 능력을 끌어낼 수 있다. 문제는 빙의된 자가 신체에 무리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폐인이 되는 경우도 많다.
“적당히 하시게.”
“호호, 누구 맘? 내 맘!”
전철 부장의 미간이 구겨진다. 말 자체가 현혹 그 자체다.
민서가 다시 진월 쪽을 본다.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이 셋밖에 없네.”
민서의 말처럼 진월, 목영호, 철형이란 조원 외에는 멀쩡히 서 있는 자가 없다. 한명은 죽었고 하나는 쓰러져 있어 생사를 아직 알 수 없다. 마명은 엉덩이에 비도가 박혔던 것 때문에도 아직 움직일 수 없다. 강희는 의식은 잃었지만 회복 중이다. 최탑은 움직이기도 힘든 팔을 들어 진월이 줬던 주사를 맞고 있다. 조원 중 둘은 전투 불능 상태로 쓰러져 있고 가장 양호한 자가 팔에 총을 맞은 자다. 그 또한 출혈이 심해 전투에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때 쉐인이 숫자 카운트에서 빠졌다고 투덜거린다.
“어! 왜 이러실까? 저는 사람이 아닌가요?”
“……?”
귀천이 빙의된 민서의 시선이 쉐인에게 향한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못 들으셨나?”
“적의 적은 동료?”
“…….”
쉐인이 잠깐 멈칫한다. 짧은 물음이지만 잠깐 멍해졌다.
“오호! 큰일 날 뻔 했습니다.”
“큰일 나지 그러셨어?”
“…….”
깜박이는 백열전구 같다. 잠깐 잠깐 기억이 끊기고 있다. 무섭고도 놀라운 능력이다.
‘오데뜨!’
쉐인의 뇌리에 다시 누군가 떠오른다. 쉐인이 정신을 차리려는 듯 머리를 약간 흔든다. 그 모습을 보던 민서가 피식 웃는다.
“왜 누군가 생각이 나는가 보지?”
“…….”
“이름이 뭐였더라?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지, 그렇지 않나?”
“…….”
“운명이란 지랄 맞은 것이야. 다른 공간, 다른 시간에 같은 모습의 여인이 살고 있다는 것은 말이야.”
“그만!”
쉐인이 소리친다.
우웅~
그의 몸을 중심으로 마나의 파동이 퍼진다. 귀천이 빙의한 민서가 펼치는 현혹을 깨부순다.
차차창~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유리가 깨지듯 공간이 파열되는 소리가 퍼진다. 전철 부장은 가만히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다. 귀천이 빙의된 민서가 몸을 약간 떨더니 한발 뒤로 무른다. 검은 눈동자뿐이지만 아름다움을 다 지울 수는 없다. 예쁜 얼굴이 슬쩍 구겨지더니 쉐인을 죽일 듯이 바라본다.
“비천한 놈이 능력 좀 있다고 넘볼 여자가 아니었지. 그렇지 않나?”
“…….”
민서의 눈에 검은 불꽃이 일어난다.
“이 여인은 그 누구의 여자도 될 수 없다. 이젠 내가 이 여자의 주인이 될 것이다.”
“크윽!”
“헉!”
몸이 약해진 순서대로 고통을 호소한다.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가만히 서 있던 목영호와 철형까지 무릎을 꿇고 귀를 막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전철 부장이 민서의 뒤로 다가왔다. 민서의 어깨를 꽉 움켜쥔다.
“정신 차리지.”
“…….”
귀천이 빙의된 민서가 전철 부장을 바라본다. 어깨의 통증으로 인해 제 정신이 돌아온 것 같다. 분명 쉐인을 보고 흥분했다. 둘 사이에는 과거 둘만의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 그건 둘이 주고받는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했다.
전철 부장이 흥분했던 귀천을 향해 주지를 준다.
“그리고 민서는 절대 네 여자가 될 수 없다. 네가 말하는 주인이 허락하지도 않으실 테고 말이야. 더구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가? 네 주인이 원하는 것은 회유가 되지 않을 시 어떻게 하라는 말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을 텐데?”
“크크, 그렇군.”
다시 거칠어진 음성의 민서가 진월 쪽을 보며 말한다.
“다 죽여주지.”
“도망가시지요?”
쉐인이 갑자기 진월을 보며 말한다. 그나마 제정신 가진 둘이었는데 그 중 하나도 지금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진월이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훅 사라진다.
“저 양반이…….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어.”
쉐인의 불평을 뒤로 하고 금빛 영사의 망토가 펼쳐진다. 진월의 몸은 너무 빠른 속도로 인해 보이지 않지만 늘어지는 금빛의 빛줄기는 선명하게 선을 그린다. 진월은 어떻게든 민서를 구해야 한다. 그녀가 그의 마음속에 자리를 하고 있건 그렇지 않건 민서는 그의 동료다. 그냥 동료가 아닌 마음이 더 가는 동료일 수도 있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면 민서에게서 잃어버린 여동생의 모습을 보는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그 어떤 때보다 광포해 보인다. 저 정도의 기세라면 귀천이란 존재를 한순간에 불살라 버릴 지도 모르겠다.
