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 장 오늘 같은 날은 다시는 없다.
슥! 허공에 백색의 선이 그려졌다.
백색의 선을 중심으로 양쪽의 공간이 약간 틀어진다. 마치 퍼즐이 완벽하게 물리지 않고 약간 틀어진 것 같은 모습이다. 공간을 잘랐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릴 상황이다.
이연후 회장의 복부를 뚫을 듯 날아갔던 금빛 영사의 칼날도 둘로 분리되었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정적이 흐른다. 금빛 영사 칼날의 앞부분이 마치 벚꽃 잎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듯 흩어진다.
투둑~ 이연후 회장이 박혔던 벽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걸어 나온다.
“대단하군.”
진월에 대한 순수한 칭찬이다. 그런 그의 눈에는 아직도 백색 광망이 맺혀 있다.
이연후 회장의 손이 펼쳐진 채 앞으로 내밀어진다. 손바닥 전면에 룬으로 쓰인 소형 마법진이 형성된다. 이연후 회장이 조용히 말한다.
“속박!”
파앙! 마법진이 마치 총알처럼 쏘아져 나간다. 날아가던 마법진은 갈라진 공간을 뛰어넘는다. 크기 또한 점점 더 커진다. 손바닥만 했던 마법진이 진월의 신장보다 더 커졌다. 진월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피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연후 회장의 두 손이 같이 들린다.
“분열!”
스스슥! 날아가던 마법진이 여러 개로 나뉜다. 모양과 크기는 같다. 하지만 서로 다른 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마법진의 감옥이 만들어진다. 사각형으로 치면 직육면체 모양이다. 피할 곳은 없었다.
이연후 회장이 만든 마법진에는 각종 룬문자가 결합되어 있었다. 이동과 규율을 나타내는 라이도(raidho)를 중심으로 제한과 방어를 뜻하는 에이화즈(eihwaz), 억누름을 뜻하는 노씨즈(nauthiz) 등이 반복적으로 다른 룬어와 합쳐져 구속력을 발휘하게끔 되어 있었다. 분열을 통해 마법진이 갑자기 다른 곳에 여러 개 나타나는 것 또한 이동과 규율의 룬어인 라이도(raidho)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피할 곳이 없어진 진월이 손에 들린 칼날을 치켜든다. 다시금 검은 칼날 위에 금빛의 영사 칼날이 날을 세운다. 피할 곳이 없다면 뚫고 나가면 그만이다. 영력에 의해 떠 있는 상태라 지면을 박찰 때처럼 폭발적인 힘은 발휘할 수는 없다. 하지만 펼쳐진 검은 영사의 날개가 힘을 보탠다.
앞으로 튀어나간 진월이 힘차게 칼날을 휘두른다.
슈칵! 대기를 가르며 마법진과 부딪친다.
마법진은 면적은 넓지만 두께는 종이처럼 얇다. 자르지 못한다면 비웃음을 받을 일이다. 뚫지 못한다면 물에 젖은 종이 검이다.
사락~ 소리가 이상했다.
슥슥! 연이어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연후 회장의 마법진이 날아오는 칼날을 아무렇지도 않게 감쌌다. 진월이 칼날로 내리 친 마법진은 칼날 뿐 아니라 진월의 팔까지도 구속했다. 마치 랩이 그릇을 감싸듯 휘감아 버렸다. 이후 주변의 마법진도 모두 똑같이 진월의 몸을 구속한다.
마법진에 둘둘 말린 모습이 마치 마법진 고치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꾸두둑~ 진월을 감싼 마법진이 더욱 더 강하게 조여 온다.
진월의 영력은 더욱 더 폭발한다. 감싸려는 마법진과 밀어내려는 영사가 서로 싸움을 벌인다. 날카로운 영사의 칼날에 찢길 법도 하건만 어찌나 질긴지 마법진은 잘리지 않고 버틴다.
이연후 회장이 천천히 다가선다. 발이 바닥을 밟지도 않는다. 조금 떠서 이동을 한다. 다가선 이연후 회장의 거대한 낫이 진월의 목 뒤 부분에 걸쳐진다.
