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장 살아서 걸어갔다는 말이다.
진월의 권이 거한의 얼굴을 가격했다. 주변으로 퍼진 충격파에 사물들이 부서질 정도다. 그런데 거한의 고개만 돌아갈 뿐 그의 움직임에 변함은 없다. 오히려 그의 양팔에 힘이 더 들어간다. 진월의 몸이 가뿐히 들린다. 마주 본 상태에서 거한의 오른발이 진월의 다리를 후린다. 진월의 기억에 자신이 들린 적과 땅에 처박힌 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거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진월을 후려친다.
쿠우웅! 진월의 육신이 바닥에 처박힌다.
바닥은 시멘트와 철근으로 이뤄졌지만 부서지는 것은 연약한 인간의 육체가 아니다. 단단하기로 유명한 철과 시멘트가 그 명성을 내놓아야 할 상황이다.
팀원들의 입이 벌어진다. 그들의 팀장이 강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런 진월이 이렇게 밀릴 정도로 상대가 강하다는 것에 놀란다.
강희가 보고 있다 안 되겠는지 움직인다.
능력을 발현시킨다. 순식간에 공간을 좁힌다. 저번 쉐인과의 접전에서 능력을 한계까지 발휘한 후 그녀는 뭔가를 얻었다. 흐릿해진 강희의 모습이 선명해진다. 이미 거한의 등 뒤를 점하고 있다. 발경의 자세다. 국장에게 꾸준히 배워 온 기술이다.
콰앙!
진각을 밟음과 동시에 그녀의 손바닥이 거한의 등에 닿는다.
터엉~
예상했던 음향이 아니다. 뭔가에 가로막힌 느낌이다. 기를 차단한 뭔가가 있었다.
어느새 휙 돌아선 거한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강희는 이를 악문다. 주저하지 않고 공격에 들어간다.
쾅! 쾅!
강희의 주먹과 거한의 손이 마주치는데 해머를 내리친 소리가 난다.
진월이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거한은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슬쩍 뒤로 물러나고 있다.
최탑의 손에는 탄두가 붉게 보이는 탄알이 몇 개 들려있다. 철갑탄이다. 주변에 떨어져 있는 것들을 주워들었다. 그의 손을 떠난 철갑탄이 거한을 향한다. 그 뒤로 민서가 등장한다. 입체적인 공격이다. 민서의 눈빛이 번쩍이는 광채를 발한다. 이들의 능력이 점점 향상되는 것일까? 아니면 팀장이 위험에 처하자 단결력이 향상되는 것일까? 이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뭔가 특이한 역장(力場)을 발현시킨 거한의 눈에 민서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눈빛이 유독 맑았다. 그녀의 눈 주변으로 홍염(紅炎)이 일어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거한의 눈에는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그 힘의 범위에 자신만 포함되어 있었다.
잠시잠깐 아득함이 느껴진다.
‘위험한 아이군.’
거한이 위험을 느낀 순간 그의 몸에 뭔가 틀어박힌다.
퍼퍼퍼퍽!
“음~!”
거한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에 가까운 음성이 흘러나온다.
최탑이 날려 보낸 철갑탄이 그의 몸에 박혔다.
거한이 발현한 역장은 민서의 공격으로 잠깐 흐트러졌었다. 최탑의 공격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거한이 착용한 강화복도 철갑탄까지는 완전히 막지 못했다. 온 몸에 최소한 다섯 발 이상의 탄환이 박혔으니 코끼리라도 쓰러질 정도다. 하지만 거한은 흔들리기만 했을 뿐 쓰러지지는 않았다. 거한의 두 손이 올라간다. 박수를 치듯 손바닥을 강하게 부딪친다.
파아앙~
“합!” 기합성을 발한다.
드드득~ 거한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력에 지하실 전체가 흔들린다.
모두의 시선이 거한을 향한다. 그의 몸에서 진동이 일어난다. 에너지의 파동도 보인다. 몸에 박혔던 탄환이 모두 빠져나온다. 놀라웠다. 완전 괴물 그 자체다.
강희가 그 모습에 쇄도하려 한다.
진월은 강희의 움직임을 보고 달려 나간다.
거한 또한 강희를 향해 몸을 날린다.
진월이 느끼기에 둘의 힘의 차이는 현격했다. 강희는 거의 모든 능력을 내보였지만 거한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부딪치면 필패(必敗)였다.
강희의 주먹과 거한의 주먹이 부딪친다.
