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죽었다 살아난 자.
블랙이 진월을 보며 미소 짓는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여유 있어 보인다. 그녀가 진월을 보며 묻는다.
“처음 보는 분이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당신 이름부터 말하면 대답해줄 수도 있다.”
“뭐, 이야기하기 싫으시면 내버려두시던가? 어차피 머지않아 알게 될 테니까요.”
“…….”
참을성 좋은 진월도 블랙의 비아냥거림에 눈썹이 꿈틀거린다. 하지만 현재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다.
“특이한 능력이군. 네가 잡고 있는 그 자는 살인사건 용의자다. 우리에게 좋게 넘겨줬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와 저 카멜레온 같은 자도 수사를 방해한 죄목으로 잡아들일 수밖에 없다.”
“뭘 그렇게 돌려서 말은 하고 그러시는지? 어차피 잡아들일 것 아니셨나요? 우리의 존재에 대해 약간은 눈치를 채고 계셨을 테니 말이에요. 접촉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네요. 그러고 보면 당신 능력이 좀 되는 것 같아요.”
“순순히 같이 가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진월은 부인하지 않는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 자백을 할리도 없는 자들이니 잡아들이면 그만이다. 진월이 발걸음을 옮긴다. 진월은 현재 그가 낼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개방한 상태다.
블랙의 아미가 구겨진다. 주변의 대기에 미세한 떨림이 전해지고 있다.
‘뭔가 불길해!’
불길함을 느끼자마자 그녀는 손을 내 뻗는다.
파앙!
대기를 압축하는 소리가 퍼진다. 진월을 향해 무형의 기운이 날아간다. 대기가 압축되며 충격파가 발생하는 구조의 공격이다.
화르르륵! 내뻗어진 진월의 팔에서 불길처럼 뭔가 일어난다.
특이한 빛이 난다. 영롱한 금색과 어두운 검은색이 섞여있다. 화염처럼 보이는데 얇은 천처럼 나부낀다.
진월의 신형이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간다. 블랙의 공격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격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향한다.
퍼억!
충격파가 진월의 몸을 강타한다. 강희를 날려 보냈던 공격이다.
움찔!
앞으로 내달리던 진월의 몸이 잠깐 주춤할 뿐이다. 충격이 약한 것이 절대 아니다. 진월의 앞섶이 충격의 여파로 찢어진 것이 그 증거다. 상대의 공격이 약한 것이 아니라 진월이 그만큼 강한 힘으로 버틴 것이다.
“…….”
블랙은 어이가 없다. 설마 맨 몸으로 부딪친 후 앞으로 전진 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은 거리는 불과 서너 걸음 정도다. 그 짧은 사이에 갈등이 이어진다. 구속해 놓은 의사를 놓아주고 제대로 한번 싸워 본다? 아니면 포기하고 몸을 뺀다? 이성은 냉정한 선택을 요구한다. 반면 본능은 위험을 알리고 있다.
그 사이 진월은 이미 거리를 좁혔다. 형언하기 힘든 기운이 어린 오른 주먹이 블랙의 안면을 향한다.
웅!
대기가 울고 있다. 공기를 자유롭게 다루는 블랙에게는 그 위력이 더 크게 다가선다.
피할 것인가? 맞설 것인가? 맞선다면? 위력은 엄청날 것으로 판단된다. 다가오던 속도, 진월의 체격과 알 수 없는 기운이 맺힌 주먹. 모든 것을 다 떠나서 보통 사람의 세 배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인 가속 에너지만도 무시하지 못할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헤비급 권투 선수 중 강한 펀치력을 지닌 자들은 1톤의 지프차를 1미터 높이에서 떨어뜨리는 충격을 선사하는 자들도 있다고 했다. 그 정도의 위력이면 해머로 때리는 위력이다. 자동차 강판 정도는 움푹 움푹 파일 정도로 만들어줄 수 있다.
블랙은 찰나에 고민을 끝낸다.
막는다면 공격을 할 수 없다. 방법은 피하는 것이다.
후웅!
고개를 옆으로 숙인 블랙의 귓가로 묵직한 바람소리가 들린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블랙의 두 눈이 진월의 눈을 바라본다. 그녀의 손은 이미 진월의 심장 부근을 향해 들려있다. 진월의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이미 공격 자세를 취한 것이다. 잠깐 사이 그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어려 있다. 하지만 블랙은 공격을 하려다 흠칫 놀란다. 진월의 눈에는 공격이 실패했을 때 드러나는 당혹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급해진다.
그녀의 손에 맺혀있던 날카로운 칼 같은 기운이 진월의 심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간다.