스으윽~ 낫이 서서히 목 뒤를 긁으며 앞으로 이동한다.
잘 벼려진 날카로운 낫은 그가 만든 마법진 뿐 아니라 진월의 영사까지 가른다. 가슴께에 다다른 거대한 낫에 힘이 들어간다.
푸욱!
“…….”
진월의 눈동자가 크게 만개한다. 이연후 회장의 낫날이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공교롭게도 민서에 의해 상처가 난 그 부위다. 약간 회복되기는 했지만 계속 힘을 썼기에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번쩍!
거대한 낫이 빛을 발한다. 낫은 어느새 바닥을 가르고 이연후 회장의 옆에 세워져 있었다.
털썩! 무언가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음이다.
이연후 회장의 앞에는 진월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미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영사는 허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있다. 가슴부터 복부까지는 사선으로 일직선의 혈선이 그려져 있다. 진월의 능력으로 봤을 때 죽을 만한 상처는 아니다. 진월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 자체가 의아했다.
이연후 회장이 진월을 향해 입을 연다.
“육체에 난 상처보다 영혼에 난 상처가 충격은 더 크지.”
“…….”
진월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이연후 회장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말을 하는 것 같다.
“죽여 버리는 것이 낫다.”
“아깝지 않은가?”
“그의 아비도 굴복하지 않았지 않나?”
“이놈에게는 아비에게 없는 그늘이 있어.”
“자네는 너무 물러. 그러다가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잖아.”
“하지만 그들이 날 어떻게 하지는 못했지?”
“그, 그렇긴 했지.”
거대한 낫이 진월에게 다시 향하다가 멈춘다. 주인의 의지가 진월을 죽이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낯선 음성의 소유자는 바로 거대한 낫이었다. 낫이 바로 의지를 지니고 있는 신물(神物)이었던 것이다.
이연후 회장의 시선이 민서를 향한다.
“저 아이가 내 손에 있으면 이놈도 내 그늘로 들어올지도 모르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네.”
“실망까지야……. 내 주변의 어둠이 더 깊어질 뿐이겠지.”
이연후 회장의 뒤에 형성된 어둠이 일렁인다. 마치 꿈틀거리는 모양새가 사람의 모습 같았다. 그 중 여인의 모습을 한 것 같은 형체가 이연후 회장을 잡기 위해 갑자기 튀어나온다. 물론 이연후 회장의 근처에 다가서지도 못한다. 이연후 회장의 얼굴에는 뭔지 모를 씁쓸함을 담은 미소가 머문다.
“가도록 하지.”
이연후 회장의 말에 용자룡을 비롯한 수하들이 움직인다. 이미 숨이 끊긴 제창협의 주검까지 모두 회수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진월의 팀원들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너무 큰 힘의 격차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금 움직인다면 죽음뿐이다. 아직 진월의 생사 또한 확인하지 못한 상황이기도 했다.
창민만이 진월의 모습을 보면서 두 주먹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고 있다. 이연후 회장이 모두 수습된 현장을 보다 창민을 본다. 그의 얼굴에 할아버지 같은 인자한 미소가 머문다. 도저히 악인으로 보기 힘든 온화해 보이는 미소다.
“잘 참고 있구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 지금은 현명한 것이다.”
“…….”
창민이 이를 악물고 있었다.
“심장이 상하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을 것이다. 죽는다면 내가 살려준 의미도 없겠지.”
“제, 젠장! 젠장! 젠장! 아아아악~”
창민이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와락! 마명이 그런 창민을 뒤에서 끌어안는다. 창민의 마음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강희가 쓰러졌고 진월도 쓰러졌다. 그런 상황이라 민서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민서는 이연후의 손짓 한 번에 뒤를 돌아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그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민이 코를 씩씩 불더니 이연후를 향해 선포하듯 말한다.
“다음번에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결코 오늘 같지는 않을 거다. 반드시 잡아서 당신을 감옥에 넣어줄 거야.”
“허허~, 그 전에 내손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성립되어야겠지?”
이연후 회장의 모습이 사라진다. 그가 내뱉는 말소리 또한 점점 더 멀어진다.