그 사이를 진월이 파고든다.
부딪치는 그 순간 진월이 거한의 주먹을 발바닥으로 차낸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슬쩍 부딪치기만 했음에도 강희의 팔은 저 멀리 튕겨나갔다. 몸도 가누기 힘든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난다.
거한의 움직임은 체구에 맞지 않게 경이롭다. 마치 진월의 방해를 예상한 듯했다. 팔이 밀리는 방향으로 몸을 순간적으로 회전시키고 있었다.
후웅! 피부에 느껴질 정도의 바람이 휘몰아친다.
그만큼 거한의 회전이 빠르고 강하다는 반증이다. 진월의 양팔이 X자를 그리며 교차한다. 드러난 그의 팔뚝에 근육의 형태가 보일 정도다. 거한의 팔이 진월의 가드를 친다.
콰앙~
드드득~ 진월의 발이 바닥의 대리석을 부수며 밀려난다.
진월 또한 그 짧은 순간에 확연히 보일 정도의 영력을 발현했다.
거한의 능력에 강화복의 위력까지 더해졌다. 순수한 근력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파괴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충분한 힘을 동원했지만 거한의 파워는 상상 이상이었다.
진월은 공격을 막았던 팔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이기기 힘들지도 모른다.’
진월의 본능이 느끼고 있었다. 막고 있던 팔을 내리며 상대를 찾는다. 가만히 있어도 강인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존재다. 특이한 것은 적의와 함께 친밀감도 느껴진다는 점이다.
진월의 머리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진월의 고개가 휙 돌아간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한다.
옅지만 은은한 은빛의 오라가 거한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천정이 바닥인 것처럼 걸으며 이동 중이다. 거한의 앞쪽에 하얀 선이 생기며 문이 열린다. 천정에 문이 달려 있다. 꼭 그를 위해서 만들어 둔 비밀통로처럼 보인다. 거한의 손에는 놓아두었던 은색 가방까지 들려있다. 중요한 물건임이 확실했다. 진월이 그를 막기 위해 움직이려 한다. 거한은 보지 않고도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역장의 형성이 자유로워지면 중력까지 다스릴 수 있지. 넌 나와 비슷한 힘을 지녔다. 아니, 같을지도 모르겠군.”
“…….”
“널 만나길 원했는데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되었군. 다음번에는 좀 더 기대해보지. 오늘 난 내 능력의 절반도 쓰지 않았어. 좀 더 분발하는 게 좋을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보장해줄 수 없어.”
“당신 이름이 뭐지?”
“전철이다. 기억해두도록!”
마지막 말을 남긴 거한은 문안으로 사라진다. 아마 다른 층으로 연결된 비밀 통로로 보였다.
남겨진 팀원들은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고 있다. 그들에게는 충격의 연속이다. 얼마 전 쉐인이라는 엄청난 자를 만났다. 오늘 또 그에 못지않은 강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마치 그들의 존재가 장기판의 졸(卒)처럼 초라해진다.
“정신들 차려라.”
“…….”
진월의 한마디에 모두 상념에서 벗어난다.
팀원들의 안전을 확인한 진월이 어딘가로 향한다. 격투가 있기 전 전철이라는 자가 뭔가를 감춘 곳이다. 창민이 나섰고 개폐 장치를 확인한다. 몇 겹의 보안으로 락(LOCK)이 걸려있다.
“풀 수 있겠나?”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요.”
창민은 대답을 하면서 벌써 고도의 집중모드로 들어갔다. 진월의 블루투스로 각 층의 상황보고가 끊이지 않고 들어온다. 결론은 거의 빈집이다. 남아 있는 자료 또한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미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대피 조치에 들어갔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보가 새고 있다.’
진월이 느낀 점이다. 이곳의 침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NSCT 내의 인물들뿐이다. 답은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쪽으로 많이 기운다.
창민이 보안을 하나씩 풀어나간다.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나 중요한 물건이기에 이토록 대단한 시설에 몇 중의 보안을 걸어놓았을까?
* * *
밖으로 나온 전철을 마중 나온 것은 바로 블랙이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꽉 끼는 가죽옷은 섹시미를 더한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에 보이지 않는 은은한 미소도 감돈다. 살짝 웃는 블랙의 미모는 민서에 비해 절대 뒤지지 않는다. 민서가 조각 같고 큰 눈망울을 지녀 이국적인 매력을 풍긴다면 블랙은 하는 일과는 정반대로 정말 청순한 동양적 이미지를 지녔다. 살짝 짓는 미소에 휘어진 눈초리는 눈웃음만으로도 뭇 남성들의 마음에 화병(火病)을 남기리라. 전철을 향하는 목소리도 부드럽다.