퍽!
진월의 심장 어림에 박혔다. 그런데 소리가 이상하게 둔탁했다.
터억!
블랙은 그녀의 뒷덜미가 잡히는 느낌과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여전히 시선은 진월의 얼굴에 향해있다. 왜 쓰러지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을 담은 시선이다. 해답은 바로 이어진다.
퍼억!
“헉!”
진월의 왼 주먹이 정말 깔끔하게 블랙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이상한 기운을 담은 오른 주먹은 완벽한 미끼였다. 블랙이 오른 주먹을 피하자마자 그녀의 뒷목을 잡고 구속한 이후 왼 주먹으로 정타를 먹인 것이다.
“우에엑~”
블랙은 먹은 것을 반납한다. 그만큼 충격이 큰 한방이다.
구속되어 있던 의사는 그 순간 해방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조건 도망이다. 둘의 싸움 때문에 어부지리로 도망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진월은 동료들의 위치를 파악한다. 백동의 방해로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블랙에게 마지막 한방을 선사하려던 진월은 도망치는 의사 때문에 잠깐 머뭇거린다. 그 사이 블랙은 먹은 것을 다 반납했는지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른다.
“으으~ 제기라~알~ 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웅크리고 있던 몸을 확 펼친다. 그녀의 몸에서는 폭풍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푸확~!
후우우웅~
그녀의 몸 주변으로 휘몰아치는 엄청난 기운에 진월조차 뒤로 훅 밀려난다.
블랙 주변 반경 10여 미터 안에 있는 모든 사물에 금이 가고 깨진다. 심지어 자동차의 경우 차체가 갈라지기까지 할 정도다.
바람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사방을 난도질 한다.
‘촤악’ ‘촤악’ 하는 소리가 귀를 어지럽힌다. 진월의 몸에도 여러 개의 혈선(血線)이 그려진다. 진월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다.
십여 초 정도 지났을까? 블랙은 힘에 부쳤는지 들어 올렸던 팔을 내린다. 그녀의 시선은 진월을 향해 있다가 주변을 본다. 주변의 풍광은 멀쩡한 것이 없을 정도다. 모든 것이 깨지고 갈라졌다. 블랙을 중심으로 동그란 원형의 공간이 생겨났을 정도다. 인간의 능력으로 만들었다고는 상상이 되지 않는 장면이다.
다시 시선을 돌려 진월을 본다. 블랙은 일순 멍해짐을 느낀다. 폭발적인 힘을 발휘했음에도 진월은 그다지 큰 상처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진월이 블랙을 향해 경고한다.
“이젠 너를 꼭 잡아야만 하겠군.”
“다, 당신은 정체가 뭐죠? 어떻게…….”
블랙의 의문에 대한 답은 진월의 쇄도다.
엄청난 속도로 다가서는 진월을 향해 블랙은 혼신의 힘을 다해 충격파를 날린다. 충격파를 날림과 동시에 블랙의 몸은 뒤를 향해 쏘아져 나간다. 마치 충격파를 추진력으로 사용한 것 같다.
다가가던 진월은 양손을 내밀어 충격파를 밀어낸다. 마치 형체가 있는 물건을 만지듯 밀어낸 충격파는 옆에 있는 물체에 부딪친다.
퍼엉!
우직~ 자동차의 차체는 엿가락처럼 휘어진다.
후두둑~ 큰 나무는 몸통을 떨며 이파리를 떨어뜨린다.
공격을 흩어버리는 그 잠깐의 사이에 블랙의 모습은 멀어져가고 있다.
블랙의 뒷모습을 보던 진월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곳엔 나체라 표현해도 적당할 뭔가가 누워있다. 사람의 형체가 분명한 그 뭔가는 정확하게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어 있다.
블랙은 진월의 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판단 하에 의사의 모습을 한 살인사건 용의자를 제거해버린 것이다. 더 속도를 높여 쫓는다면 못 따를 것도 없지만 의미 없는 짓이다. 분명 빠져나갈 준비가 확실히 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것은 방금 전에 주박술을 펼쳤던 자가 사라지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진월이 멈춰 서서 주변을 돌아본다.
“후우~!”
한숨만 나온다. 주변은 온통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그의 모습 또한 멀쩡하다 할 수 없다.
그 사이 민서를 비롯한 팀원들이 다가온다.
“우와~”
“누가 보면 전쟁이라도 난 줄 알겠네요.”
“괜찮으세요?”
민서 밖에 없다. 몰골을 보고 상태를 물어보는 것은 민서뿐이다.