“오늘 같은 날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이연후 회장의 마지막 음성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그 의미는 두 번째는 바로 죽음이라는 뜻이다. 창민이 부르르 떤다. 지금과 같다면 그 말은 현실이 될 것이다.
이연후 회장이 떠난 홀은 정적만이 감돈다. 창민이 천천히 걸어서 진월을 향해 움직인다. 창민은 진월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진월의 심장 고동이 명확하게 들려오기 때문이다. 물론 상처를 입었는지 약간은 불규칙했지만 진월의 신체적 특성을 알기에 그 정도는 괜찮다고 판단한다.
“팀장님…….”
“…….”
불렀지만 대답은 없다. 창민이 진월의 앞으로 움직인다. 그의 앞에 같이 무릎을 꿇는다. 진월의 신장이 훨씬 더 크다. 창민이 앉자 진월의 얼굴도 올려다 볼 수 있다. 진월의 눈은 뜨여있었다. 마치 초점을 잃은 것처럼 멍한 눈빛이다. 미간에는 뭔가 고통스러운지 주름까지 잡혀 있다. 더 놀라운 것은…….
톡!
눈물 한 방울이 진월의 무릎 위에 떨어져 내린다. 창민의 시선은 진월의 눈물방울에 고정되어 있다. 창민이 침묵하자 주변으로 다가선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 침묵만이 계속 감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저 자는 누구지?”
“…….”
갑작스런 진월의 물음에 창민도 답을 하지 못한다. 사실 이연후 회장이 누구인지는 그도 잘 모른다.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는 대중 앞에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모르나?”
“네. 주요 인물 데이터베이스에는 등재되지 않은 사람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찾아보기는 해야겠지만 말입니다.”
“그의 뒤에는 어둠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그 어둠을 통과하면 지저의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은 어둠 말이다.”
“…….”
다른 이들은 진월의 말이 무슨 말인가 싶다. 그들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충격적인 발언이 뒤를 따른다.
“그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그, 그럴 리가……요.”
창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그들의 팀장인 진월의 모친은 이미 사망한 사람이다.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지금 진월이 보았다고 한 것은 분명 살아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을 보았다는 말인데……. 창민이 보기엔 진월이 정말 이연후 회장의 말대로 영혼에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진월이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댄다. 그도 인간인지라 쩍 갈라진 상처로부터 통증을 느낀다. 놀라운 것은 크게 벌어졌던 상처가 거의 다 아물어 있다는 점이다. 금빛의 영사는 마치 상처를 꿰매듯 계속 벌어진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진월이 몸을 일으킨다. 가슴에 뜨끔뜨끔 느껴지는 고통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육체적인 상처에서 오는 고통이 아니었다. 이연후 회장의 말대로 그의 영혼에 새겨진 상처로부터 오는 고통 같았다. 정말 무서운 낫이었다.
몸을 일으킨 진월은 강희의 상태부터 살핀다. 미러에 의한 반격을 받는 그 짧은 순간에도 회피동작을 취했나 보다. 상태는 그렇게 위중하지 않았다. 아마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면 더 많이 다쳤을지도 모른다. 최탑이 빨리 움직여 준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진월이 다시 창민을 본다.
“석판은?”
“여기요.”
“…….”
창민이 내민 것은 발신기를 숨겨 두었던 석판 조각이다. 석판의 귀퉁이 모양으로 제작된 발신기만 남아 있는 것을 대원들이 찾아온 것이다. 상대는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이 침투하게 되면 취할 행동 요령까지 모두 준비된 상태였다. 정말 무서운 자들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 시설을 준비하기까지 걸린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쉽게 포기하기 힘들 것이란 생각도 든다. 이곳을 찾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이 쉐인이란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쉐인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 벌써 몇 개째의 시설이 진월과 팀원들에 의해 노출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더 많은 시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재정 능력의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다.
진월은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는지 손을 가져다 댄다.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 주변을 돌아본다. 잘 만들어진 시설이다. 결국 다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얻은 것이라고는 통증을 선사하는 상처뿐이다. 느껴지는 것은 무력함이다.
우직! 손에 들린 발신기가 가루가 된다.
“이대로는…… 안 된다.”
- 작가의말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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