“남겨놓으셨어요?”
“음. 왜 나온 거냐?”
“걱정돼서요.”
“아직은 네 녀석한테 걱정 받을 만큼은 아니다.”
“부장님은 항상 그렇게 뻣뻣한 것이 흠이에요.”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 그놈의 멘트 좀 바꾸세요. 재미없게 항상 같은 멘트예요?”
“…….”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절대 무슨 일에도 굴할 것 같지 않은 전철이란 부장은 블랙의 말 몇 마디에 항복하는 분위기다. 블랙은 피식 웃는다.
“잘 될 것 같아요?”
“그들에게는 새로운 미끼가 되겠지. 우리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고.”
“제거하실 건가요? 참 마음에 드는 아이들이던데…….”
“회장은 그걸 원하지.”
“부장님 마음을 묻는 거잖아요?”
“…….”
전철은 블랙의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걸어 준비된 차로 향한다.
* * *
키보드를 두드리는 창민의 손이 느려진다.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손을 크게 들어 엔터키를 친다.
탁! 찰칵!
엔터키를 치는 소리와 함께 걸려 있던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잉~’ 거리는 소음을 동반하며 검은 원형의 덮개가 열린다. 가로 세로 1미터 정도 되는 공간에 숨겨진 물체가 드러난다. 기계음을 동반하며 숨겨져 있던 물체가 위로 올라온다.
“석판?”
창민의 의아함을 담은 음성과 함께 석판으로 보이는 물체의 전면에 홀로그램이 형성된다. 녹색의 홀로그램은 석판 원형에서 문자로 보이는 것만 확대해 전면에 뿌려준다. 처음 보는 문자다. 그림의 일부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동물과 사람의 발 부분이다. 민서는 뭔가를 분석하는 프로파일러의 본능이 꿈틀거린다.
“중요한 물건인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좀 많이 의문스럽네요.”
“어떤 점이 그렇지?”
“그 전철이라는 사람 때문에요.”
“음.”
“그 사람이 무리를 했다면 어쩌면…….”
“가지고 갈 수도 있었겠지.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습득했다는 것이다. 본부로 옮긴다.”
의심스럽긴 했지만 중요해 보였다. 겉보기에도 고대의 석판이다. 한조각뿐이지만 연구를 해보면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진월은 귀대 명령을 내린다. 필요한 자료를 모두 수집하고 석판까지 챙긴다. 귀환하려던 그들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흠칫 놀란다. 진월은 즉시 블루투스를 통해 다른 조를 호출한다.
“외부로 빠져나가는 자들과 접촉하거나 본 조는 즉시 보고한다.”
“추가 보고는 없습니다.”
모든 조가 똑같은 대답을 해온다. 진월의 팀원 모두가 멍해진다. 창민은 어이가 없는지 입을 연다.
“분명 한 명은 총알을 머리에 맞아서 즉사했는데…….”
“…….”
창민이 한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은 없다. 분명 셋 다 죽어서 엘리베이터 안에 있어야 할 주검이다. 죽은 자가 스스로 움직였을 리는 없다. 누군가 그 자들의 시체를 가지고 갔을 수도 있다.
엘리베이터에 탄 진월은 모든 층을 다 누른다. 층마다 문이 열린다. 진월은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유심히 살핀다. 엘리베이터가 세 개 층을 지났을 때 진월이 내린다.
핏자국이다.
신발의 뒷굽 부분만 찍힌 발자국이다. 그 발자국도 앞으로 갈수록 옅어진다. 진월은 쭈그리고 앉아 피를 찍어본다. 찐득하니 피가 묻어난다.
“걸어갔군.”
“걸어가다니요?”
창민이 의아해서 되묻는다.
“살아서 걸어갔다는 말이다.”
“네에? 그게 말이 되요?”
“모두 투입해서 그들이 빠져나간 비밀 통로를 찾아낸다.”
[네.]
블루투스를 통해 각 조장들이 답을 해온다. 진월은 한참을 핏자국과 주변을 돌아본다. 이들은 무엇을 위해 거대한 연구시설을 만들었을까?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들을 모으고 강화된 능력을 지닌 인간들을 만들었을까?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상념들이 그의 뇌리를 가득 채운다.
- 작가의말
저녁에 한편 더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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