몰골에 대해 말하니 다들 진월의 상태에 주목한다. 아주 가관이다. 윗도리는 걸레가 친구하자고 해도 황송해야 할 입장이다.
특이한 점이 보인다. 피다. 전신에 피칠을 한 듯 상당한 양의 피가 흘러내렸는데 상처는 전혀 없다. 당연히 이상하다. 민서가 묻는다.
“누구 피예요?”
“음.”
“음(?)이라는 사람도 있어요?”
민서는 놀리듯 말하며 주변을 돌아본다. 블랙이란 여자가 피를 흘렸다면 흔적이 남아야 한다. 그런 흔적은 없다. 다만 진월이 서있는 주변의 땅에만 피가 군데군데 떨어져 있다.
“팀장님 피예요?”
“음.”
“음이 팀장님 예명이에요? 왜 자꾸 ‘음음’ 거려요?”
“…….”
진월은 민서의 장난스런 추궁에 답은 못하고 슬쩍 웃고 만다. 본인의 피라는 수긍의 의미다. 더 이상 묻지 말아달아는 의미도 담겨있다.
민서는 블랙과의 뜻하지 않은 접촉으로 예상치 못한 진월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 강인한 신체는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하지만 탁월한 회복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번 일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렇게 소중한 비밀이시면 혼자 일하시지요? 불안해서 어떻게 우리하고 일하실까?”
“…….”
“팀장님! 진짜 괴물 아닌지 몰라?”
민서는 비밀 투성인 진월이 얄미워서 비아냥거린다. 진월은 그런 민서를 보며 피식 웃지만 왠지 그의 눈은 슬픈 빛을 띠고 있다.
그때 ‘삐뽀’ 거리며 경찰차들이 주변을 에워싼다. 누군가 신고를 한 모양이다. 굉음이 난무했으니 신고가 들어가지 않으면 그것이 비정상이다. 문제는 출동한 경찰이 현장을 접수하기도 전에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들과 흰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먼저 진월 일행에게 접근한다.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준비된 옷을 진월에게 건넨다. 진월이 옷을 걸치는 사이 검은 정장의 사내는 민서에게 뭔가를 말한다.
“뭐라고요? 말도 안…….”
검은 정장 사내의 말을 듣게 된 민서는 화들짝 놀란다. 진월은 정장 사내가 낮게 한 말을 모두 들었나 보다.
“병실에 있는 여자가 출산한 사내아이가 병원을 이탈했다?”
“네.”
“설명이 부족하다. 태어나자마자 움직일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 여자는 사실 임신한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하루 만에 증상을 보였고 출산했습니다. 태어난 아이는 불과 1~2분 사이에 성인의 크기로 자랐다고 합니다.”
정장 사내는 옆에 있던 다른 사내에게 손짓을 한다. 패드를 들고 있던 그는 진월의 앞에 CCTV에 잡힌 남자의 영상을 보여준다.
수술실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는 수술복을 입고 있다. 어딘가로 향하던 그 남자는 카메라를 보더니 올려다본다. 마치 보라는 듯 얼굴을 보여주는 그 자는 카메라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짓는다.
진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목이 잘린 채 검은 시체 백에 들어가는 자를 향한다.
“그 자의 행방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답니다.”
“…….”
허무한 상황이다. 죽은 줄 알았던 범인이 살아있다는 의미다. 블랙 일당 또한 눈앞에서 놓쳤다. 진월이 뭔가 명령을 내린다. 정장 사내들이 현장을 급하게 정리한다. 몇몇은 어딘가를 향해 흩어지는 모습도 보인다.
그 모습을 멀리서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블랙이다. 이미 사고 지역을 벗어난 줄 알았지만 조금 떨어진 건물 위에서 지켜보고 있다. 진월이 들은 것과 같은 보고를 조사팀으로부터 받은 것 같았다.
블랙은 혼자서 넋두리처럼 중얼거린다.
“미쳤지. 미쳤어. 몽마(夢魔)의 유전자로도 모자라서 형태변형자의 유전자까지 섞어놓았으니 쉽게 죽이기 힘들지. 한번 당했으니 이제 쉽게 꼬리를 잡기도 힘들 테고. 하아~!”
“저 자는 어땠지?”
블랙의 옆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예전에 고층빌딩의 어두운 사무실에서 본 남자다. 남자의 질문에 블랙은 주저 없이 뱉는다.
“강해요. 아주!”
“그 정도인가?”
“부장님 이후로 처음이었어요. 벽처럼 느껴진 사람은…….”
“벽이라…….”
말소리의 울림이 끝나기도 전에 강한 바람이 휘몰아친다. 블랙과 부장의 흔적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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