다가서는 진월의 모습을 보던 귀천이 빙의된 민서가 피식 웃는다.
그녀의 입이 열린다.
“지옥을 보여줄까?”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진다. 달리는 진월의 주변만 금빛으로 밝다. 진월조차 순간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잃는다. 그때 다시 목소리가 들린다.
“펄펄 끓는 기름지옥은 어때?”
뽀글~ 뽀글~
거대한 노란 웅덩이들이 생겨나며 공기방울들이 아래에서 올라온다.
“불이 잘 붙는 기름이지.”
화악~
주변에 온통 붉은 불길이 타오른다.
“으아아악~”
“뜨, 뜨거워. 살려줘. 크아아~”
진월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고통 소리를 여과 없이 듣는다. 정말 지옥불에 떨어진 자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리 같다. 그런데 그 소리가 바로 같이 온 동료들의 목소리다.
진월의 귀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민서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린다.
“다 당신 때문이에요. 모두 다 당신 때문에 죽게 될 거에요.”
“…….”
강한 진월조차 주저한다. 그 또한 망각에 빠진 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정말 모든 것이 그의 책임 같다. 민서의 목소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당신 같은 자는 살아 있을 필요가 없어. 엄마, 아빠, 여동생이 죽을 때 같이 죽어버렸어야 맞아. 왜 살아서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거지?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여기서 죽어버려.”
“으으윽!”
진월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그의 단검을 향해 움직인다.
톡!
단검집에 달린 호크가 풀린다. 단검을 들어 목으로 향한다. 그의 의지가 아니다.
“당신만 없으면 다른 사람들은 행복할거야.”
“나만 없으면…….”
“그러니…….”
“나만 없으면…….”
진월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진다. 단검을 든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어느 누가 되었건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은 힘들다. 더구나 자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그런 자가 목숨을 포기할 정도라면 정말 더 이상은 돌아갈 길이 없을 때이다. 진월이 지금 상황이 그랬다.
하얀 손이 붉은 불길을 뚫고 나타난다. 민서의 손이다.
“도와줄까요?”
“…….”
진월의 시선이 민서의 얼굴을 향한다. 무의식중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마치 고분고분한 아이 같다. 민서의 두 손이 진월의 손을 감싼다. 그리고 천천히 진월의 목을 향해 밀어 넣는다.
푸욱!
“…….”
신음소리조차 없다. 진월의 두 눈이 부릅떠진다. 순간 그의 의식이 돌아왔다. 신체에 가해지는 극도의 위험이 그의 정신을 돌아오게 만들었다. 식도까지 파고들었던 단검을 빼든다.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아무리 진월이 괴물 같은 회복력을 지녔다고 해도 이 정도의 상처라면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진월이 비틀거리며 눈앞에 있는 민서를 본다.
민서 또한 진월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눈동자를 덮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아, 아~ 흑흑으~ 안 돼~!”
민서가 상황을 파악하고 운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지금 방금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나가!”
민서가 소리친다. 그에 따라 민서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던 귀천의 검은 그림자가 몸 밖으로 훅 밀려났다가 다시 들어간다.
“나가…란… 말…….”
“클클… 윽!”
“나가…….”
민서의 목소리가 지쳐있다. 의식을 다시 되찾는데 드는 정신력의 소모가 엄청난가 보다.
그녀가 고개를 번쩍 쳐든다. 눈동자의 색은 검게 물들어 있다. 주변이 다시 암흑으로 바뀐다.
“가시 지옥은 어떨까?”
주춤거리며 쓰러지려하는 진월의 주변으로 굵은 나뭇가지들이 똬리를 튼다. 나무줄기들에서는 검의 날만큼 커다란 가시들이 쑥쑥 뻗어 나온다. 가시들이 진월의 몸 구석구석에 박힌다.
“헉!”
방탄복을 입고 있어도 푹푹 뚫고 몸을 관통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서의 입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나온다.
“네년이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나의 지배를 벗어날 수는 없다.”
“나……가…….”
민서의 눈동자가 검어졌다가 원상태로 회복되기를 반복한다. 그때마다 주변의 풍경도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한다. 민서의 눈에 진월의 모습이 보인다. 검은 칼날이 진월의 몸을 관통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미 진월의 몸은 피범벅이 되어 있다.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진다. 모든 것이 본인의 잘못이고 죄인 것만 같다. 가슴이 무너진다. 약해진 마음을 귀천이 파고든다. 민서의 눈동자가 다시금 검게 변한다.
“크크, 이제 모두 저 세상으로 보내주지.”
“난 나타났을 때부터 삐삐 껍데기야.”
쉐인의 투덜거리는 음성이 멀리서 들려온다.
- 작가의말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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